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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닉네임
내안그분
등록일
2018-01-31 18:29:35
조회수
1260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
셀 수 없이 오랜 옛적부터
이 몸을 만들어 보고 듣고 느끼고 알게 했으니
물건을 쥘 수 있도록 세밀한 팔과 손가락들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걷고 달리도록
긴 다리와 균형을 잡고 설 수 있는 발가락들

어느 것 하나 불필요한 것 없이
완전한 조화로써 세상에 적응하도록 베풀어 주신
내 안에 그분께 찬미의 노래를 부르노라

설혹 뜻에 맞지 않는 세상을 힘겨워하며
분노와 원망의 거품을 쏟아낸다 해도
그것은 모두 내 안에 그분께서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능력이
자신에게 존재함을 일깨우기 위한 일환이니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하는 것으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들리게 하는 것으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맛을 알게 하는 것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게 하는 것으로 존재하는
우리 안에 그분을 예경하는 것

우주의 모든 생명체들이여,
그것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일지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2/24

억울함에 화를 내고 분풀이를 해도
내안에 그분이 행하고 있음을 잊지 말거니
상대방도 무슨 잘못이 있으랴
그 안에 그분이 행할 뿐인데,
너무 길게 증오심을 간직하지 말라.

공부 못한 자식을 꾸중하던 어미가
돌아서면 쓰다듬어 보살피는 자애로움으로
행여 마음에 깊은 상처 입히지나 않았는지
내 안에 그분의 손길을 빌려 어루만져 주시게나,

입맛에 맞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주의 깊게 살펴야 할지니
쾌락을 일으키는 감각이 우리를 멸망케 하는 근본이니
거기에 너무 매달려 얽매이지 말고
싫은 것에도 한번 관심을 가져보라,

그 나름대로 의미를 발견한다면
좋고 나쁨에서 해방되리니
허공처럼 툭 트인 자유로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이라

지혜로운 자 모두를 포용하지만
어리석은 자 고집스런 자신의 견해에 속박 당하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3/24

때로는 부귀영화를 그리워도 하겠지만
무한 침묵의 길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그보다 심한 타락물은 없으리라.
두려워 말라, 내 안의 그분이 늘 보살핌으로
부족함 없이 채우고 있거늘

하수구가 없으면 온 집안이 오염되느니
가족 간의 화목함도 잊어버린 지 오래도록
기꺼이 자신의 삶을 뿌리치면서
우두커니 밤새 비추는 주마등처럼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그들을 위해
부귀영화를 좇는 자들이여,
머리 숙여 경배해야 하리라.

삼천포 가기 1
걸인 애비와 아들이 길을 걷다가
집에 불이 나서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걸인 애비가 아들에게 말하길,
넌 애비 잘 둬서 저런 걱정 겪을 일 없구나,
아부지 고맙심더 ~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4/24

신이란 관념, 혹은 창조주(主)란 관념
심지어는 내 안에 그분이란 관념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 밥 알 한 알갱이로 끝끝내 남아
빈 도시락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무아에 대한 성찰 없이
불멸의 존재를 추구하는 자들은 관념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만일 참으로 절대자인 창조주나 신으로 인해
세상이 창조되었다면 세상은 온통 절대자뿐이며
다른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육신에는 머리털 손톱 피부 뼈 등이 있듯이
사물은 비록 여러 형태로 나뉜다 해도,
생명체가 지니고 있는 의식 자체는
내 마음과 남의 마음이 함께 들어설 수 없기에
절대자 외에 다른 인식의 주체가 들어설 순 없으므로
절대자는 결코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으리라.

그런데도 창조주나 신 등의 관념을 끌어들이거나
내 안에 그분이란 관념을 짓는 것조차도
나라는 자아관념으로부터 비롯되어 생겨난 것이다.
그로 인해 아상의 소멸이 불가능한 때문에
성스런 도와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5/24

남의 잘못을 책망할 일이 있거든
그것이 사실인지 살핀 연후라도 늦지 않으니
화합에 있어서는 흙으로 불씨를 덮듯이
불문에 붙이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지만
작은 불씨가 큰불로 번지지 않도록
오해의 소지가 없이 원인을 규명함에 공명정대 하라.

