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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다른 해석의 [공으로 보는 금강경]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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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5-09-01 10:10:11
조회수
3811
[서문]

불교의 대표적 경전 가운데 하나로서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蜜經』 또는 『금강반야경金剛般若經』이라 한다. 이 경經은 세존世尊이 그의 제자 수보리須菩提와 나눈 문답을 空이라는 주제로 엮은 것이다.
흔히 접하는 32개의 분절로 나눠진『금강경』은 중국 양梁나라 무제의 장자인 소명태자昭明太子가 편집해 놓은 것이다. 전반적으로 분절과 제목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는 있지만,『금강경』의 주제인 空에 입각해서 볼 때 미진한 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특히 분절의 제목이 주제를 벗어나거나 중복되는 것이 많아 대폭적인 수정이 불가피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에 필자는 천학임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본 경經의 분절과 제목에 손을 대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럼으로써 구절마다 공화空化되어 불법의 가치가 최대한 드러나도록 했다.

「금강경」의 자의字義에 대한 해석을 보면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부처의 지혜를 뜻한다고 풀기도 하고, 금강저金剛杵(vajra)를 예로 들어 마군의 항복을 받는다는 뜻을 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편으로 ‘금강金剛’은 중생의 업장을 빗댈 때 쓰는 말이기도 하다. 세존世尊은 도저히 벗겨질 것 같지 않은 두꺼운 업장을 금강석에 빗대서 표현하곤 했다. 사실 중생의 업장만큼 벗기기 어려운 것도 없지 않은가. 그것이 쉬웠다면 세상에 중생 문제는 일찌감치 없었을 테고, 수행의 길도 그렇게 요원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존은 어떤 방법으로 중생들의 업장을 녹여 깨달음으로 이끄는가?
그가 들고나온 것은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닌, 제3의 존재 형태인 空이다. 세존은 有에도 無에도 속하지 않는, 그래서 매우 단순하면서도 심오한 空을 실존實存의 모습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有와 無로 가르는 중생의 시각을 네 단계[四相]로 나누고, 이것을 뛰어넘어 공화空化할 것을 주장했다. 중생이 사상四相을 초월해 공화空化하면 부처가 된다는 아주 간단명료한 얘기이다.
이 내용이 지루하리만큼 반복해서 등장하는 것이『금강경』이다. 그래서 空과 사상四相8)을 모르면 본 경經을 수만 번 읽더라도 그 뜻을 헤아리기 어렵다.
여기서의 사상四相이란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말한다. 기존의 해석을 보면 주로 ‘외계의 정보를 미혹되게 바라보는 네 가지 집착심’으로 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금강경』은 그 순간 매우 모호하고 난해한 가르침으로 돌변한다. 그래서 독자들 사이에는 본 경經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헷갈려서 몇 번 읽다 내려놓은 경험이 있는 분들도 적잖을 것이다.
아상이란「나 위주로 보는 마음」을, 인상이란「나와 남을 함께 보는 마음」을, 중생상이란「깨달은 자와 깨닫지 못하는 자를 나누어 보는 마음」을, 수자상이란「일체의 만유萬有를 시공時空에 수놓아지는 정보의 다발로 보는 마음」을 각각 뜻한다. 수행이 진전됨에 따라 생겨나는 마음의 경지를 구분한 것으로, 이 네 가지 시각을 줄여서 사상四相이라 한다. 실로 불교 수행의 요체를 담고 있는 것이기에, 이것이 뜻하는 바를 바로 알지 못하면『금강경』의 절반 이상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존은 일생 동안 중생이 지닌 사상四相을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과정을 거쳐 공화空化하도록 가르쳤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불법이다. 하지만 그 역시 여느 중생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으로는 영생할 수 없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뚱이는 때가 되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천리天理이다. 그래서 세존은 육신을 벗어야 했고, 그가 남긴 법륜法輪은 정리되어 후세에 경經이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그 경經들은 제각기 기능을 하고 있다. 중생들로 하여금 반...(하략)

