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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각,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道聖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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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sim.park
등록일
2018-01-06 22:49:16
조회수
3851
여기에 소개하는 경전과 보충설명은 냐나띨로까(Nyanatiloka) 비구가 빠알리어(갠지스 강 유역의 고대인도 민중어 중 하나)로 기록된 경전모음인 니까야에서 발췌하여 1906년에 독일어로 번역 편집한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 가운데 사상제[四聖諦] 챕터(chapter, 章) 중에 도성제[道聖諦]의 팔정도 챕터의 정정[正定] 절(4장 8절)에 수록된 것으로 정원 김재성님이 우리말로 옮긴 것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냐나띨로까(Nyanatiloka) 비구는 1904년에 독일인으로는 처음으로 비구계를 받았습니다. 1902년에 비구계를 받은 영국 출신 아난다 메떼야(Ananda Metteya) 비구에 이어 서양인으로는 두 번째 비구입니다.

『붓다의 말씀(Das Wort des Buddha; The Word of the Buddha)』은 1946년에 영어로 번역 출판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2년에 ‘고요한 소리’출판사에서 한글로 번역(김재성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범례
[*]의 문장은 냐나띨로까 비구의 보충설명
<역주>는 역자의 보충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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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제[道聖諦] - 정각,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의 고귀한 진리

0. 두 가지 극단과 중도[中道], 그리고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고귀한 바른 길[Ariya-atthangika-magga; 八支聖道, 八正道]

비구들이여,
감각적인 욕락의 생활에 빠져있는 사람은 저급하며, 속되고, 고귀하지 않고, 진정한 이로움(이익)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다. 또 한편으로 결과 없는 고행을 일삼는 사람은 고통스럽고, 고귀하지 않고, 진정한 이로움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다.

이 두 가지 극단을 모두 버리고, 여래[如來]는,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중도,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지혜를 얻게 하며, 정각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를 발견하였다.

<역주 :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중생(생명의 무리)의 진정한 이로움(이익)은 '진정한 행복, 괴로움의 근원적 소멸, 탐진치의 소멸, 마음의 부정성의 소멸, 나(와 너)를 초월한 분별 집착 없는 바른 사랑[자비]의 증대'라고 여러 경전에서 말씀하신다.>

<역주 : 여래[如來]는 부처님께서 자신을 지칭하실 때 쓰신 호칭이다. 여래[如來]는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에 따라 그렇게 온 자(또는 그렇게 간 자)’라는 뜻을 지닌 고대인도어 따타가따[tathāgata; tathā­+gata, or tathā+āgata]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 중도란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해탈(괴로움의 완전한 소멸), 열반(완전한 행복)에 이르는 길인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바른 길[八支聖道, 八正道]이다. 여덟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 정견[正見]
(2) 삼마[Sammā] 상깝빠[Saṅkappa], 정사유[正思惟]
(3) 삼마[Sammā] 와짜[Vācā], 정어[正語]
(4) 삼마[Sammā] 깜만따[Kammanta], 정업[正業]
(5) 삼마[Sammā] 아지와[Ajīva], 정명(正命)
(6) 삼마[Sammā] 와야마[Vāyāma], 정정진[正精進]
(7) 삼마[Sammā] 사띠[Sati], 정념[正念]
(8)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 정정[正定]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如來]가 발견한,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중도,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지혜를 얻게 하며, 정각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이다.

相應部 LVI 11. <轉法輪經> SN V, 42.

<역주 : 부처님께서는 팔정도의 여덟 부분(정견·정사유·정어·정업·정명·정정진·정념·정정)을 바와나[bhavana; 계발 수행]의 관점에서 실라(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정진·정념·정정), 빤냐(정견·정사유) 세 그룹으로 그룹핑하셨다.

• 빤냐[Panna, 혜慧; 지혜]
1) 정견[正見], 삼마[Sammā] 딧티[Diṭṭhi]
: 바른 '봄, 관찰, 통찰(깊은 관찰), 조사; 앎, 이해, 견해 또는 믿음'
2) 정사유[正思惟], 삼마[Sammā] 상깝빠[Saṅkappa]
: 바른 '생각, 사유, 분석'

• 실라[Sila, 계戒; 계율]
3) 정어[正語], 삼마[Sammā] 와짜[Vācā]
: 바른 '언어, 말, 글'
4) 정업[正業], 삼마[Sammā] 깜만따[Kammanta]
: 바른 ‘업(業), 행위, 행동’
5) 정명(正命), 삼마[Sammā] 아지와[Ajīva]
: 바른 '삶, 생활, 생계'

• 사마디[Samadhi, 정定; 고요집중]
6) 정정진[正精進], 삼마[Sammā] 와야마[Vāyāma]
: 바른 '노력, 정진'
7) 정념[正念], 삼마[Sammā] 사띠[Sati]
: 바른 ‘사띠; 전념함, (되)새김, 기억함, 전념하여 또는 마음챙겨 알아차림, 삼빠자나[sampajāna; 대상에 대한 분명한 알아차림, 빤냐로 봄/앎], 깨어있음'
8) 정정[正定], 삼마[Sammā] 사마디[Samādhi]
: 바른 ‘삼매, 몰아(沒我) 고요집중’

실라[Sila]는 한문 경전에서 계(戒), 계행(戒行), 습관(習慣), 도덕(道徳)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code of morality, habit, moral practice 등으로 번역한다.

사마디[Samadhi]는 한문 경전에서 정(定), 삼매(三昧; 사마디의 한문 음사), 사마지(三摩地; 사마디의 한문 음사), 등지(等持), 심일경(心一境), 정신통일(精神統一)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concentration; lit. 'the (mental) state of being firmly fixed', onepointedness of the mind 등으로 번역하고, 'a concentrated, self-collected(차분한, 고요한), intent state(몰두 상태) of mind and meditation, which, concomitant with right living, is a necessary condition to the attainment of higher wisdom and emancipation(해탈)'로 그 의미를 설명한다.