수행도 하지 않고 재물을 모으지도 못한 채
병든 몸으로 쭈그리고 앉아
지나간 옛 일만 생각한다면
마치 늙은 따오기가 쓸쓸히
빈 연못에서 죽는 것과 같으리니

지극히 세밀하고 늘 변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생명체의 근원인 그분을
언제나 깨어있음으로 헌신하는 지혜로운 사람은
도처에서 그분을 보게 되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6/24

맹수들은 사냥감의 목을 물어 숨을 끊듯이
목을 통해 숨이 전신에 퍼지므로 목숨이다.
공기의 순환은 코로서 숨을 쉬지만
숨의 기운은 정수리 숨골로부터 끌어들이고
전신을 돌며 타버린 기운은
다시 숨골로 빠져나간다.

들숨과 날숨이 숨골로
운행됨을 지켜보는 자들은
온 세상을 이루고 있는
불멸의 존재를 경배하는 것이다.

탐욕과 쾌락에 취해
불속으로 달려드는 날벌레 같이
행위의 결과를 동기로 삼고 행위한다면
세상을 욕망의 대상으로 여기는 착각에 빠져 있으며
제 스스로 만든 거미줄에 묶여버린 거미처럼
쉼 없이 계속되는 업의 인과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끝없이 달리는 자체가 고통이기에
옛 선지자들이 한 결 같이 말한 것처럼
불성을 찾고 구하기 위해 행해진 모든 노력이란
꿈속의 허망한 노릇이라고 말한 의미를 알아차리면,
미세한 본능의 번뇌마저 끊어진 깨달음 얻으리.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7/24

나뭇짐을 지고 가다 보물을 만나면
나뭇짐 보따리는 던져 버리는 법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의 즐거움을 구하느라
바른 법을 듣지 않고 나뭇짐 보따리에 얽매여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한 채
왕이 초대한 궁궐에 가서도 식은 밥 한 덩이를 구걸한다.

한 밤중에 바닷가에서 돌을 모아둔 보따리를 주운 청년이
동이 훤히 틀 때까지 바닷물 속으로 집어 던졌고
날이 훤히 밝아 마지막 남은 돌을 던지려고 보니
그것이 값비싼 보물임을 발견했으나,

자신이 밤새껏 어리석은 일을 한 것이 원망스러워
손에 쥔 그것마저도 던져 버리듯
내재된 보물의 가치를 모르면 황금빛 불사조가
시궁창에 빠진 들쥐만을 호시탐탐 노리듯 한다.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8/24

강가에서 흘러가는 나무토막이
이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저쪽 언덕에도 닿지 않고
물에 잠기지도 않고 잘 흘러가면
큰 바다에 도달하듯이

수행자는 감관과 대상에 애착하여
붙들림 없이 제어한다면
성난 말처럼 날뛰던 마음을
채찍질 않고도 몰아가는 마부처럼
기쁨과 슬픔에 흔들림 없이 굳은 바위처럼
끊기 어려운 집착을 끊고 타는 듯한 욕망을 이겨 낸다.

여러 사람이 활을 쏘아 과녁을 맞추려고 하지만
잘 맞히는 사람은 그만큼 노력한 것이니
누구라도 잊지 않고 노력하면 과녁을 맞힐 수 있다.

그렇듯 감각들을 제어하기란 쉽지 않은 길
빨리 이루지 못한다고 한탄하거나 물러서지 말고
마음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고 나아가는 자
애욕과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는 도를 이루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9/24

개를 기둥에 묶어 놓으면 기둥을 빙빙 돌면서
서기도 하고 앉기도 하고 눕기도 하듯이
사람들은 육신에 묶여 욕망과 분노를 일으킨다.

육신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성품이
내 주인공인 줄 알아야
욕심의 갈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오랜 세월 동안 육신을 섬기는 마음이
주인인 줄 알고 산 무지로 인하여 보고 들음이 없으면
마음은 곧잘 무기력에 빠지게 되니
중심을 잡지 못한 연고이다.

