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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무자( 趙州無子) 또는 조주구자( 趙州狗子)와 중도(中道)
 무문
 2015-11-10 20:07:22  |   조회: 3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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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주무자(趙州無子 또는 조주구자, 趙州狗子)와 중도(中道)

조주무자 趙州無子 Joju's Nothingness( Neant de Joju).
= 또는 조주구자 趙州狗子 Joju's Dog( Chien de Joju).

​趙州和尚 因僧問.
​조주 종심선사께 한 선승이 물었다
​A Sen-monk asked Joju, a Sen-master.
Un Sen-moine demanda Joju, une Sen-maitre.

​狗子還有佛性也無.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Has a dog Buddha-nature or not?"
"A un chien nature de Bouddha ou non?"

​州云、
​조주선사께서 대답하셨다.
Joju answered:
Joju repondu:

有. ​"있다." "Yu ( Has )!"
"Yu ( A: avoir )!"

​趙州和尚 因僧問、
​조주 종심선사께 한 선승이 물었다
​A Sen-monk asked Joju, a Sen-master.
Un Sen-moine demanda Joju, une Sen-maitre.

​狗子還有佛性也無.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Has a dog Buddha-nature or not?"
"A un chien nature de Bouddha ou non?"

​州云、
​조주선사께서 대답하셨다.
​Joshu answered:
Joju repondu:

無。​"없다." "Mu ( Nothing)!"
"Mu ( Ri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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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문 선사 평창(評唱)

참선(參禪)은 모름지기 조사관(祖師關)을 통달하는 데 뜻이 있고 오묘한 깨달음은 궁극에 마음 길이 끊어져야만 한다. 조사관을 꿰뚫지 못하고 마음 길을 끊지 못하면 이는 모두 짚으로 만든 허수아비와 같다. 말해 보라. 어떤 것이 조사관인가?

다만 이 '무(無)' 자 하나가 종문(宗門)의 한 관문(一關)이다. 이를 가리켜 선종 무문관(禪宗無門關)이라 한다. 터득한 이는 친히 조주 선사를 볼 뿐만 아니라 역대 조사와 손잡고 같이 행하고, 눈썹을 맞대고 같은 눈으로 보고 같은 귀로 들으리니. 이 어찌 경쾌하지 않으랴. 관문을 꿰뚫고자 하는 이 있는가, 없는가?

삼백육십 골절(骨節)과 팔만사천의 털구멍 등 전신에 의단(疑端)을 일으켜 밤낮으로 이 '무(無)' 자를 들어 참구(參究)하되 허무한 알음알이를 짓지 말 것이며, 있다 없다는 알음알이도 짓지 말고 불타는 쇳덩이를 삼킨 것같이 토하고 토해도 나오지 않게 하여 종전의 모든 다른 생각이 없이 오래오래 두고 순숙(純熟)하면 자연히 안팎이 하나가 된다. 이때는 마치 벙어리가 꿈을 꾸는 것처럼 혼자만 알다가 문득 깨달아 분명하면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리는 듯 하여 관우장군의 대도(大刀)를 빼앗아 손에 쥔 것과 같으니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생사에 자유자재하며 육도사생(六道四生) 가운데 재미있게 노는 그대로가 삼매(三昧)가 된다.

그러면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할 것인가. 평생의 기력을 다하여 이 '무(無)' 자를 들되 만약 끊어지지 않게 되면 한 점 법의 촛불을 밝히기에 좋은 때이다.

無門曰 參禪 須透祖師關 妙悟 要窮心路絶 祖關不透 心路不絶 盡是依草附木精靈 且道 如何是祖師關 只者一箇無字 乃宗門一關也 遂目之曰禪宗無門關 透得過者 非但親見趙州 便可與歷代祖師 把手共行 眉毛 結 同一眼見 同一耳聞 豈不慶快 莫有要透關底? 將三百六十骨節 八萬四千毫竅 通身起箇疑團 參箇無字 晝夜提 莫作虛無會 莫作有無會 如呑了箇熱鐵丸相似 吐又土不出 蕩盡從前惡知惡覺 久久純熟 自然內外 打成一片 如啞子得夢 只許自知 驀然打發 驚天動地 如奪得關將軍大刀入手 逢佛殺佛 逢祖殺祖 於生死竿頭 得大自在 向六道四生中 遊戱三昧 自作?生提 盡平生氣力 擧箇無字 若不間斷 好似法燭一點便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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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頌曰, 무문선사송, Mumon's Verse, Verset de Mumon >

​개의 불성이여!
​The dog, the Buddha Nature!,
Le chien, le Bouddha Nature!,

全提正令
​온통 제시한 정령이라
​The declaration, perfect and final.
La declaration, parfaite et finale.

​纔渉有無
​조금이라도 있다 없다 에 머무르면
​Before you say it Has or Nothing,
Avant de vous dire qu'il a ou Rien,

喪身失命
​목숨까지 잃으리라.
​You will die immediately.
Vous allez mourir immediatement.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1. 중도란 무엇인가?

ㅡ 중도란 곧 무자성[無自性]으로 공이며 연기이다.

ㅡ 무자성, 각각의 법이 고정된 성품(定性)을 지니고 있다면
곧 원인과 결과 등의 모든 일이 없어질 것이므로 무자성이다.

ㅡ 인과 연, 연기에 의해서 생기는 것을 존재( 법, 法)라고 한다.
ㅡ 이것을 공이라고 하며 가명(假名)으로 중도라고 한다.

ㅡ "있음(有)"과 "없음(無)"의 양 극단(二邊)을 벗어나기에
중생을 인도하기 위해 가명으로 중도(中道)라 이름 한다.

- ( 참조, 용수의 중론) -

2. 연기란 무엇인가?