빤냐[Panna]는 한문 경전에서 혜(慧), 반야(般若; 빤냐의 한문 음사), 지혜(智慧), 般若(智)慧 등으로 번역한다. 영어 경전에서는 wisdom, understanding, insight 등으로 번역한다.

부처님께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사마디 바와나’(사마디를 계발하는 수행), 즉 정정진(바른 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을 사마타라고 칭하셨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설명의 편의를 위해 사마타 후에 하는 깊은 빤냐 바와나, 즉 사마타 후에 깊은 정견(바른 관찰, 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를 계발하여 빤냐를 계발하는 수행을 위빠사나라고 칭하셨다.

(보다 상세히 설명하면) 사마타 후에 극대로 계발된 고요집중의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 능력을 사용해서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띠를 확립하고 '자신과 세상'(또는 身受心法)의 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통찰(깊이 관찰)하여 깊이 꿰뚫어 보고 바르게 깊이 분석하고 사유하는 깊은 정견·정사유를 계발하여 빤냐[실상과 진리를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 지혜]를 계발하는 수행을 위빠사나라고 칭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야말로 길이다. 완전히 바르게 깨닫기 위한 다른 길은 없다.
그대들은 이 길을 따라라. 이 길이야말로 악마(세간의 유혹)를 어지럽힐 것이다.

그대들이 이 길을 가면 괴로움의 화살을 빼게 되리라.
나는 괴로움의 화살을 뺄 줄 알고, 그대들에게 이 길을 설한 것이다.
그대들은 부지런히 정진하라. 여래는 길을 설(설명)해주는 사람일 뿐,
마음을 고요히 집중해서 길을 가는 사람은 탐진치의 속박에서 벗어나리라.

<法句經> Dhp 274-276.

비구들이여,
귀를 기울여라. 불사(不死)는 성취되었다. 나는 법을 드러내 보이고, 법을 가르친다. 가르침대로 실천하라. 그러면 오래지 않아, 바로 그 최상의 청정한 삶의 완성을, 바로 이 생에서 그대들 스스로 알게 되고, 증득하게 되고, 이루어 머물게 될 것이다.

中部26 <聖求經> MN I,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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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 7.정념[正念; Sammā-Sati]

<이전 정견[正見; Sammā-Diṭṭhi] 포스팅과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 Satipaṭṭhāna Sutta] 포스팅 및 별도 포스팅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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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정[正定, 바른 삼매; Sammā-Samadhi]

8.1 바른 삼매[正定]의 정의

바른 삼매란 무엇인가?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고요히 모여져 집중되어 있는 상태[cittekaggata, citta-ekaggatā ; 心一境性], 이것이 삼매[三昧; samadhi]이다.

[* 가장 넓은 의미에서 생각할 때, '바른 삼매'[正定; samma-samadhi]란, 선심[善心; kusala-citta]이 내재된 바른 정신적 고요집중 상태를 말하며,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사띠[正念]의 두 가지 덕목을 동반하고 있다.

'바르지 않은 삼매'[邪定; micca-samadhi]란 불선심[不善心; akusala-citta]이 내재된 바르지 않은 정신적 고요집중 상태를 말하며, 따라서 오직 감각적 욕망의 영역[欲界]에서만 있을 뿐 더 높은 영역[色界 또는 無色界]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경전에서 사마디[samadhi; 삼매三昧]라는 말이 단독으로 쓰일 경우에는 항상 바른 사마디[samma samadhi; 바른 삼매]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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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바른 삼매의 동기, 조건, 계발

사념처[四念處;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네 가지 사띠(마음챙겨 알아차림)의 확립], 이것이 삼매의 동기[대상, 因相, 기반, 목표, object; nimitta]이다.

네 가지 바른 노력, 이것이 삼매의 조건이다.

이러한 법들을 실행하고, 경작하며(닦으며) 계발하는 것, 이것이 삼매의 계발[열고 발전 향상함; bhāvanā]이다.

中部 44 <有明小經> MN I, 301.

[* 삼매는 근접삼매(近接三昧)와 안지삼매(安止三昧)의 두 단계로 나뉜다. 근접삼매는 초선(初禪)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초선에 접근해 가는 마음집중을 말하며, 안지삼매는 초선에서 사선(四禪)에 이르는 네 가지 선정(禪定)을 말한다.

바른 삼매(안지삼매)인 선정은 다섯 감각(오감각)의 영역[欲界]을 넘어서 있는 마음의 상태이며, 감각적인 욕망의 세계[欲界]로부터 멀리 떨어져 마음집중 수행에 꾸준하게 전념할 때에만 경험될 수 있다.

이러한 선정의 상태에서는 다섯 감각(오감각)에 대한 모든 인식(수상행식) 활동은 정지된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어서 생기는 어떠한 느낌들도 선정의 상태에서는 생기지 않으며, 어떠한 육체적인 느낌(오감각)도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외적인 모든 감각적인 느낌(오감각)들이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마음은 활동적이고, 아주 기민한 상태로 깨어있다.]

<역주 : 『붓다의 말씀』의 편저자인 냐나띨로까 비구는 『대념처경(大念處經)』에 설해진 가르침을 중심으로 팔정도의 일곱 번째 덕목인 정념[正念; 바른 시띠]에 대한 긴 설명을 마친 후, 팔정도의 마지막 덕목인 정정[正定; 바른 삼매]에 대해서 니까야에서 발취한 경전을 편집 수록하고 보충설명을 시작한다.

먼저 중부[中部; 맛지마니까야] 경전의 <有明小經>에 간단하게 설해져 있는 선정[禪定]의 정의, 동기, 조건, 계발에 대한 경문을 옮긴 후, 구체적으로 초선[初禪]에서부터 제4선[四禪]에 대해서 정리하고 있다. 여기에 <有明小經>에 대한 냐나틸로까 비구의 보충설명을 번역해 보았다.