바퀴살이 중심축을 향해 모이고 강물이 바다로 향하듯
늘 깨어있다는 것은 중심을 잡고 있는 것
중심을 잃어버린 마음은
욕망과 분노의 불길로 타오른다.

깨어있는 마음은 절망의 파도가 휘몰아쳐도
쉽사리 낙담하거나 실의에 빠지지 않고 흔들림이 없다.
그것들은 잠시 스쳐 지나는
바람인 줄 알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인간은 중심을 잡는 기틀이 없으면
바람에 나부끼는 허수아비처럼
온갖 쾌락에 탐닉하게 된다.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0/24

올바른 법이 무너지는 말법시대에는
오로지 재물과 권력의 다툼만을 제일로 여기므로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깨달음이라고 말하지 말라.
마음이 안정되어야 재물도 권력도 굳건한 것이다.

지난 과거의 일을 떠올리며
미래의 두려움으로 야기되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마군의 소행임을 분명히 알고
사생결단으로 깨어있음을 주목하라.

마치 마른 가지들을 모아
발로 밟으면 산산이 부서지듯
불안감이 바스라짐을 느끼면
그때 마군을 항복받는 도리를 알아차린 것

쉼 없이 마군의 위협이 몰아닥친다 해도
두려움 없이 무찔러 결국에는 마군을 정복하리라.
이렇듯 한번이라도 마군을 항복받는 도리를 알면
짐짓 애쓰고 노력해서 마군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음이 본래 없는 경지를 회복한 것이니
굳게 잠긴 법왕궁의 철문을 열고 궁궐로 들어서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1/24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나와 전혀 다른 것도 아니며 같은 것도 아니듯
보는 자(주체)와 보여지는 것(객체)도
마찬가지로 서로 같은 것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네

그런데도 둘을 제각각
나누어 봄으로써 마음이 생겨났으니
어리석은 자 마음을 실재한다고 여기나
지혜로운 자 마음은 본래 없음을 안다네

마음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잔잔한 수면에 바람이 불어
무수한 파도가 생겨난 것처럼
여러 가지 물질에 뒤섞인 세상을 살게 되었네

둘을 같은 것으로만 보려는 자
이 세상은 허망하고 진리만이 실재하나니
생사의 바다를 건너 열반에 이르고자 하지만

꿈은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듯
하나거니 둘이거니를 논할 바도 없음이라
이것과 저것의 둘로 나누고 한 쪽을 취하려는
미혹으로부터 진리는 멀어진다네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2/24

남들은 이익과 권세에 치부하더라도
우리는 무아의 진리를 배우고 통달해야 한다.
그것이 인류를 고통에서 건지는
유일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무아의 진리를 터득하게 되면
무언가를 찾아 구도의 여행을 떠났지만
시작된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붓다는 올바른 언행의 팔정도가 참된 도이며
혜능대사는 올바른 행이 불성이라고 하였듯이
내가 본래 없는데 무엇을 따로 취할 수 있겠는가,

다만 달라진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우주의 존재 자체인 깨어있음만이
유일한 수행의 방편임을 알 수 있으므로
내면에서 흘러 다니는 언어 관념을 모두 떨치고
오롯이 깨어있음만이 우리가 행할 바이리라.

내면을 지켜보는 깨어있음은
뿌리 없는 나무가 꽃을 피우고
햇살을 받아도 그림자 없는 나무처럼
인과를 벗어나 스스로 존재하기에
이미 그 자체로서 완벽하며 충만할 뿐이다.

그것을 주물러 어떤 결과를 이루고자 한다면
허공을 움켜쥐려는 사람처럼
여전히 무아의 진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다.

