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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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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sim park
등록일
2017-03-22 13:48:29
조회수
4041
재가자도 수행을 해야 하는 이유
http://blog.daum.net/bolee591/16156243




붓다의 성도(成道; 정각을 이룸)와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
https://www.facebook.com/groups/1044491525565094/permalink/1643861905628050/

오늘날 변질되지 않은 붓다의 가르침과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붓다(Buddha, BC 624 ~ 544)를 바르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신화나 전설로서의 붓다가 아닌 역사적 인간으로서의 붓다와 붓다의 변질되지 않은 바른 가르침(正法)을 사실 그대로 드러내고자하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신화와 전설로 가득 찬 여러나라의 불전문학(佛傳文學), 세월이 흐르면서 가필, 윤색된 경전과 위경(위작된 경전), 특히 붓다 사후 500년이 지난 AD 1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작자 미상의 수많은 위작 경전, 정각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이 저술한 붓다의 가르침(담마, 다르마, 달마)에 대한 왜곡이 포함된 사상서(논장, 아비담마, 아비다르마, 아비달마, 주해서, 복주서 등의 해설서) 등에 기록된 것을 붓다의 가르침 또는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붓다는 당신 사후에 ‘당신(붓다)에 대한 우상화’(형상의 우상화, 붓다의 신격화)와 ‘당신의 가르침에 대한 우상화’(관념의 우상화, 가르침의 절대화)를 통해서 종교, 종파, 전통 따위를 만들고 그것에 집착하는 일이 발생하는 것을 매우 우려하고 경계했다. 붓다는 종교(Religion) 창시지가 되기를 거부하는 의사를 누누이 밝히고 강조했다. 종교로서의 여러 불교 그리고 여러 종파와 여러 전통은 붓다가 만든 것이 아니라 후세 사람들이 만든 것이다. 사실 붓다는 종교인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선 과학자에 가깝다.

붓다는 자신은 담마(다르마; 法), 우주자연의 실상(실제 상태/모습)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를 만든 자(신神)가 아니라, 과학자가 관찰경험을 통해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듯이 바른 수행(팔정도 계발 수행)의 실천경험을 통해서 법(法; 실상과 진리)을 발견하여 깨달은 자일 뿐이고, 그 깨달음을 향해가는 길을 안내하는 안내자일 뿐이며, 당신의 가르침은 그 깨달음의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또는 강 건너 깨달음의 언덕(해탈의 언덕,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을 향해 가는데 필요한 뗏목일 뿐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우상화가 붓다의 사후에 2500년 동안 여러 가지 형태(위작된 경전, 왜곡된 아비담마, 아비달마, 논장, 불상, 탱화, 왜곡된 전설 등)로 계속되어 왔고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에게 알려진 붓다의 생애 속에는 신화적, 전설적인 요소가 너무나도 많다. 그리고 붓다의 가르침을 기록했다는 경전들 속에도 후세 사람들의 가필(加筆), 윤색(潤色), 각색(脚色)과 위작(僞作)이 매우 많다. 이러한 후대에 변질, 변형된 요소들을 되도록 배제하고,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로서의 붓다와 그 가르침에 가능한 한 사실에 가깝게 접근하는 것이 정각(正覺)-깨달음의 언덕(해탈의 언덕,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과 완전한 행복의 경지)으로 가는데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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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의 성도(成道) : 붓다가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에 이르기까지..

붓다는 고대 인도의 소수 지배계층인 브라만계급이 사용하던 산스크리트어가 아니라, 붓다가 활동했던 갠지즈강 중북부지역의 고대 인도 민중어인 마가다(Magadha)어로 대중들에게 가르침을 설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마가다어는 사장되었다. 그런데 이 마가다어와 가장 유사한 고대 인도 민중어인 빠알리(Pali)어를 사용해서 붓다의 가르침(붓다가 설한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경에서 부터 마지막 설법인 대반열반경에 이르기까지)을 기록하여 모아 놓은 것이 빠알리어 경장(經藏; 경전 모음, 니까야Nikaya)이다.