경전에 제시된 바른 삼매(또는 선정)에 대한 정의는 가장 일반적인 정의로서 알려져 있는 정의이다. 즉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고요히 집중되어 있는 상태'가 그 정의이다.

다음으로 삼매의 동기로서 사념처[四念處;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네 가지 사띠의 확립]가 제시되어 있는 점에는 약간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본래 사념처 수행은 지혜의 계발과 직결되어 있어 위빠사나 수행의 내용임은 앞에서 살펴본 정념[正念; 바른 사띠] 절을 참조하면 알 수 있다.

선정과 지혜 또는 지(止)와 관(觀), 사마타[samatha]와 위빠사나[vipassanā]로 대표되는 불교의 두 수행법의 동기[대상, 因相, 기반, 목표, object; nimitta]가 동일하게 사념처(四念處)로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선정 수행과 지혜 수행의 공통의 기반을 확인할 수 있다.

사념처[四念處;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네 가지 사띠의 확립] 자체가 선정 수행을 위한 동기[대상, 因相, 기반, 목표; object, nimitta]인 동시에 지혜 수행을 위한 동기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두 가지 수행법이 서로 깊은 상호 연관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법구경(法句經; Dhamma-pada)>의 다음 게송(시구)에서도 확인된다.

"지혜가 없는 자에게는 선정이 없고, 선정이 없는 자에게는 지혜가 없다.
선정과 지혜를 갖춘 자, 그에게 열반은 가까이 있다."

선정과 지혜가 사념처를 공통의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이 두 수행법은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있음을 이해한다면 선정 수행을 위주로 하는 수행법과 지혜 수행을 위주로 하고 있는 수행법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불교 수행법의 두 날개인 선정과 지혜, 사마타[정정진(바른 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을 계발하는 수행]와 위빠사나[사마타 후에 깊은 정견(바른 관찰, 통찰)·정사유(바른 분석 사유)를 계발하여 빤냐(지혜)를 계발하는 수행]는 상호보완(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으며, 사념처를 공통의 기반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붓다의 가르침에 의거한 수행법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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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네 가지 선정[禪, 禪定, 색계 삼매; jhāna]

비구들이여, 무엇이 네 가지 바른 선정인가?

(1) 초선[初禪]

여기, 비구는 모든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모든 불선한 것들[不善法]을 떨쳐 버리고,
집중 대상에 대한) 마음의 탐색적 작용[위딱까]와 회귀반성적 작용[위짜라]가 (아직) 있는 상태(위딱까-위짜라, 즉 마음의 미세한 진동 혹은 동요가 아직 있는 상태)에서,
(감각적인 욕망과 불선법, 또는 세속, 또는 신체 감각을) 멀리 떠남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수카]이 있는, 그리고 (삐띠와 수카에 대한) 마음의 전일성[심일경성心一境性, 찟따-에깍가따]을 갖춘 첫 번째 선정[初禪]을 성취하여 거기에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 이것이 욕계[欲界; 감각적 욕망의 세계]를 벗어난 색계[色界; (미세한)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삼매[禪, 禪定, 색계 삼매, jhana]의 첫 번째 단계이다. 이 초선정[初禪]은 다섯 감각에 대한 인식 활동의 일시적인 정지와 오개[五蓋; 다섯 가지 덮개]의 일시적인 소멸과 마음집중의 힘을 통해서 얻어진다.]

벗들이여, 여기에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덮개[또는 장애; 五蓋]가 (일시적으로) 끊어진다.

(1) 감각적 욕망에의 희구가 끊어진다.
(2) 악의[惡意]가 끊어진다.
(3) 혼침과 졸음이 끊어진다.
(4) 들뜨는 마음과 회한에 잠기는 마음이 끊어진다.
(5) 회의적인 의심이 끊어진다.

첫 번째 선정에 도달한 비구에게는 다음과 같은 마음의 다섯 가지 작용[요소 또는 현상; 五禪支]이 있다.

(집중 대상에 대한) (1) 위딱까[vitakka, 尋; 탐색적 작용]와
(2) 위짜라[vicara, 伺; 회귀반성적 작용]가 있고
(3) 희열[喜, piiti], (4) 행복[樂, sukha],
(5) 심일경성[心一境性, 마음이 하나로 모여짐; citta-ekaggata]가 있다.

中部 43 <有明大經> MN I, 294.

[* 첫 번째 선정[初禪]에서 작용하는 마음의 다섯 가지 요소(작용 또는 현상)를 초선정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라고 한다.

청정도론(淸淨道論)에 의하면, 위딱까[尋, vitakka]는 물병을 잡는 행위에 비유되고, 위짜라[伺, vicara]는 잡은 물병을 놓아버리는 (집착을 닦고 놓아버리는) 행위에 비유된다. 초선정 삼매 상태처럼 수행의 대상에 마음이 완전히 몰입되어 있을 때, 위딱까는 산만함이 없어지고 탐색하는 성질을 가지게 된다. 초선정[初禪]에서는 이 두 가지가 함께 작용하고 있지만, 이 두 가지는 두 번째 선정[二禪] 이후에는 완전히 없어진다.]

<역주 : 부처님께서는 삼매를 색계 삼매(물질을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와 무색계 삼매(비물질을 집중 대상으로 드는 삼매)로 구분하셨는데, 특히 색계 삼매를 자나(jhāna, 선禪; 선禪은 자나..선나..선으로 변천된 자나의 한문 음사)라고 칭하셨다. 한문 경전에서는 대개 자나를 선(禪) 또는 선정(禪定)이라고 하는데, 정(定)은 사마디(Samādhi, 삼매三昧; 삼매三昧는 사마디의 한문 음사)를 한문으로 뜻 번역한 것이니, 엄밀히 말하면 선정(禪定)은 '자나사마디'(선삼매禪三昧)다.