무아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처음에는 괴롭지만 나중에 기쁨을 주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바르지 못한 말과 행동을 끊는 일이고
둘째 경전을 읽고 외우는 일이며
셋째 좌선하여 삼매를 얻는 일이고
넷째는 들이쉬고 내쉬는 숨을 세는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처음에는 괴롭지만
뒤에는 기쁨을 주는 것이니
항상 정신 차려 자기를 고집하는 편견을 버리고
세상을 빈 것으로 보아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 최고의 즐거움이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3/24

세상이 시작된 근원을 논하는 사람들
고통의 화살에 맞고 신음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화살의 재질과 만든 자를 알고자 함이나
그것을 안다한들 무슨 도움이 되리요,

생로병사의 화살을 맞은 사람은 무엇보다
고통과 번민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욕심이 마음을 덮어 버리면
번뇌를 벗어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욕심에 덮인 마음은 분노하기 쉬워서
적은 어려움도 참아내지 못하고
남을 원망하게 되니 갈등이 더욱 심하다.

생사의 험한 숲속을 지나
편안하고 즐거운 열반에 도달하려면
남이 나를 원망해도 그에게 원망으로 갚지 말고
큰 바위처럼 마음을 흔들리게 하지 말라.

유능한 마부가 달리는 말을 멈추게 하둣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자기 마음을 잘 참아 이겨내면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하여 고통을 완전히 벗어나리라.

말로써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본질에 대해
남과 어울려 떠들면서 희론을 즐겨한다면
목마른 짐승이 아지랑이를
물로 보고 달려가지만
환각의 물로써 어찌 목마름을 채울 수 있으랴,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4/24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눈멀고 귀먼 자여,
따지고 헤아리는 마음으로
어찌 진리를 논하려 하는가,

집안의 등불은 한 번도 꺼진 적 없건만
제 스스로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앉아
어둠을 한탄하면서 무명이 끝날 날만 기다리지만
어둠을 보는 성품으로 밝음도 알거니와
밝음과 어둠이 둘 아닌 도리를 알지 못하면
이 세상 끝나도록 무명이 다하는 일은 없으리.

남쪽을 북쪽으로 착각한 사람이
고집스럽게 옳은 길이라고 여긴다면
바른 길 아니라고 일러주어도 말 듣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란 본래 없는 물건이라 한들
지금 분명히 인식하고 비교하며 선택하고 있는데
어째서 없다는 것인지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번뇌 없는 영원한 평안은 욕심을 없애야 얻는 것이며
만족함을 아는 삶은 애착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안정은 남과 어울려 떠드는 시끄러움이 아니라
조용한 가운데 얻어지는 것이니
자기 소견에 대한 집착과 희론을 멀리 벗어나야
무아의 도를 얻을 수 있으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5/24

영상이 텅 빈 스크린을 덮어버리듯
꿈속에서는 꿈꾸는 주체를 발견하지 못함과 같아
무아의 진리가 무르익어 의도하는 바가 멈추기 전에는
늘 깨어있는 그분을 감 잡기란 불가능한 일
열반의 성품이 있다지만 마음과는 존재의 차원이 달라
마음으로 헤아린들 가늠할 수 없다네,

영적 존재를 추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갖가지 경계를 체험하지만
그러한 경계가 모두 허공꽃인 줄 알지 못하면
스스로 감옥에 들어앉아 족쇄를 차고 있는 것

잡풀이라도 이름과 실체가 있거늘
만물을 창조한 열반의 성품이 어찌 실체가 없으랴만
밝은 대낮과 어둠의 한밤중은 영원히 함께 할 수 없듯이
열반의 성품은 마음으로 추구할 바가 아니지만
머릿속에 환영으로 가득 넘치면
밝은 대낮에도 눈먼 자는 어둡다고 말하네,

갈망을 통해서는 깨달음의 바다에 이를 수 없으니
이제 곧 사라질 환 같은 몸이라 말하지 말라
육신은 열반의 성품으로 모습을 나타냈기에
모양만 바뀔 뿐 언제나 그대로이니
영원을 탐내는 사람들 어리석다 말하리.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6/24

인간에게 열반의 성품이 없다면
먹고 마시며 쾌락에 탐닉하는 것을
삶의 최고 목표로 삼으며 살았을 것이다.