붓다가 정각(正覺; 무상정등각의 줄임말)을 이루기 전후의 과정, 이른바 붓다의 성도(成道; 정각을 이룸) 과정은 빠알리어로 기록된 <삿짜까 숫따(Saccaka Sutta), M36> -이 경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가 질문한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붓다가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짐. 이 질의응답 중에 붓다 자신이 깨달음을 이루게 된 전후 과정을 삿짜까에게 설한 것이 있음- 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 경전(삿짜까 숫따)의 내용 중에서 붓다의 성도 과정에 관한 내용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행자를 위한 몸과 마음, 사념처의) 단계별 길들임 경(Dantabhumi Sutta), M125>을 반영하여-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이제 나는 끓인 우유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마음의 탐색작용(위딱까)과 회귀반성작용(위짜라)이 아직 있는 상태(마음의 미세한 진동 또는 동요가 있는 상태)에서, (세속 또는 신체감각을) 멀리 떠남에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숙카)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 앉혀서,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삐띠)과 행복(숙카)만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비교적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 앉혀서, 삼매에서 생겨나는 행복(숙카)만을 갖춘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괴로움(둑카)도 즐거움(숙카)도 뛰어넘어, 삼매에서 생겨나는 평온(우빽카)하고 깊고 청정한 사띠(심일경성)만을 갖춘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이와 같은 선정에 들었다 나옴으로써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인과연기적인)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기억하여 관찰했다. 한 생, 두 생, 열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우주)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여러 겁의 여러 삶들을 기억하여 관찰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용모, 신체)을 가졌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행복과 어떤 고통을 경험했고 어떤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과 모습을 가졌고... 이처럼 한량없는 (인과연기적인) 전생의 삶들을 기억하여 관찰했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초경에 도달한 첫 번째 지혜다. [이른바 숙명명(宿命明)의 지혜]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이러한 지혜(숙명명)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중생; 생명의 무리)과 모든 존재들의 생기 소멸(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눈으로 인간을 뛰어넘어 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인과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보았다. …… 이것이 내가 밤의 이경에 도달한 두 번째 지혜다. [이른바 천안명(天眼明)의 지혜]

이와 같이 마음이 통일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번뇌의 생기소멸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것이 괴로움이다'(고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괴로움의 발생(원인)이다'(집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멸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도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 감각적 쾌락에 대한 모든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존재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다. 나는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삼사라Samsara; 생사의 순환)하지 않는다'라고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내가 밤의 삼경에 도달한 세 번째 지혜다. [이른바 누진명(漏盡明)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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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고타마 보살은 먼저 사선정(四禪定)에 들었다 나와서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고, 맑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타마는 과거 생의 일들을 상기하여 관찰하고, 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인과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관찰하고, 번뇌의 인과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관찰했다. 달리 표현하면 사념처(四念處, 신수심법)에 대하여 거친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 현재에서부터 과거(12연기 역관), 현재에서부터 미래(12연기 순관), 안과 밖,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 저열한 것과 수승한 것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사유했다. 그리하여 고타마 보살은 초경(初更)에 첫 번째 밝은 지혜(명지明知)를 이루고, 이경(二更)에서는 두 번째 명지를, 삼경(三更)에서는 세 번째 명지를 이루게 되었다.

이 ‘세 가지 밝은 지혜, 삼명(三明)*’을 한역 경전에서는 이른바 숙명명, 천안명, 누진(멸진)명이라고 번역했다. 여기서 세 번째 명지는 곧 사성제(四聖諦)를 완전히 바르게 아는 완전한 지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의 지혜다.

그리고 반조에 들어가서 4주 또는 7주 동안, 모든 고통과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고의 행복(至福), 완전한 행복, 열반락 속에서 좌선과 경행을 반복하며 반조하고,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의 성취를 반복하며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의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함)을 반조하였다. 이렇게 고타마 보살은 고타마 붓다가 되었던 것이다.

붓다의 성도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모든 괴로움과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 완전한 자유)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Nibbana, Nirvana, 완전한 행복)을 실현한 것이다. 성도하기 이전의 고타마를 보살(菩薩, Bodhisatta, Bodhisattva,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는 뜻)이라고 하고 붓다(Buddha; 깨달은 자)가 된 후에는 세존(世尊, Bhagavad)이라고 존칭(尊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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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명(三明)* : 세 가지 밝은 지혜

삼명(三明)을 이루면 정각을 증득한 자가 된다.