分章
■ 序文
제1장. 修始下心分 - 수행은 낮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제2장. 請法發願分 - 법문을 청하는 마음가짐
제3장. 滅度正宗分 - 중생 제도의 올바른 뜻
제4장. 布施無住分 - 머무름 없는 보시를 하라
제5장. 諸相非相分 - 일체의 相은 相이 아니다
제6장. 佛法非法分- 불법은 法이 아니다
제7장. 無爲現差分 - 걸림이 없이 분별을 드러내다
제8장. 無所傳法分 - 전할 바의 法은 없다
제9장. 修果無相分 - 수행하여 얻은 경지가 없다
제10장. 無住生心分 - 머무름 없이 생각을 내라
제11장. 有法有佛分 - 法이 있는 곳에 부처가 있다
제12장. 如法受放分 - 法 그대로 거두어 놓아 버리라
제13장. 經無其實分 - 經은 그 실체가 없다
제14장. 離相無住分 - 형상에서 벗어나 머무름이 없다
제15장. 守經果大分 - 經을 지니는 공덕은 한량없이 크다
제16장. 實無有法分 - 有로 이루어진 세상은 없다
제17장. 無住無別分 - 머무름이 없어 구분할 바가 없다
제18장 忘色越相分 - 色을 잊고 相을 넘어라
제19장. 衆生無存分 - 중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제20장. 無覺可得分 -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란 없다
제21장. 佛無諸相分 - 부처는 어떤 相도 없다
제22장 不滅永存分 - 소멸하지 않고 영원히 존재하다
제23장. 非有非無分 -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제24장. 無所說經分 - 부처는 經에 대해 설한 바가 없다
■ 後記

* 왜 불법은 無爲의 法이어야 하는가?
깨달은 사람의 눈에는 제도해야 할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끌어 완성할 것도 없고 그냥 내버려 둘 것도 없다. 삼라만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체가 실존實存인 까닭이다. 따라서 부처는 無爲에서 法을 설한다. 無爲라는 본처에서 法이라는 분별을 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부처는 성聖으로도 보이고 속俗으로도 보인다. 어떤 때는 고고한 학처럼 거룩하면서도 어떤 때는 흔하디흔한 참새처럼 범속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는 법法과 속俗 모든 것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그래서 실존과 허상, 절대와 상대, 통합과 분별···등의 모든 속성을 함께 지니고 있는 것이다. (40p)

* 부처는 분별을 초월하여 절대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절대라는 또 다른 분별에 갇힌 꼴이 될 것이다. 그렇기에 부처의 位는 분별과 절대를 한꺼번에 초월하여 분별과 절대에 함께 머물러야 한다. 그래서 法이면서 非法이고, 法도 아니고 非法도 아니게 된다. 이쯤 되어야 가히 해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불교가 탄생한 이유는 피조물의 한계를 극복하여 영생과 열반을 이루기 위해서다. 이것은 현실의 가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더 높은 차원의 정보를 습득하는 것을 의미한다. (44p)

* 그래서 세존은 시종일관 法을 강조하면서도 그것이 분별에 의해 왜곡될 것을 우려하여 非法을 빼놓지 않고 거론한다. 불법이 불법이 아니어야만 불법이 되는 이치, 바로 불법에 대한 분별심마저 초월하여 法을 전하라는 무소전법無所傳法의 가르침이다. (45p)

* 아라한이란 삼라만상을 시간과 공간으로만 보는 경지이다. 사다함에서 거울을 들고 삼라만상을 비추고 있다고 한다면, 아나함은 거울을 당겨 삼라만상과 일체가 되어 바라보는 경지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아나함에서의 거울(共鳴)이 쓸모없게 돼 버리는데, 이런 경지를 아라한이라 한다. 거울이 없이도 一心과 하나로 존재하는 상태, 이쯤 되면 일체의 분별이 사라지고 절대 평등에 머무르게 되어 부처라 이를 만도 할 것이다.
그러나 세존은 이런 아라한의 경지 또한 아직은 중생이라고 단언하셨다. 왜 그런 것인가? 아직 그 이상의 단계, 즉 열반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50p)

* 깨달은 부처의 눈엔 삼라만상 어느 것도 空이 아닌 것이 없다. 이렇게 되면 중생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데, 이는 바꿔 말하면 중생이라고 착각하는 것들만 수두룩하게 널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부처들이 깊은 착각의 늪에 빠져 스스로 중생이라 생각하게 된 것인가? (55p)

* 그런데 어떤 중생이 불법을 통해 자신이 바다임을 깨달았다고 치자. 이때 변한 것은 무엇인가?
물방울이 바다로 변한 게 아니라, 물방울은 원래부터 바다였다. 바다가 정보의 파도를 일으키면서 발생한 낱낱의 현상이 물방울일 따름이다. 따라서 물방울이 바다로 바뀐 게 아니라, ‘별개의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털어냈을 뿐이다. 이는 불법을 통해 물방울(중생)을 바다(부처)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그래서 세존의 입에서 ‘중생을 제도했지만 제도한 중생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56p)