자신이 든 삼매가 부처님께서 설(설명)하신 초선정인지 아닌지는 마음 상태(또는 마음 작용)에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요소가 있는지를 점검하고 확인함으로써 판단할 수 있다. 이 다섯 가지 요소가 진정 무엇인가(어떤 것인가)는 초선정에서 나온 직후에 초선정 상태를 반조(返照;되돌아 비추어 봄)해서 스스로 확인하고 알아내야 한다.

• 위딱까[vitakka, 尋, 尋求] : 니밋따[nimitta, 相, 因相, 理由, 전조前兆, 계표界標, 現相, 표상表相; 초선정 삼매 상태에 진입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마음 상태에 대한 물질적 표상; 경우에 따라서는 니밋따 없이 초선정에 드는 경우도 있음]가 아니라, 지복[至福; 삐띠와 수카]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여 움켜쥐는 탐색(찾음, 추구) 작용. 위딱까는 일종의 집착 작용이기도 하다.

• 위짜라[vicara, 伺, 伺察] : 위딱까(일종의 집착 작용)에 의해 멀어지는 초선정의 지복을 다시 무의식적으로 (집착을 반성하고) 놓아버림으로써 지복으로 반복하여 되돌아가는 회귀반성적 작용. 위딱까-위짜라 반복 과정은 '초선정 상태의 미세한 흔들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이다.

• 삐띠[piti, 喜, 喜悦] : 고요한 희열, 기쁨. (수카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다소 거친 기쁨)

• 수카[sukha, 樂, 快樂, 安樂, 幸福] : 깊고 고요한 행복, 평온하고 아늑한 행복감.

• 에깍가따[ekaggata, 전일성, 일경성一境性], 찟따-에깍가따[citta-ekaggata, 심일경성心一境性] : 마음이 완전히 한 곳으로 고요히 모여 있는 상태, 순수 고요집중. 고요한 멈춤, 시간의 멈춤, 시공(時空) 초월, 영원함, 비이원성(非二元性; 무분별) 등으로 느껴지기도(경험되기도) 한다.

초선정에서는 '지복(至福; 지극한 행복), 삐띠(고요한 희열; 다소 거친 기쁨)와 수카(고요한 행복)'에 대한 '미묘하고도 확실한 자각[正念과 知正; 사띠와 삼빠자나sampajāna]의 심일경성[찟따-에깍가따]'을 이루며 삐띠와 수카는 구분되지 않는다. 세 번째 선정[三禪]에 도달해서야 이 둘(삐띠와 수카)이 분리되고 수행자는 세 번째 선정[三禪]에 들었다 나온 후에 반조를 통해 삐띠와 수카를 구분하게 된다.

‘삐띠와 수카’는 물질세계(오감각의 세계, 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欲界)의 어떤 것도 능가(초월)하는 ‘지복(至福, 지극한 행복, 더 없는 행복)’으로 경험된다. 마음 상태에 위의 다섯 요소가 존재하고, 물질적인 오감각(신체 감각)의 인식(전오식前五識)을 포함하여 그 외의 어떤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때가 (색계) 초선정의 삼매 상태이다.

삼매(三昧)는 고대인도어 사마디[Samādhi]를 한문으로 음사한 것이다. 삼매는 '한 가지 대상에 대한 순수한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고요해진 상태'를 말한다. 보통 독서삼매에 빠졌다고 할 때, 독서에 대한 정신집중으로 고요한 상태에 빠졌다는 의미이다. 깨어있는 상태로 고요한 것이지 졸면서 고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 하나의 대상에 심취하여 어느 순간 자기(我)를 잊어버리면 그 무아지경(無我之境, 沒我之境, 삼매)의 행복은 매우 크다. 독서삼매라든가 진짜 삼매와 약간 닮은 상태조차도 매우 행복하다. 음악이나 춤 등에 빠져서 어느 순간 자기를 잊어버리고 어느 정도라도 근사 삼매(유사 무아지경, 근사 몰아지경)의 희열과 행복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사람은 그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한다. 수행이 깊어지면서 경험하는 진짜 '바른 삼매'[삼마 사마디, 正定]는 그 희열[삐띠]과 행복[수카]이 더욱 더 크고(至福) 차원이 높다.

삼매는 일상의식으로는 알 수도 없고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지극한 행복(至福), 신성한 황홀경, 마음의 청정함, 청정한 성스러움, 고요한 멈춤, 자아[自我; 스스로(自) 나(我)라는] 의식 사라짐, 비이원성(무분별), 궁극성, 시간의 멈춤, 시공(시간-공간) 초월 등의 느낌이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체험이므로, 그 체험(느낌)은 수행자를 압도한다.

이러한 (유사 또는 근사) 삼매의 체험(느낌)에 압도되어 미혹한(현혹된) 사람은 이 체험(느낌)을 자신이 믿는 어떤 '신(절대자,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브라만,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의 거룩한 불의 신 .. 등)과의 합일 또는 접신, 신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신비체험이나 축복' 따위로 오해하기도 한다.

'바른 삼매'[正定, 삼마 사마디; 바른 몰아 고요집중] 상태를 경험하게 하는 수행(수련, 훈련)을 부처님께서는 '사마디 바와나(계발 수행) = 사마타'라 칭하셨다. 부처님께서는 팔정도를 '바와나(계발 수행)'의 측면에서, '실라[계戒; 정어·정업·정명], 사마디[정定; 정정진·정념·정정], 빤냐[혜慧; 정견·정사유]' 세 부분으로 그룹핑하여 가르치셨는데, '바른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을 지칭하는 사마타[사마디 바와나]는 '정정진(바른 노력/정진)·정념(바른 사띠)·정정(바른 삼매)' 바와나를 통칭한 것이다.