무수한 생명들이 태어나고 사라짐을 거듭해도
모든 강물이 바다에서 하나 되듯이
무지도 없고 고통도 없는 무한 침묵의 그곳,

있음과 없음이 함께 공존하기에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니며
또한 있음이고, 또한 없음인 것을
어찌 언설로 가리키려 하고 붙잡으려 하는가,

희뿌연 사념의 안개가 걷히고
한 점의 바람도 일지 않는 고요한 바다,
그 적멸의 자리에는 주관과 객관을 나눌 수 없어
보는 자와 보이는 대상이 둘 아님이라
행위가 그대로 결과로써 나타난다네,

업을 지어 목숨 받는 일 끝도 없이 전전하지만
생겨나지만 생겨남이 없고
사라지지만 사라짐도 없는 그 자리에는
윤회와 열반이 허공꽃과 다를 바 없는데
무엇을 좋다하여 따로 구하고
무엇을 싫다하며 애써 떨치려 하는가,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7/24

바닷가에서 모래로 집을 짓고는
내 집이라며 집착하던 어린아이가
파도에 무너지면 발로 헤쳐 버리고 마는 것처럼
자기 육신과 생각의 굴레를 벗어나야
진정 자유로울 수 있는 것,

통 안에서 굴러다니는 돌이
간다면 어디로 갈 것이며, 온다면 어디에서 오는가,
뿌려 놓은 인연의 씨앗이 무르익어 생겨날 뿐이니
오고가는 사람마다 그 모양 바꾸어 오고가니
가는 듯이 오고 오는 듯이 가는 것이라면
어찌 만남을 기뻐하고 이별을 슬퍼만 하랴!

이별의 괴로움으로 마음속에 깃들었던
슬픔의 화살은 지혜로운 자만이 뽑아낼 수 있느니
마음이 사람을 따르게 할지언정
사람이 마음을 따르면 고통의 멍에를 지고 가는 것
잠시 스쳐가는 삶, 고통 없는 즐거움만 누리면 좋으련만
애환과 고통을 통해 성숙한 의식이 결실을 이루나니
어찌 가슴을 도려내는 슬픔인들 마냥 두려워만 하리요,

집착 없는 마음이 평온을 이루게 하며
타는 듯한 욕망의 굴레를 열반의 성품으로
벗어던진 사람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하나니
육신에 얽매여 보고 들은 느낌과 생각으로 인해
가슴 속 깊이 숨겨진 고통의 화살은
거룩한 큰 지혜로써 멀리 사라진다네,
**
불법이란 것이 말로 하면 만 가지로 벌어지지만
이치로 들어서면 모두가 하나,
인터넷에서 바둑을 둘 때 지면 성질나고 기분 나쁘지만
정신만이 움직이는 아바타임을 알기 때문에
그것이 애착과 원망의 불길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현실세계도 그와 같음을 안다면 마음을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인간에게 존재하는 고통이란
정신의 아바타로 움직이는 육신과 마음을
실재한다고 생각하기에 견디지 못하는 것이리라.
고통 없는 평안을 찾고자 밖을 향해 구하며 희론을 일삼는 자
아바타로 움직이는 육신과 마음을 실재한다고 여기는
눈멀고 귀먼 자에게 아무리 불법의 도리를 말해준다고 해도
공연한 헛수고 일뿐이지만 단 칼에 법을 보는 자
모든 고통 여의는 열반의 성품을 보게 되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8/24

말을 냇물로 이끌더라도
물을 마시거나 마시지 않는 말이 있듯이
열반의 성품이 있고 그 길을 일러주어도
믿음을 내지 못하며 따르지 않는 사람은
열반에 이르지 못하리

미워하지 않을 것을 미워하면서
스스로 악업을 짓고 남을 괴롭힌다면
바로 자기 자신을 괴롭힘이니
원수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기 때문이다.