삼명(三明)이란 정각(또는 아라한과)을 성취한 사람이 갖게 되는 지혜로 세 가지에 대해 밝게 아는 지혜인데, 한역 경전에서는 숙명명, 천안명, 누진명이라고 번역했다.

1. 숙명명(宿命明) : 고타마 보살은 현재에서부터 과거(그리고 현재에서부터 미래)를 통찰하여 갖게 된 숙명명으로 인과연기적인 업(業)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지나온 과거 생을 상기하여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갖게 되는 인과연기적인 업(業; Kamma, Karma)에 대해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전생을 한문으로 숙세(宿世)라고 한다. 즉 숙명명은 겹겹이 쌓인 과거 전생의 인과연기적인 업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연기의 법칙이기도 한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 또는 업(業)의 법칙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보고 아는 것이다.

2. 천안명(天眼明) : 고타마 보살은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을 통찰하여 갖게 된 천안명으로 우주자연의 연기를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거리의 ‘멀고 가깝고’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색(色, Rupa; 물질작용)과 명(名, Nama; 정신작용)의 인과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함으로써 갖게 되는 연기의 이치/법칙에 대해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천안명은 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근본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를 말한다. 즉 우주자연에 실존하는 모든 것은 연기(조건에 따른 상호의존)의 관계에 있으며 미시(찰나), 일상, 거시(성주괴공, 생로병사)적으로 매 순간 인과연기적인 생기 소멸의 순환(Samsara)을 계속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보고 아는 것이다.

숙명명과 천안명은 뭇 삶과 모든 존재의 실존 양상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한다.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그래서 세상(세간; 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의 조건 지어진(Conditioned, Sankhara) 행복과 육신과 물질과 부질없는 것들에 집착한다. 중생들은 그런 집착과 전도된 생각으로 인해 끊임없이 생사의 순환(삼사라; 윤회)을 계속하며 근원적 괴로움(둑카)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3. 누진명(漏盡明) : 고타마 보살은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여 갖게 된 누진명으로 사성제 전체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정각을 증득한 자(붓다)가 되었다.

이른바 숙명명으로 숙세의 연기적 인과관계(업)를 꿰뚫어 보고 천안명으로 세상의 연기적 실상(실존 양상)을 꿰뚫어 보게 되면[고성제] 모든 존재의 연기적 인과관계를 완전히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모든 존재의 실존 양상과 왜 그런 실존 양상을 갖게 되는지 그 근본 원인을 꿰뚫어 보게 된다[집성제].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알기 때문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게 된다[멸성제]. 그리고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고통과 번뇌)을 근원적으로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중생들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붓다는 그 길(방법, 실천법, 수행법)을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도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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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는 삼명(三明)으로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자유(해탈)와 평화,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완전히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열반)의 경지(상태)를 증득하고 난 후에

자신이 시행착오를 겪으며 암중모색하여 완성한 수행경험을 '경험적+합리적'으로 정리하여 자신과 같은 '깨달은 사람(붓다)이 되는, 무상정등각(위 없는 완전히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 줄임말로 정각)에 도달하는 여덟 부분(八)으로 이루어진 바른(正) 길(道), 줄임말로 팔정도(八正道)'라고 이름 붙이고, 그 바른 길(팔정도)을 바와나(경작하여 계발)하는 '팔정도 바와나(팔정도 계발 수행)'를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사람들에게 가르쳤다.

붓다가 가르친 팔정도 바와나(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 계발 수행, 계정혜 계발 수행, 실라-사마타-위빠사나)의 가르침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정각을 증득한 사람(아라한)이 되었다 (이른바 천이백 아라한)

당시의 인구 추정치와 역사적 자료를 참고한 학자들의 추정치에 의하면 붓다가 활동했던 갠지즈강 중북부지역에서 사문(재가, 출가를 포함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배우고 실천하는 사람)의 수효가 약 십만 명 정도였다고 하니 그 중에서 약 천 명 정도(백 명당 한 명꼴)를 자신과 같은 아라한(붓다도 아라한이다. 스승으로서의 능력이 매우 뛰어난 아라한)으로 이끌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존재가
붓다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완전한 자유와 평화
분별 집착 없는 지혜로운 바른 사랑(자비)과
완전한 행복에 머물기를...
작성일:2017-03-22 13:48:29 124.53.89.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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