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일반 영화 및 TV드라마에서 쓰고 있는 ‘라이트 모티브(Leitmotiv)’기법이라는 것은 배우나 탤런트가 등장함과 동시에 반복되어 나오는 음악·눈물이 나오는 장면에서만 여러 번 흐르는 곡·기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연속적인 소리를 쓰는 것들을 말한다. 바그너가 이룩한 음악의 멋진 혁신이 바로 ‘라이트 모티브’ 창작과 응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등장인물·사건·감정·사상을 필요할 때마다 표현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멜로디다. 그는 장단과 음의 높이에도 매 순간마다 변화를 주며 작곡을 하였고 심지어 15시간이 넘는 오페라도 창작한 음악가였으며 19세기 유럽음악을 지배하였던 황태자였다. 바그너는 1813년에 독일 ‘라이프리치’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70년 인생은 오페라 개혁 및 화성법과의 투쟁이었
가톨릭 신부 겸 프로 바이올린 연주자이며 누구나 아는 유명한 곡인 사계(四界)의 작곡가인 ‘비발디’는 1678년에 이태리의 베네치아에서 바이올리니스트인 아버지에게 칠삭둥이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부친에게 음악을 배웠다. 그는 사춘기에 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십대 중반에 사제가 되었으나 미사를 올리는 의식 중간에도 악상이 떠오르면 성당 내의 아무 방이나 찾아 들어가 작곡을 하였다. 비발디는 음악가로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위대한 예술가였으나, 마음이 굳게 닫히고 겉과 속이 전혀 다른 위선적인 기득권의 성직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으며 그의 타고난 붉은 갈색의 머리털까지도 ‘악마의 머리카락’이라고 신도들에게 험담을 할 정도로 싫어하였다. 유감스럽게도 본 칼럼을 쓰고 있는 소승도 똑같은 입장이다. 필자는 『잡
1977년에 미국은 무인 우주선인 보이저 2호를 우주로 쏘아 올릴 때 “바하”의 ① 무반주 바이올린 〈파르티타〉 제 3번의 가보트와 론도 ②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제 2번의 1악장 ③ 〈평균율 클라비어〉 제 2권의 전주곡 및 푸가의 CD를 함께 실어 우주에 지구의 음악을 선사했다. 이는 우주에 바하의 메시지인 “음악의 원조는 동·서양이 한 뿌리이므로 모든 나라가 공존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과 “선진국들은 불교가 아니라 문명이라는 현실로 눈을 떴지만, 그 결과는 자비와 평등의 실천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자신있게 연구한 ‘음악태동’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음악’에 관한 객관적인 단서는 신석기시대 및 청동기시대 유물의 발견으로 시작된다.대나무로 만든 팬 플루트와 돌 악기 그리고
음악애호가들에게 최고로 유명한 오페라 ‘아이다’, ‘리골레토’, ‘라 트라비아타’, ‘일트로바토레’의 작곡가인 베르디는 당시 오스트리아 점령지인 북부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1813년에 태어났다. 아담한 모텔과 작은 슈퍼를 운영하는 맞벌이 부모님의 영향으로 전국에서 방황하는 무명음악가들을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었으며 그들을 스승으로 삼아 편하게 음악공부를 할 수 있었다. 많은 창작적인 시련을 겪으며 음악의 대가(大家)가 되었으면서도 스타의식이나 유행을 전혀 따라가지 않았으며 이탈리아식 오페라만 작곡하였다. 동갑내기 작곡가인 바그너가 유럽음악을 휩쓸 때에도 흔들리거나 동요하지 않았으며 오로지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창작만 하였던 것이다. 프랑스의 명문 오페라극장에서는 70% 이상을 베르디의 작품만 공연하
순수하며 불운했던 천재 음악가를 주인공으로 만든 영화 은 슈베르트의 인생을 되살려낸 영상예술이다. 아마도 위대한 음악의 대가(大家)들 가운데 생전에 자신에게 합당한 명성을 전혀 얻지 못한 음악가는 슈베르트 외에는 전무후무(前無後無)하였을 것이다. ‘보헤미안의 전설’이자 ‘영원한 청년’인 그는 1797년에 오스트리아 비인에서 태어났으며 가난과 병마의 상징이었다. 또한 그의 작품 상당수가 악보로 출판되거나 공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명(無名)으로 인생을 마감하였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절망의 늪 속에서도 보다 깊은 곳에 있는 음악의 본질을 찾으려고 노력하였으며 늘 음악과 함께 명상을 하였다. ‘베토벤’이 최고도로 가지고 있었던 영웅적 의지가 슈베르트에게는 조금도 없었으며 오히려 자신의 운명을