집착을 끊고 번뇌를 벗어나는 길은
자기 소견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느니
내 육신과 마음이 나라고 할 수 없고
또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아랑 곳 없이 병들고 늙어가며 죽는 육신을
어찌 내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속히 잊었으면 하는데도 두고두고 쫓아다니는
원망감이나 억울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을
어찌 내 마음이라고 할 수 있으랴,

이와 같이 육신과 마음이 내 것도 아니고
내 것 아님도 아님을 살피는 자는
마음의 재료인 생각들을 즉시즉시 내려놓으면서
고통을 일으키는 욕망과 분노의 굴레에서 벗어나리니
집착하고 매달리는 마음의 어리석음을 끊고
하고자 하는 뜻에서 자유롭게 되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19/24

애착에서 애착을 불러오고 미움에서 미움이 생기며
애착에서 미움이 생기고 미움에서 애착을 불러오는 것,
자신이 믿고 따르는 사람을 남이 욕하고 험담한다면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니 애착에서 미움이 생기고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남이 칭찬하고 따른다면
그 사람을 싫어하게 되니 미움에서 미움이 생기고
자신이 싫어하는 사람을 남이 욕하고 험담한다면
그 사람을 기뻐하게 되니 미움에서 애착을 불러오므로
모든 세상사 자신의 애착과 미움에서 비롯되는 것,

이렇듯 자기 마음속에서 애착과 미움의
흰 소와 검은 소가 하나의 멍에를 쓰고 각자 나아가면
번뇌에 얽매여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자신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없으며
오직 자신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

생각과 생각하는 모양이 차원을 달리하듯
앎과 인식도 그와 같아서
앎이란 도화지이고, 인식은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으니
도화지는 그림이 있든 없든 존재하지만
그림은 도화지가 없으면 생겨날 수 없기에
형상을 지닌 모든 것은 인연의 허상으로 나타났음을 아는 것,
그것이 자신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이리라.

세상에 매달려 탐욕하는 것은 진리에 눈 떠야 하고
애착과 미움의 삿된 견해에서 벗어나려면
고요한 선정으로써 마음의 산만함을 가라앉히고
지혜와 정진으로써 고통의 잡초를 제거하며
밭 갈고 씨 뿌려 결실을 거두는 농부처럼
진정한 기쁨을 누리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20/24

천박한 사람도 훌륭한 인격도
모두가 마음이 만드는 것이니
자신의 허물을 깊이 감추어 거짓으로 꾸미고
원한을 품으며 나쁜 생각을 일으키는 사람은 천박하다.

마음은 인색하고 성질은 사나우며
권세 앞에 아부하고 속이면서 부끄러움조차
모르는 사람을 천한 사람이라 말한다.

자기는 칭찬하며 남들을 헐뜯고
자기 죄를 남에게 덮어씌우며
은혜를 원망으로 갚는 사람은 비천한 사람이다.

가문이 천하거나 훌륭하건 간에
오직 그 사람이 하는 행실에 따라서
천한 사람도 되고 훌륭한 사람도 되는 것이니
피붙이 육친이 있다한들
인생은 혼자 왔다 혼자 가는 것

자신의 행실을 잘 살펴 다스리지 못하면
법답지 못한 소견만 늘어나게 되니
쓰레기에 파리 떼 몰리듯
사악한 사람만 주변에 모이며
다툼과 구설이 끊이지 않는다.

악한 벗과 사귀지 않고
계행을 지키며 인욕을 닦아
자기 육신과 자기 소견에
집착하는 짐을 벗어버리면
법답지 못한 행동을 끊고 애욕의 결박에서 벗어나
홀가분한 해탈의 지극한 즐거움 누리리라.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21/24

삶의 훈훈한 열기가 느껴지고
푸릇푸릇함이 돋아난 세상을 살고 있다면
마음껏 세상을 향유함도 좋은 일이리라.

만일 삶의 각본이 짜여져 있고
우리가 거기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다면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 존재들이다.

어찌 되었건 지금 현재
우리가 맞이하는 일과 사건은
정해진 각본의 틀 속에서 움직이는 것
그러나 우리는 어떤 각본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줄 알지 못한다.