삼매 상태의 경험은 절대자, 신, 신격화된 부처, 예수, 알라, 브라만, 샤머니즘의 장군신, 조로아스터교(중국에서는 불을 숭상한다 해서 배화교라 불렸다)의 거룩한 불의 신 .. 등의 은총이나 강림 따위에 의해서 발생하는 초자연적인 경험(신비체험)이 아니라,

언제 하든(BC 500년에 하든 AD 2018년에 하든), 어디서 하든(인도에서 하든 한국에서 하든 미국에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과학적 경험처럼, 언제 하든 어디서 하든 누가 하든 상관없이 조건이 갖춰지면 자연의 법칙에 따라 누구에게나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마음의 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대한 경험이므로 일종의 과학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쉽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은 아니다.

삼매(몰아 고요집중) 상태에 들어가면 외부의 오감각(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물질 감각, 신체 감각)이 전혀 인식되지 않고(전오식 사라짐; 오감각으로부터의 해탈?) '나(我) 또는 내 몸'이 사라진 듯이 느껴진다. 무아(無我)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스스로(自)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자아의식, 아상我相)이 삼매 상태에서는 한시적으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여기서 몰아(沒我)는 아상[我相; '나(我)'라는 상대(相)적 분별식] 또는 자아의식이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잠길 몰沒) 상태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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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제2선[二禪]

다시 비구들이여,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앉히고,
(마음이 안으로 더욱) 고요[평온, 평정, 우빽카]한 상태에 머문다.
(위딱까-위짜라가 없는) 삼매에 의해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수카]이 있는, 그리고 마음의 정결함[浄, 浄潔, sampasadana]과 마음의 전일성[心一境性, citta-ekaggata]을 갖춘 두 번째 선정[二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3) 제3선[三禪]

다시 비구들이여,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앉히고,
(마음이 안으로 더욱 더) 고요[평온, 평정, 우빽카]한 상태에 머문다.
성인(예류자~아라한)들이 말하는 '고요함[평온, 평정, 우빽카]과 사띠를 지니고 행복[수카]에 머문다'고 하는, 수카(고요한 평정심에서 오는 행복감)에 대한 (더욱)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갖춘 세 번째 선정[三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4) 제4선[四禪]

다시 비구들이여, 이미 희열[삐띠]과 슬픔은 완전히 끊어졌고,
이제 괴로움[둑카]도 즐거움[수카]도 떠나서(벗어나서, 뛰어넘어서),
(둑카와 수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고요함[평온, 평정, 우빽카]에 의한 사띠의 청정함이 있는[또는, 우빽카와 사띠가 청정하게 된; upekkha-sati-parisuddhi], 그리고 우빽카(온전히 청정해진 고요함, 평온, 평정)에 대한 (더욱 더) 섬세하고도 확실한 자각[사띠와 삼빠자나]의 심일경성[心一境性]을 갖춘 네 번째 선정[四禪]을 성취하여 머문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제4선[四禪]을 구성하는 요소는 평온[捨]과 심일경성[心一境性]이다.

『分別論』 「禪定分別」 Vibh 264.

비구들이여, 이것을 ‘네 가지 바른 선정[또는, 바른 삼매, 正定]‘[사선정, 四禪]이라고 한다.

長部 22 <大念處經> DN II, 313.

[* 청정도론에는 40 가지 선정 수행의 주제[業處]가 제시되어 설명되어 있다. 이 수행의 주제를 제대로 닦으면 다음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초선~제4선 ; 호흡에 대한 사띠[出入息念], 열 가지 까시나[十遍],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가운데 평온의 마음가짐[捨梵住].

초선, 제2선, 제3선 ;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四梵住] 가운데 '慈∙悲∙喜'梵住.

초선 ; 10 가지 부정관(不淨觀), 몸의 32 가지 부분에 대한 사띠[身至念]

근접삼매(近接三昧) ; 여섯 가지 사띠[六隨念; 불법승(佛法僧), 계(戒), 사(捨), 천(天)], 열반에 대한 사띠[寂止隨念], 죽음에 대한 사띠[死念], 음식을 싫어하는 생각[食厭想], 지수화풍(地水火風)의 네 가지 요소에 대한 사띠[四界區別].

4무색정(四無色定) ; 4선을 바탕으로 하여, 각각의 명칭에 따른 선정의 주제를 닦아서 다음의 4무색정을 얻는다.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선정 수행의 40 가지 주제에 대해서 청정도론의 3~13장에 다루어져 있다.]

<역주 : 위와 같이 팔정도의 마지막 덕목인 바른 삼매[正定]에 대한 설명은 네 가지 선정[四禪]에 대한 것이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냐나틸로까 비구는 청정도론을 참조하면서 선정 수행에 대해서 보충설명을 하고 있다. 40 가지 선정 수행의 주제와 각 수행의 주제에 의해서 얻어지는 선정의 단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전문적인 지식이 요구된다.

사선정[四禪]은 지혜의 계발을 위한 조건으로서 제시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선정과 지혜, 사마타와 위빠사나라는 두 가지 수행법은 어느 한 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도 있을 수 없는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상기해두자.

선정 수행에 동반되는 분명한 앎[正知]은 처음에는 힘이 약하더라도 지혜의 역할을 하며, 선정에 의해 잘 안정된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사물(자신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바르게 이해하는 성숙한 바른 지혜가 생겨나는 것이다.

불교의 목표는, 인간의 무지와 갈애[苦集聖諦]에 기인하고 있는, 인간 삶의 저변에 깔려 있는 삶의 근원적 괴로움[苦聖諦]을 뿌리째 없애어, 흔들리지 않는(조건 지어지지 않은, 조건 없는, 완전한) 행복인 열반[苦滅聖諦]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두 수행법[苦滅道聖諦]이 바로 선정과 지혜라는 불교의 입장을 분명히 이해한다면, 「붓다의 말씀」에서 정리된 팔정도의 전체적인 틀을 바르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삼매[三昧]를 닦아야한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잘 집중되어 있는 비구는 있는 그대로 안다.
무엇을 있는 그대로 아는가?
물질적 현상[色]의 발생과 소멸, 감수작용[受]의 발생과 소멸,
표상작용[想]의 발생과 소멸, 형성작용[行]의 발생과 소멸,
의식작용[識]의 발생과 소멸을 있는 그대로 안다.