연기( 緣起, patītyasamutpāda)

모든 현상은 무수한 원인(因:hetu)과
조건(緣:pratyaya)이 상호 관계하여 성립되므로,
독립 ·자존적인 것은 하나도 없고,
모든 조건 ·원인이 없으면 결과(果:phala)도 없다는 설.

나아가 일체현상의 생기소멸(生起消滅)의 법칙을 연기라고 한다.
“이것이 있으면 그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면 그것이 생긴다.
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멸하면 저것도 멸한다.”는 등으로 표현된다.

이같이 중생이 생사 ·유전(流轉)의 고통을 받는 경우의 연기를 유전연기,
수행하여 해탈로 향하는 연기를 환멸(還滅)연기라고 한다.

원시불교 이래의 사제설(四諦說:네 가지 근본진리)도 일종의 연기설로서
고(苦) ·집(集)의 2제는 유전연기,
멸(滅) ·도(道)의 2제는 환멸연기를 나타낸다.

연기설의 일반적 형태는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육입(六入) ·촉(觸)
· 수(受)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의
12종이 순차적으로 발생 ·소멸하는 것을 나타내는 십이연기이다.

ㅡ 참조, 네이버, 두산 백과 ㅡ

3. 중도의 내용

(1). 고행과 쾌락의 양 극단을 부정한 8정도( 八正道)
(2). 유와 무의 두 극단을 부정한 비유비무(非有非無)
(3). 단(斷)과 상(常)의 두 극단을 부정한 비상비단(非常非斷)
(4). 불생불멸(不生不滅)· 부단불상(不斷不常)·
불일불이(不一不異)· 불거불래(不去不來) 등

4. 조주무자 또는 조주구자와 비유비무(非有非無)

비유비무(非有非無)

. 무 - 비유(非有),
ㅡ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고정 불변하는 자아가 없다.
ㅡ 어떤 행위와 그 행위의 주체가
독립적인 실체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의존함으로써 서로를 성립시킨다.

. 유 - 비무(非無),
무의 세계라도 그것만의 독특한 성질이 있고,
또 그것을 인식할 수 있는 인식자(認識者)
( 유식에서의 의식, 선문의 주인공)이
있기에 비무의 세계이다.
ㅡ 만약 의식, 인식자, 주인공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무인 공을 알 수가 없을 것이다.

5. 절대무 - 공(空).

한국 선문의 제1 화두라는 조주무자의 화두는
개에게는 왜 불성이 없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이른바 그 유명한 무자 화두이다.

그런데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상대적인 유무의 대립(有無 對立)
즉 있음과 없음의 대립을 초월한
절대무(絶對無)를 경험하고 찾으면
저절로 풀리는 화두이다.

절대무( 絶對無)인 공(空)을 알면
있음과 없음의 문제도 저절로 풀린다.

마치 물의 안 보이는 형태가 수증기이고,
보이는 형태가 얼음이듯이
ㅡ 에너지 보존법칙으로 굳이 비유 한다면 ㅡ

공의 보이는 형태는
ㅡ 얼음 같이 형태가 보이는
ㅡ 불성의 있음이고,

공의 보이지 않는 형태는
ㅡ 수증기 같이 형태가 보이지 않는
ㅡ 불성의 없음이기에,

상대적으로 드러난 수증기와 얼음이
똑같은 물로서 하나이듯이

불성 있음과 불성 없음 역시
똑같은 공으로서 하나인 것이다.

따라서 개에게는 왜 불성이 없는가? 의 문제는
ㅡ 절대 없음인 절대 무, 즉 공을 알면 답이 나오기에
이렇게 문제를 바꿔도 무방하다.
<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하였는데
이 없음의 절대 없음, 절대 무란 과연 무엇인가?>

즉, 절대무 = 공 = 상대무 = 상대유

7. 가장 중요한 것은 위에서 무문선사가 평창 했듯이
골절과 털구멍의 몸으로 치열하게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지
절대로 머리의 알음알이로 화두를 연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 무인 공을 반드시 몸으로 경험해야만 합니다,

즉, 마음의 눈인 오안을 떠서
절대 무인 공을 인식하고 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seeing is believing)’ 입니다.
마음의 눈인 오안을 통해서
절대 무인 공을 직접 보고 경험한다면
조주무자의 화두도 쉽게 풀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인터넷 철학카페 같은데 가보면
서양철학을 20-30년 넘게 오래 공부하신 분들 중에도
불교를 독학 하셔서 화두에 대한 답을 알음알이로
척척 말씀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몸으로 하는 참선은 해 보지 않으신 분들이지요,
단지 아이큐가 매우 좋아서 웬만한 화두는 다 꿰고 있습니다.
제가 법 거량 한 번 하다 보면 놀랄 때가 많습니다만
이것은 진짜, 참 깨달음이 아니라 짝퉁 깨달음이지요.

절대 무인 공을 seeing, hearing 하지 못했는데
진짜 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안드로메다(은하계)를 못가보고 seeing하지 못했는데
안드로메다를 진짜 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자동차 운전을 직접 경험, 체험하지 못했는데
자동차 운전면허 1차 이론시험에 합격했다고,
자동차 운전을 진짜 안다는 주장을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까?

물에도 못 들어 가보고, 수영도 못하는 사람이
단지 수영 이론에 박학다식 하다고 해서
한강이나 동해바다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요?

위에서 무문선사가 평창 했듯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
마음길이 끊어지며 생사에 자유자재하며
육도사생(六道四生) 가운데 재미있게 노는 그대로가
삼매(三昧)가 된다고 했는데,
머리와 지식으로 인한 알음알이의 화두관통은
마음 길도 끊어지지 않고,
생사에 자유자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15-11-10 2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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