* 중생은 부처가 되고 싶고 부처는 중생이 되고 싶은 것, 이것이 우주가 생겨먹은 본래 모습이다. 부처와 중생이 돌고 돌아 한 덩어리로 공존하는 모습, 이것이 실존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 이래서 성립되는 것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라는 바다에서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물방울을 일으키며 피아의 구분 없이 한 생명으로 둥글어 가는 모습, 이것이 깨달은 부처의 모습이다. 이런 공존의 미학을 가르쳐, 나고 죽음이 없이 열반의 가치를 일러주는 것이 불법이다.
그래서 불법을 일러 「영생을 이루어 열반에 이르는 가르침」이라 한다. 즉 영생과 열반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취하려는 수행인데, 바로 응무소주應無所住라는 바다에서 영생이,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는 물방울에서 열반이 나오게 된다. 이 둘 사이의 분별 자체도 사라져 들숨과 날숨처럼 한 호흡의 생명으로 화해 영존하는 것, 이것이 여래如來이다. (56~57p)

* 불교의 주된 관심사는 영원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이다. 전자를 취해 영생을 얻고 후자를 통해 열반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불교의 수행이다. 그렇기에 이런 시각에서 보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써 가득 채운들 그것이 크게 느껴질 리가 없다.
불교는 오로지 깨달음에 관계된 것이어야만 그것의 가치를 높이 친다. 그 어떤 물질을 가지고는 불법에 추호도 견줄 수 없다. 그래서 재시財施는 그것의 규모에 관계없이 법시法施에 비해 부족하다. 사실 영원한 생명과 무한한 열반을 물질로써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재시란 법시를 펴는 과정에 부수적으로 따라붙는 방편의 일종일 따름이다. (60p)

*『금강경』의 관점에서 보면, 대승과 소승 가운데 과연 어느 것이 옳을 것인가? 아마 이런 질문을 세존에게 했다면 크게 꾸중을 듣지 않았을까 싶다. 왜냐, 그런 질문 자체가 커다란 분별을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법은 대승이냐 소승이냐, 그 외에 어떤 종파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일체 분별의 족쇄를 끊고 해탈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방편에 마음을 두는 것은 들숨과 날숨을 견주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61p)

* 이런 이유로 세존의 설법은 뭔가 해답을 주면서도 결국엔 그 해답마저 부정한다. 중생들에게 불법의 동아줄을 길게 내려주면서도 그런 적이 없다고 잡아떼는 것이다. 왜냐, 불법이 중생구제의 동아줄이 되기 위해서는 그 실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69p)

* 이렇게 말하면 불교 수행이 꽤나 복잡하고 지난한 것처럼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구조는 매우 단순명료하다. 자신이 실존이라는 사실 하나만자각하면 부처가 이룬 경지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실존이 왜 성립되는지에 대한 온전한 각성을 통해「나 = 佛」의 등식을 완성하면 된다. 이 등식 하나를 이루기 위해 불교는 존재한다. (73p)

* 有란 것은 無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길고 짧은 것이따로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有와 無는 공존하며 이것을 空이라고 부른다. 空의 인연에 따라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 有이다. 그래서 有란 것은 마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있지 않은 환유幻有이다. (83p)