相應部 XXII 5 <三昧> SN II, 13.

비구들이여,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해야 한다.
충분한 삼매가 있으면, 현상[Dhamma, 法; 연기현상]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볼 수 있다.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면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현상[法]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물질[色] 작용 무더기가 드러난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 감각[느낌; 受]·표상[想]·상카라[行]·식[識; 의식+무의식] 작용 무더기가 드러난 현상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요히 잘 집중된 비구는 오온(색·수·상·행·식 작용 무더기)과 그 원인(연기; 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 그리고 그것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있는 그대로 잘 안다. 그 원인이 일어날 때 오온이 일어나고, 그 원인이 소멸될 때 오온도 소멸되는 것을 비구는 분명히 보고 안다.

相應部 <三昧經> SN III.I.i.5[쌍윳따니까야 제3권 칸다(무더기) 쌍윳따(상응), 제1편, 제1품, 제5경]

물질작용의 무더기[色蘊], 감수작용의 무더기[受蘊], 표상작용의 무더기[想蘊], 형성작용의 무더기[行蘊], 의식작용의 무더기[識蘊]를 현명하게[abhinna] 잘 이해해야 한다.
어리석음[無明]과 존재에 대한 애욕[有愛]을 현명하게 없애버려야 한다.
사마타[止; 禪定]와 위빠사나[觀; 智慧]를 현명하게 닦아야 한다.
명지[明]와 해탈[解脫]을 현명하게 실현해야 한다.

中部 149 <六處大經> MN III, 289-290

비구들이여,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하라.
바른 삼매를 얻으면 비구는 법[法; Dhamma]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안다. 비구가 무엇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아는가?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

相應部 <三昧經> SN V.XII.i.1[쌍윳따니까야 제5권 삿짜(sacca; 1.진리 2.사상제) 쌍윳따(상응) 품]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깨닫고,
중생들로 하여금 보게 하고, 알도록 한 중도[中道]이다.
이 중도에 의해서 적정[寂靜]과 지혜와 깨달음과 열반에 이른다.

相應部 LVI, 11. <如來說> SN IV, 421

비구들이여, 그 중도[中道]란 정각, 해탈, 열반에 이르는 길인 여덟 부분으로 이루어진 성스러운 바른 길[八支聖道, 八正道]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여래가 발견한, 보는 눈을 주고, 앎을 주는 중도, 평온에 이르게 하고, 뛰어난 지혜를 얻게 하며, 정각을 이루게 하고, 열반을 얻게 하는 중도이다.

相應部 LVI 11. <轉法輪經> SN V, 42.

이 길을 따르면, 괴로움의 소멸을 이룰 것이다.

<法句經(Dhamma-pada)> Dhp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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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법(法; 현상, 실상과 진리, 사성제)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보실 수 있었을까?

위에 소개한 바와 같이 여러 경전들을 읽다 보면 법(法)을 여실지견(如實之見; 있는 그대로 바르게 봄)하기 위해서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할 것을 누누이 강조하시고 당부하시는 부처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우리도 부처님처럼 '바른 삼매(正定)'를 계발하여 사념처[四念處; 네 가지 사띠의 확립]를 완성하고 법[法, Dhamma]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바르게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부처님께서는 <유사정법경(類似正法), 상윳따니까야 SN 16:13>에서 여래가 가르친 '바른 삼매(正定)'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는 유사정법(類似正法)의 출현을 엄중히 경고하신다.

"깟사빠여, 중생들이 하열해지고 정법(正法)이 사라질 때에는 학습계목은 더 많아지지만 구경의 지혜에 안주하는 비구들은 더 적어진다."

"깟사빠여, 예를 들면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지 않으면 황금은 사라지지 않는다. 황금과 유사한 것이 세상에 생기면 황금은 사라지게 된다. 그와 같이 유사정법이 세상에 생기지 않는 한 정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정법(類似正法)이 세상에 생기면 정법(正法)은 사라지게 된다."

"깟사빠여, 자연현상이 정법을 사라지게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 쓸모없는 인간(사자충)들이 나타나서 이 정법을 사라지게 만든다."

"깟사빠여, 여기 사부대중(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이 여래(부처님이 자신을 지칭하는 호칭)의 가르침에 따른 공부지음을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여래가 가르친 '바른 삼매(正定)'를 존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머문다. 깟사빠여, 이런 유해한 현상이 나타나면 정법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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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주: 부처님의 성도(成道; 정각 이룸)

부처님께서 팔정도 바와나를 완성하셔서 정각을 이루시기 전후의 과정, 이른바 부처님의 성도 과정은 맛지마 니까야(中部)의 36번째 경(M36)인 <삿짜까 경, Saccaka Sutta, M36>에 비교적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이 경(삿짜까 경)은 자이나교의 교주 니간타의 제자인 삿짜까가 질문한 몸과 마음을 닦는 수행에 관한 질문에 부처님께서 답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진 경이다. 이 질의 응답 중에 부처님께서 당신이 깨달음을 이루는 전후 과정을 삿짜까에게 설(설명)하신 내용이 있다.

이 경전(삿짜까 숫따)에 있는 부처님의 성도 과정에 관한 내용을, 유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수행자를 위한 몸과 마음, 사념처의) 단계별 길들임 경, Dantabhūmi Sutta, M125>과 <성구경(聖求經; 성스러운 참구의 경), Ariyapariyesanaa Sutta, M26>을 함께 반영해서 요약 정리하여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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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타마 보살은 출가하여 찾아갔던 (무색계 삼매를 가르치는 요가수행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다카 라마풋다라는 두 분의 스승에게서 무색계 삼매에 드는 수행을 배워서 두 분 스승이 성취한 경지(단계)의 삼매를 모두 성취했다.