알건 모르건 관계없이 생각으로만 존재하다가
그것이 현실로써 모습을 드러낸다면
마치 계약서에 도장이 찍힌 것과 같아서
업의 힘으로 자신만의 울타리를 넘어선 것이다.

현실로 맞이하는 모든 것들은
업력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기에
행위의 결과는 자신의 몫이 아님을 알지라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면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매번 실패와 좌절을 겪더라도
그것에 대한 상실감이
삶 전체를 흔들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야만 높은 산을 오르듯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기백을 지녔다는 것은
다음 생에도 활기차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또 다시 전개되어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가 과거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라면
비록 손을 훌훌 털고 빈털터리가 된다 해도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운전자가 좌우를 살피듯 성급하게 결단 내리지 말고
이치가 명확할 때 과감하게 도전하라.

맹수는 산 짐승을 사냥해야만 살 수 있고
남을 해롭히지 않는 노루나 사슴들은
사방 천지에 먹이가 깔려있으니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다.

모두가 살아가게끔 질서를 지닌 세상에서
풀 죽은 채로 도전의 의지를 꺾고
주인 앞에 무릎 꿇는 낙타처럼
안일하게 삶을 이어간다면
삶도 그를 하찮게 여길 것이다.
왜냐하면 삶은 도전하는 자의 발판인 까닭이리라.

또한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 지라도
존재 자체가 축복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깨어있음을
본래 면목으로 간직하고 있는 신성한 존재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은 깨어있음,
거기에 있음을 아는 자에겐
한 바탕 신명나게 놀아 제키라고
깔아놓은 멍석이 세상 아니겠는가,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22/24

감기에 걸리기를 원하거나
어리석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것이 본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것만을
희망하게끔 되어있다.

얼굴이 예뻐지거나 키가 크고 싶다는 소망은
그것이 본래적이지 않으므로
잠시 지닐 수 있어도 간절해지지는 못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본래적이 아닌 것은
노력을 통해 달성해야 하는 문제를 지녔지만
본래적인 것은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 아니다.

감기에 걸린 사람이 약을 먹는 것은
조금 일찍 건강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지
약을 안 먹는다고 낳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인 여기서 또 내 마음 찾으면
환 아닌 것이 환법을 이루며
찾지 않으면 환 아닌 것마저도 없으리니
환법이 어찌 이루어지겠느냐고 능엄경에서 말했듯이

우리가 영적인 성장을 추구하면서도
쉽게 이루지 못함은 노력해야 이룰 것이라는
잘못된 편견을 지닌 까닭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으면 범부를 넘어서지 못하니
어떤 수행을 하더라도 깨어있지 못하면 귀신굴에 빠진 것,

생각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깨어있음을 통해
어떤 결실을 원하는 것은 허공에 오물을 던져
허공을 더럽히려는 사람처럼 어리석을 뿐이다.
행위의 결과로부터 벗어난 무위행이 강조되는 것은
깨어있는 자체가 더 없는 축복이기 때문이리라.

깨어있는 축복의 비에 흠뻑 젖는다면
욕망과 분노의 불길이 닿을 수 없음을 알게 되리니
깨어있는 시간이 길어지고 늘 깨어있다면
언제나 고요하고 평화로운 즉, 마음이 쉬리라

깨어있음은 뭇 생명의 근원인 까닭에
쿵쿵거리는 맥박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며
옛 선사들은 외손뼉 박수치기라 하였으니
그것 이외에 행할 바 무엇 있으리요,

남들도 고통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깨어있는 무아의 진리를 전하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자신의 깨어있음도 회복되는 것이다.
스스로를 지켜보는 깨어있음은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본래부터 그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23/24

어찌 된 영문인지
그가 원하는 반대쪽으로만
세상은 늘 전개되었다.

세상과의 어긋남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닌데도
누군가 쫓아다니면서
그의 길을 막고 있다는 생각이 들만치
여지없이 부서져 깨어지고 있었다.

별안간 사업체는 쑥대밭으로 무너졌고
과거생에 스님들께 얼마나 못된 짓을 했는지
가는 절마다 쫓겨나기 일쑤였으며
내 절이라고 만들면 네 놈은 공부나 하라는 건지
홀랑 태워버리고는 산으로 내쫓겼다.