* 이처럼 지각과 인식의 차이에 의해 부처와 중생은 나뉘고, 이런 이유로 「부처의 눈엔 부처만 보이고, 중생의 눈엔 중생만 보인다」는 말도 나오게 된다. 실제로 깨달은 자의 눈엔 중생이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 제도할 대상이 없고 제도하기 위해 쓰는 法이란 것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 空이면서 열반인 까닭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부처처럼 지각하고 인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성불의 지름길을 묻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세상에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는 것만큼 쉬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억지로 비교하자면 눈꺼풀을 한 번 내렸다 올리는 정도랄까.
길을 걷다가 한쪽 모퉁이에 들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광경을 떠올려 보자. 고운 빛깔과 그윽한 향기에 취해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시선을 집중했다. 중생이란 바로 이런 상태이다. 부처가 촌각의 시간 동안 분별에 빠져 자신의 존재를 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부처로 돌아가려 애쓰지 않아도 감상의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원 모습을 되찾게 된다. 얼마 뒤 나그네가 들꽃에 흥미를 잃고 가던 길을 계속 가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촌각의 시간이 우주의 시간대로 보면 너무 길다. 그래서 분별에서 미리 빠져 나오려는 움직임이 생겨났고, 그중 극히 일부가 성공하여 부처가 되었다. 나그네의 원 모습이 된 자는 다른 나그네들이 들꽃에 심취해 있는 광경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가질까? 부처들이 잠깐 동안 분별을 감상하고 있는 모습인데, 이런 걸 가지고 중생구제니 대오각성大悟覺性이니 정혜쌍수定慧雙修니… 하며 그들의 손을 잡아 끌 것인가?
부처의 눈엔 중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잠시 분별에 집중하고 있는 부처들만 있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 적잖은 수가 분별에 너무 빠지다 보니 스스로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적당히 감상하다 시선을 돌리면 되는데, 그 방법을 깜빡 잊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분별에서 그만 머무르라며 잔소리 몇 마디 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위 말하는 불법이다. 그래서 불법의 실체가 딱히 뭐라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식에 의한 난해함을 잔뜩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그만 정신 차리라는 딱 한마디 한 것이 전부이다.
그래서 세상에 불법만큼 쉬운 건 없다. 그 말에 정신을 차려 원래의 모습, 부처로 돌아오면 되니 말이다. 그런데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그것이 너무 쉽다 보니 정신 차리는 자들이 거의 없게 된 것이다. 가령, ‘나는 누구인가?’ 화두 하나만 풀어도 정신이 차려진다. 부처의 본래 모습으로 복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쉬운 화두를 푸는 이는 거의 없다. 자고이래自古以來로 깨달았다는 숱한 고승들 역시 그 실체를 해부해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상당수다.
한 소식 들었다는 수행자들의 말을 보면,「답이 없다」, 「無이다」, 「문제가 잘못됐다」, 「나는 부처이다」,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영원하다」, 「지금 ‘나’라고 생각하는 건 가아假我이다. 진아眞我는 空이며 그래서 부처이다」, 「나는 일종의 정보덩어리다. 정보가 흩어지며 진짜 나가 남는다. 그것은 삼라만상의 바탕이며 부처의 본래 모습이다」… 등등 짧고 긴 수많은 답을 낸다. 하지만 이런 식의 답을 백날 한들 깨달음이란 없다. 분별의 조합을 통한 답은 그것이 정답과 일치를 해도 아무런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세존은 이미「중생=부처」라는 답을 내렸다. 따라서 ‘나는 누구인가?’의 화두의 답은 그것을 설명하는 것들이 된다. 하지만 들꽃을 감상하고 있는 나그네가 수만 번 ‘나는 부처이다’를 외친들 그게 깨달음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분별 속에서 분별을 가지고 풀어서는 화두의 답을 얻을 수 없다. 중요한 건 그가 들꽃에서 고개를 돌려 가던 길을 가는 것이다.
깨닫고 나면 고개를 돌려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만큼 쉬운 건 없다. 이것을 못 하는 이유는 분별의 문제를 분별로써 해결하려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수행자의 발목을 잡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며, 그래서 세존이 본 경經을 통해 모든 분별을 걷어낼 것을 반복해서 가르치는 것이다. 응무소주應無所住하여 찰나만 분별을 멈춰도 견성하고, 이생기심而生其心하여 그것에 조금만 숙달돼도 성불인 것을, 언제쯤이나 들꽃 향기에서 벗어날 것인지….(94-95p)

*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상대와 대비되는 절대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대와 거리를 두는 절대는 그 자체로 절대성을 잃기 때문이다. 그래서 응무소주應無所住 뒤에 이생기심而生其心이 따라붙고, 색즉시공色卽是空이며 공즉시색空卽是色이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상대와 절대 자체에도 걸림이 없게 되어 진정한 해탈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어떤 특출난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그 무엇보다 평범하게 된다. 앞서 「깃발에 얽힌 선문답」에 나온 밭 가는 농부처럼 말이다. 흔히 평범하기에 중생이라 하지만 중생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알고 보면 중생만큼 독특하고 유별난 존재도 없다. 왜냐, 아상我相이 큰 것에 비례해서 자신만의 특성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범은 부처만이 누릴 수 있는 경지이다.
삼라만상이 한 덩어리가 되어 분별이 종식될 때 비로소 해탈하여 평범한 경지, 대각大覺에 이르게 된다. 평범···, 그것은 삼라만상 모든 것이 다 부처가 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경지에서 나온다. 성聖과 속俗에 구애됨이 없이 무위無爲로 둥글어 가니, 절대絶對이고 참된 부처의 자리이다. (99p)