"가장 높은 경지(단계)의 삼매인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삼매에서 나온 후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번뇌는 되살아나고 생사의 의문도 여전히 풀리지 않으니, 이는 완전한 해탈과 열반이 아니다. 이 법은 빤냐(반야; 바른 지혜)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며, 완전한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것이 못 된다.” - <성구경(聖求經; 성스러운 참구의 경), Ariyapariyesanaa Sutta, M26>

그 후 고타마 보살은 고행에 의한 해탈을 가르치는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고통스러운 수행을 하였으나 완전한 해탈을 이루지 못했다. 고타마 보살은 자신의 수행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 완전한 해탈과 열반)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수행을 모색했다.

"이제 나는 우유죽을 먹어 힘을 얻어서, 모든 감각적 욕망을 버리고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떠나서, 마음의 탐색적 작용(위딱까)과 회귀반성적 작용(위짜라)이 아직 있는 상태(마음의 미세한 진동 또는 동요가 아직 있는 상태)에서, 신체감각(오감각)을 멀리 떠난 삼매에서 생겨난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의 심일경성을 갖춘 첫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위딱까-위짜라(마음의 미세한 진동, 동요)를 가라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희열(삐띠)과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의 심일경성을 갖춘 두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비교적 거친) 희열(삐띠)을 가라앉힌 삼매에서 생겨나는 행복(숙카), 그리고 청정한 사띠의 심일경성을 갖춘 세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그러한 즐거운 느낌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나는 안으로 더욱 고요하게 하여 마음을 통일하고 괴로움(둑카)도 즐거움(숙카)도 뛰어넘은 깊은 삼매에서 생겨나는 깊은 고요함(평정; 우빽카)과 깊고 청정한 사띠의 심일경성을 갖춘 네 번째 선정을 성취했다.

이와 같은 선정에 들었다 나옴으로써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전생의 삶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여러 가지 삶의 형태를 상기하여 관찰했다. 한 생, 두 생, 열 생, 백 생, 천 생, 십만 생, 세계(우주)가 팽창하고 수축하는 여러 겁의 여러 삶들을 관찰했다. 어느 곳에서 어떤 이름을 가졌고 어떤 모습(용모, 신체)을 가졌고 어떤 음식을 먹었고 어떤 행복과 어떤 고통을 경험했고 어떤 수명의 한계를 가졌고 그곳에서 죽어 다른 어떤 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는 이런 이름과 모습을 가졌고... 이처럼 한량없는 인과 연기적인 전생의 삶들을 상기하여 깊이 관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초경(初更)에 도달한 첫 번째 밝은 지혜다." [이른바 숙명명(宿命明)]

"참으로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그것이 나타나듯이, 무명이 사라지자 명지가 생겨났고 어둠이 사라지자 빛이 생겨났다. 그러나 내 안에서 생겨난 이러한 지혜(숙명명)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았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뭇 삶(중생; 생명의 무리)과 모든 존재들의 생기 소멸(삶과 죽음)에 대한 관찰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와 같이 나는 청정한 눈으로 인간을 뛰어넘어 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통찰(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 이것이 내가 이경(二更)에 도달한 두 번째 밝은 지혜다." [이른바 천안명(天眼明)]

"이와 같이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어 청정하고 순결하고 때 묻지 않고 오염되지 않고 유연하고 유능하고 확립되고 흔들림이 없게 되자, 나는 마음을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에 대한 관찰과 사유의 지혜로 향하게 했다.

'이것이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인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삼사라(순환; 윤회)다'[고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중생의 실존 양상(고苦의 순환)이 발생하는 원인이다'[집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와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이다'[멸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이것이 둑카(苦; 괴로움, 고통, 번뇌)와 삼사라(순환; 윤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도성제]라고 나는 있는 그대로 알았다.

내가 이와 같이 알고 이와 같이 보자(이른바 아라한도의 혜慧 해탈),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했다. 그리하여 모든 욕망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혐오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고, 무명의 번뇌에서 마음이 해탈되었다(이른바 아라한과의 심心 해탈). 해탈되었을 때에 나에게 '해탈되었다'는 앎이 생겨났다(이른바 아라한과의 혜慧 해탈).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은 다 마치고 더 이상 생사 순환(삼사라; 윤회)하지 않는다'라고 나는 분명히 알았다. 이것이 내가 삼경(三更)에 도달한 세 번째 밝은 지혜다." [이른바 누진명(漏盡明)] - <삿짜까 경, Saccaka Sutta, M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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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을 요약하면, 고타마 보살은 먼저 사선정[四禪]에 들었다 나와서 마음이 고요히 집중되고, 맑고, 밝고, 더러움이 없고, 무엇에 의해서도 장애를 받지 않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고타마 보살은 인과 연기적인 과거 생의 일들을 상기하여 깊이 관찰하고, 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깊이 관찰하고, 번뇌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깊이 관찰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과 세상(뭇 삶과 모든 존재들)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상)을 '있는 그대로' 깊이 관찰한 것을 깊이 사유했다.

달리 표현하면 사념처[四念處, 신수심법(身受心法)에 대한 사띠의 확립]을 완성하고, 자신과 세상에 대하여 거친 것에서부터 미세한 것, 현재에서부터 과거(12연기 역관), 현재에서부터 미래(12연기 순관), 안과 밖,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 저열한 것과 수승한 것을 '있는 그대로'(여실히)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했다.

그리하여 고타마 보살은 초경에 첫 번째 밝은 지혜[明, 明知]인 숙명명를 이루고, 이경에 두 번째 명지[明知]인 천안명을, 그리고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한 후 삼경에는 마침내 지고(至高)의 밝은 지혜[明, 明知]인 누진(멸진)명을 이루고 정각(완전한 바른 깨달음)을 증득(증명경험으로 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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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으로 정각을 증득한 후, 반조에 들어가서 4주(또는 7주) 동안, 모든 고(苦; 괴로움, 고통, 번뇌)의 완전한 소멸에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지고의 행복, 완전한 행복, 열반락 속에서 좌선과 경행을 반복하며 반조하고,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의 성취를 반복하며 정각의 증득을 반조했다. 이렇게 고타마 보살은 고타마 붓다(석가모니 부처님)가 되셨던 것이다.