‘피아노의 시인’인 쇼팽은 낭만주의시대인 1810년에 폴란드인 어머니와 프랑스인 아버지의 사랑으로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만 4세의 나이에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으며 사춘기가 시작되기 바로 전부터 엘스너 선생님에게 전문 작곡수업을 받았다. 10대 후반에 베를린을 노크하여 독일음악의 맛을 보았으며 이어서 빈으로 입국해 피아노 독주회도 열었다. 이때 거장인 슈만으로부터 천재라는 칭찬을 들었으며 이 독주회는 피아니스트와 작곡가로서의 첫 번째 공인 데뷔 무대가 되었다. 바르샤바에 돌아와서 연주활동을 계속하다가 음악가로 크게 성공하겠다는 야망의 꿈을 싣고 다시 빈에 도착하나, 폴란드의 11월 봉기로 인하여 입국이 거절되어 몇 나라를 전전한 끝에 마침내 희망의 파리에 정착하게 되었다. 음악활동 무대를 파리
중후하고 깊이 있으며 다양성을 지닌 음악가로 인생을 마감한 요하네스 브람스는 흔히 고전주의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33년, ‘리스트’와 ‘바그너’의 신낭만주의 음악이 유럽을 휩쓸 때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던 천재음악가 그룹과는 다르게 그의 창작음악 개발속도는 한걸음씩 나아가는 진보성향적인 대작곡가였다. 소년시절의 스승인 ‘마르크스센’은 낭만주의 음악을 싫어하였으며 브람스에게 ‘베토벤’과 ‘바하’음악만 가르쳤다. 20대 초에 만난 스승인 ‘슈만’에 의해 “시대의 정신에 최고의 감정을 표현하는 음악가”로 음악계에 소개되었다. 낭만주의음악 주류시대에 살면서도 고전풍의 음악을 고수하면서 결코 남의 작곡을 모방하지 않았다. 또한 유행하는 스타일의 곡을 창작하면 명예도 올라가고 물질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모차르트가 35세인 1791년에 입적하였을 때 작곡가인 하이든은 “앞으로 한 세기 정도는 이와 같은 천재는 못 볼 것이다.”라는 추모사를 썼다. 모차르트는 오스트리아 궁정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인 아버지에게 약 4세 때부터 피아노를 배웠으며 우리나라로 치면 유치원시절 쯤에 피아노용 미뉴에트를 작곡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성인이 될수록 작곡 및 피아노 연주는 무르익어 갔으며 ‘천상의 선율을 오선지에 척척 옮겨 놓는 음악의 여래사’가 되었다. 오죽하였으면 ‘천상으로부터 온 작곡가’, ‘신의 사자’라는 애칭을 얻었겠는가? 우리가 그를 ‘천상으로부터 온 손님’이라고 느껴준다면 음악의 불성(佛性)에 한층 더 다가서는 것이다. 모차르트는 예술적인 테크닉을 스스로 터득하고 연습하였으며, 악식론에
천재 작곡가 그룹에서 베토벤만큼 시대와 사회분위기에 따라 다양한 인물로 묘사되는 음악가는 없다. 베토벤은 독일의 본에서 1770년에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베토벤의 음악 천재성이 크게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자 궁정악단의 테너 성악가였던 아버지는 사심이 가득차서 순수성을 잃고 제 2의 모차르트를 만들어서 큰 돈벌이를 하겠다고 결심하였다. 욕심이 앞서다보니 아버지는 베토벤에게 혹독하게 음악공부를 시켰다. 그러나 아버지의 무리수로 인하여 베토벤은 어릴 때부터 성격장애가 시작되었고 폭력적인 문제아로 성장하게 되었다. 역시 성인이 되어서도 독선·이기적인 행동·비타협적인 대인관계·왕고집·외롭고 고독한 인생의 대명사로 각인되었다. 오죽했으면 한 달이 멀다하고 가정부를 바꾸었겠는가. 한 술 더 떠서 건망증
부처님을 음성 공양하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찬불가로 하는 염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처님을 찬탄하며 부처님의 안목으로 세상을 보고자 하는 것이다.찬불가는 누구나 불교를 쉽고 바르게 이해하며 보다 친근하게 접할 수 있게 해 주고 자비실천을 행할 수 있게 하는 길잡이다. 즉, 일반 신도가 범어나 한문으로 된 어려운 경전을 읽고 그 참뜻이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그러나 찬불가로 부르면 어려운 뜻이나 교리를 쉽고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3분에서 5분 사이의 곡이므로 짤막한 노랫말을 통하여 마음공부가 되고 불심이 증가된다. 불교는 위대하다! 그러므로 찬불가는 최고 수준의 음악으로 작곡되어야 한다. 멀고먼 옛적에 인도의 마지리제타존자는 많은 수행 끝에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