* 부처는 상대계와 절대계의 구분마저 초월하여 그 어떤 것에도 걸림이 없는 경지에머무른다. 그래서 부처는 어떤 때는 중생이고 어떤 때는 부처가 된다. 중생과 부처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기에 해탈이라 한다. 이처럼 일체의 분별이 없는 부처이기에 제도할 중생이 없고 그들을 제도할 法도 없다. 그러니 얻을 깨달음이란 것도 없다.
그렇다면 왜 세존은 수보리를 비롯하여 수많은 비구들을 모아 놓고 法을 설하고 있는가? 그 자체로 法에 대한 인식도 있고 중생 제도에 대한 원력도 지니고 있는 게 아닌가? (103p)

* 악몽은 그것이 꿈인 줄 알면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중생살이의 고통도 깨어나 환상이었음을 알면 사라진다. 생로병사에 대한 두려움도 자신이 영존永存하는 실존임을 알면 사라진다. 그래서 깨고 보면 모든 것이 즐거움뿐이다. 모든 성인들이 한결같이 깨어나라고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요컨대 깨면 초월이요, 잠들면 얽힘이다. 얽힘에서 모든 문제가 발생했으니 해결의 길은 오직 하나 깨어나는 길뿐이다. 깨어 나서 존재 가치를 영원히 이어 나가는 자를 여래如來라 하고, 모든 중생들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세존의 법문은 거듭된다. 그런데 묘하게도 법문을 들으면 들을수록 法이 사라지고 非法 역시 감춰진다. 그래서 세존의 法은 가히 깨달은 자의 法이며, 추호의 어긋남도 없는 진리의 法이다. (107p)

* 불교에서는 有와 無의 존재를 부정한다. 有와 無로 가르면서 일체의 분별이 시작됐고, 소위 말하는 중생이란 것도 여기서 생겨났다. 그래서 불교의 수행은 有·無와의 한판 씨름이다. 有·無를 갈라서 보느냐, 아니면 有·無를 일체로 인식하느냐에 따라 깨달음의 성패는 나뉜다. 후자를 좀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空이다.
그렇다면 空으로 본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111p)

* 수행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한때 돈오頓悟 뒤에 점수漸修냐 돈수頓修냐를 가지고 적잖은 논쟁이 붙기도 했지만, 사실 돈오돈수頓悟頓修·돈오점수頓悟漸修가 중요한 게 아니라 제대로 돈오가 됐냐는 것이다. 돈오가 사실이라면 뒤에 따라 붙는 수식어는 이생기심而生其心에서 발생하는 방편이니 크게 신경 쓰지 않다도 된다. 깨달은 뒤에 달마처럼 고고한 경계를 두드리든, 원효처럼 저속한 경계를 넘나들든, 그건 상대계라는 캔버스 위에 분별의 붓질이 남긴 표현의 차이일 뿐이다. (114p)

* 나를 가치 있게 하는 지혜를 불교에서는 반야般若라 한다. 반야란 어떤 것이 나에게 유리한지를 바로 아는 견식을 말한다. 따라서 반야는 나를 이롭게 하는 방향으로 인도하게 된다. 그 방향이 바로 깨달음이다.
깨달음이란 피조물이 지닌 시공時空의 한계에서 벗어나 실존화實存化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피조물에서 조물주로 거듭나는 일이다. 세상에 이것만큼 더 이롭고 가치 있는 것이 있을까?
흔히들 실속을 차리라는 말을 하는데, 진짜 실속은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 외에는 없다.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살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살든 깨달음의 길을 걷지 않으면 그 결말은 허무일 뿐이다. 시간과 공간의 압박에서 오는 두려움에 떨다 물거품처럼 허망하게 사라지거나, 어쩌다 종교라는 진통제를 맞고 괴로움을 일순 견뎌낸다 해도 약효가 빠진 뒤에 찾아오는 더 큰 고통에 신음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118P)

* 그런데 그 깨달음이란 것은 실체가 없다. 왜냐? 실존이란 것이 有도 아니고 그렇다고 無도 아닌 空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空을 가르치는 불법의 실체 역시 없다. 세존은 귀중한 시간을 쪼개 경經을 설했지만 法의 실체가 없는 까닭에 설한 바가 없다. 그래서『금강경』이 이렇게 책으로 엮어져 있지만 그 실상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空일 뿐이다. (119p)
작성일:2015-09-01 10:10:11 221.149.4.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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