부처님의 성도(정각 이룸)는 출가의 목적인 해탈(모든 괴로움과 모든 속박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남; 완전한 자유)의 완성이며 현세에 있어서 열반[涅槃, 빠알리어: 닙바나Nibbana, 산스크리트어: 니르바나Nirvana, 완전한 행복]을 실현한 것이다. 성도하기 이전의 고타마를 보살이라고 하고, 붓다[Buddha, 부처; 깨달은 자]가 되신 후에는 세존[世尊, 바가와Bhagavā, 바가바트Bhagavat]이라고 존칭(尊稱)되었다.

보살(菩薩)은 보리살타(菩提薩埵)의 줄임말이다. 보리살타(菩提薩埵)는 고대인도어 보디삿따[Bodhisatta 빠알리어, 보디사트바Bodhisattva 산스크리트어]를 한문으로 음사한 것이다. 보디삿따(보디사트바; 보리살타, 보살)는 '깨달은 자(붓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자'를 지칭하는 고대인도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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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명(三明; 세 가지 밝은 지혜)을 이루면 정각을 증득한 자(부처, 아라한)가 된다. 삼명이란 정각(또는 아라한과)을 성취한 사람이 갖게 되는 세 가지 밝은 지혜인데, 한문 경전에서는 숙명명, 천안명, 누진명(또는 멸진명)이라고 번역했다.

(1) 숙명명(宿命明) : 고타마 보살은 현재에서부터 과거를 통찰(깊이 관찰)하여 갖게 된 숙명명으로 인과 연기적인 업(業)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지나온 과거 생을 상기하여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지혜로, 인과 연기적인 업(業; 깜마Kamma, 카르마Karma)에 대해 완전히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과거 여러 생에 걸친 전생을 한문으로 숙세(宿世)라고 한다. 즉 숙명명은 겹겹이 쌓인 과거 전생의 인과 연기적인 업을 '있는 그대로' 통찰(깊이 관찰)하여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다시 말해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의 다른 표현이기도 한 인과응보의 법칙 또는 업의 법칙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것이다.

(2) 천안명(天眼明) : 고타마 보살은 가까운 것에서부터 먼 것을 통찰(깊이 관찰)하여 갖게 된 천안명으로 우주자연의 연기법(연기의 이치/법칙, 자연의 이치/법칙)을 완전히 바르게 깨달았다.

거리의 가깝고 멀고에 상관없이 일체 세간의 모든 고락(苦樂)의 모습(相)과 물질(色; 루빠rupa, 물질작용)과 정신(名; 나마nama, 정신작용)의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관찰하고 바르게 분석 사유함으로써 갖게 되는 지혜로, 연기의 실상과 연기의 진리에 대해 완전히 밝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달리 표현하면 우주자연에 실존(실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연기(인因-직접조건과 연緣-간접조건에 따른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미시(찰나)-일상-거시(성주괴공, 생로병사)적으로 매 순간 인과 연기적인 생기 소멸의 순환(삼사라samsara; 윤회輪廻-바퀴처럼 돌고 돎)을 계속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보고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를 말한다

요컨대 천안명은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연기의 실상)과 진리(진실한 이치, 자연의 이치/법칙, 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깊이 정견(바르게 관찰, 통찰)하고 깊이 정사유(바르게 분석 사유)하여 완전히 바르게 아는 지혜다.

숙명명과 천안명은 모든 유정(정신작용이 있는 존재; 생명)과 무정(정신작용이 없는 존재; 무생물)의 실상(실제 모습 또는 실존 양상)을 여실히(있는 그대로) 꿰뚫어 보는 지혜의 눈을 말한다. 중생(아직 깨닫지 못한 생명의 무리)에게는 그런 눈이 없다. 그래서 세간(감각적 욕망의 세계; 욕계)의 조건 지어진(conditioned, saṅkhāra) 부질없는 것들에 집착한다. 중생은 그런 지혜의 눈이 없기 때문에 무명(인식의 착각, 그리고 그로 인한 전도된 생각)과 집착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생사의 순환(삼사라samsara; 윤회)을 반복하며 근원적 괴로움(둑카dukkha)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

(3) 누진명(漏盡明) : 고타마 보살은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여 갖게 된 누진(멸진)명으로 사성제를 완전히 바르게 깨닫고 정각을 증득한 자(완전히 바르게 깨달은 자; 부처)가 되었다.

이른바 숙명명으로 숙세의 연기적 인과관계(업)를 꿰뚫어 보고, 천안명으로 자신과 중생(생명의 무리)의 실존 양상(실상)을 꿰뚫어 보게 되면[고성제], 자신과 세상(우주자연)의 실상(실제 모습, 실존 양샹; 연기의 실상)과 진리(연기의 이치/법칙; 연기의 진리)를 완전히 꿰뚫어 알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왜 그런 실존 양상을 갖게 되는지 그 근본 원인을 완전히 꿰뚫어 보게 된다[집성제].

그렇게 원인과 결과를 완전히 알기 때문에 미세하게 남아있던 존재에 대한 집착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나 마침내 멸진(누진 또는 상수멸)을 성취하게 된다[멸성제]. 그리고 자신 뿐만 아니라 모든 중생이 괴로움(고통, 번뇌)을 근원적으로 다 소멸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중생이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부처님께서는 그 길(팔정도)을 경험적으로 합리적으로 완전히 바르게 아시게 되었던 것이다[도성제道聖諦].>

모든 존재가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正法)을 따라
행복하고 평화롭고 자유롭기를...

May all beings
fillowing the Buddha's sammā Dhamma
be happy.. be peaceful.. be liberated(모든 괴로움dukkha으로부터 자유롭기를, 해탈하기를)...
작성일:2018-01-06 22:49:16 119.64.23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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