노보살님들은 파란만장한 삶이라며 혀를 끌끌 찼고
아무리 골머리를 썩히면서 버둥거린들
모든 인연을 끊기 위해 목숨 받은 삶,
무슨 요따구 삶이 있느냐고 항변도 해봤지만
거기에서 벗어나기란 불가항력이었고
어쩔 수 없이 인연의 끈들을 던져놓았다.

홀로 광야를 거닐며
세상을 벗어나리라 다짐해도
그 길도 그리 만만치는 않은 길

숟가락 구부리는 초능력은 있나 싶어
죽자고 문질러도 되질 않으니
오도 가도 못하는 덫에 걸린 채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보았다.

재물의 여유가 있으면
삿된 소견만 늘어가는 까닭이런가,
신기하게도 굶지 않을 그 만큼만
몸뚱이가 움직이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남들처럼 이익에 매달리고 권력을 꿈꾸며
안락하게 살다갔으면 좋으련만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알 수 없는 힘의 지배는
어디까지가 그분의 뜻인지를 생각했으나
그런 생각조차도 그분의 뜻임을 알아차리고는
내 뜻이 생겨나지 않도록 생각에 머물지 않기를 힘썼다.

그러면서도 이젠 충분히 지칠 만도 한데
언제까지 계속되는지 눈 여겨 지켜보며
혹시 쓸만한 건 없는지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광야를 홀로 걷는 걸인



♝ 내안에 그분을 노래하는 걸인 24/24

세상에 꺾이고 걷어차이다 보니
시든 꽃처럼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낄 수 없었고
남에게 수행을 권하고 싶지 않을 만큼
이렇게 세상을 벗어나는 길도 있구나 싶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들도 그가 사는 삶이 아닌 것을,

그나마 남은 거라곤 또 태어나면 어찌 하리요,
생사를 벗어나 윤회를 면하는 길밖엔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탐욕을 끊고 갈애를 없애려고
버리고 버리는 법도 또한 갈애의 근본을 돕는 일
허망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 몸을 지은 자에게
긴가민가하며 셀 수 없이 속고 또 속던 걸인,

끝없는 윤회 속을 헤매면서도
원인을 알지 못해 생사의 고통에 얽매였나니
이 얼마나 어리석고 아둔하였는가,

탐욕과 갈애를 근본으로 집을 짓는 자여,
걸인은 비로소 그를 보았노라.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가운데 온갖 꿈이 꾸어지듯
모두가 환법으로 생겨났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거니와

일체의 모든 것이 부정되었기에
그는 걸인을 더 이상 속이지 못했고
드문드문 나타나던 꿈도 사라져 자취 없으니
이제 다시는 무명의 집 짓지 못하리

쓸 데 없이 아는 것만 많이 들어차서
떼어도 떼어낼 수 없는 관념의 넝쿨에 감겨
절벽에 대롱대롱 매달려 살아온 걸인에게는
어떠한 선택도 자신의 몫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아는 것만으로는 쓸모없는 쓰레기와 같아서
붓다는 잠에서 깨어나자 자신이 깨달았음을 알았다는 것은
잠든 채로 깨달음을 얻은 것일 수도 있거늘
어찌하여 그대들은 깬 상태에서만 깨달음을 추구하는가?

등줄기에 소름 돋도록 윤회를 이어가는 원인을
스스로 보아야 하느니 그것을 일컬어 마군을 보는 것이다.
마군을 보게 되면 마군과 싸움의 길로 들어선 것,

이기고 지는 것은 내안에 그분 뜻이니 상관할 바 아니고
누구든 마군을 볼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관념에 매달려 헛되이 낭비하지 않을까 염려될 뿐이라


무비큰스님의 인터넷법당인 다음넷의 염화실에서 무각스님으로 연재되고 있으며
모두가 다함께 성불하는 그날까지 _()()_
작성일:2018-01-31 18:29:35 180.233.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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