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전등회 회주 역임출가 2년 만에 견성『금강경』이해 독보적 수준차별 없는 가르침에 헌신“선교(禪敎)에 두루 조예가 깊은 걸출한 선지식”이라는 대한 불교 진흥원 이사장 서돈각 박사의 회고처럼 해안 스님은 선과 교에 통달한 대선사로 알려져 있다. 출가 2년만에 견성의 경지에 올랐지만, 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해 『금강경』에도 통달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평소 일하기를 즐기고 옷도 늘 간편하게 입을 수 있도록 개량하는 등 소박하고 근검한 일생을 보냈지만 ‘절은 전쟁터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처럼 그 자신의 일상은 늘 치열함이 배어 있었다.1901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난 해안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한학을 두루 익혀 뛰어난 조예를 보였다. 붓 장수로부터 전해들은 한학자 고찬(高讚)선생을
1997년 4월14일 입적 한암 스님서 사미계 수지 비구니회 초대 총재 역임 비구니 수행자의 표상 비구니들 사이에서 ‘가지산 호랑이’라 불렸던 비구니 인홍 스님은 사찰 수호와 건립, 도제 양성에 혼신의 힘을 쏟은 비구니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의 피와 살이 부서지는 줄도 모르고 밭을 일구어 집을 마련하고 끼니는 거를지언정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자식들의 교육에는 아낌없이 지원하듯 인홍 스님은 그렇게 비구니들을 위해 한 평생 자신을 희생했다. 1908년 경북 영일군에서 3남 3녀 중 2녀로 태어난 스님은 어릴 적부터 남자 아이들과 어울리며 그 중에서도 항상 대장부 노릇을 했다. 30여년을 속가에서 생활한 스님은 나이 34세가 되던 1941년 9월, 돌연 속세와의
1985년 3월 18일 입적 태주 스님 은사로 출가 15여 년 동안 인욕 수행 비구니 첫 구족계 증명 무위(無爲) 대영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 남다른 인욕, 정진 수행으로 살아있는 보살로 추앙받았던 인물이다. 스님은 경전의 문자에만 매달리는 것을 경계하고 평생을 정진에만 힘쓰며 살아왔다. 특히 동거하는 노스님 세 분의 병을 돌보는 일에는 화 한 번 안 내고 궂은 날씨에도 큰 산과 험한 고개를 넘어 탁발로 10여 년을 시봉하는 인욕의 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영 스님은 1903년 3월 경기도 수원 근교에서 연안 이 씨 부부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목 없는 돌부처의 머리부분을 맞춘 공덕으로 출생한 탓인지 스님은 자라면서 ‘산이 좋고 그립다’며 입버릇처럼 불교에 대한 기이한 인연을 말하곤 했다.
항일 협동조합운동 결성 효봉-동산-한암 법제자 마지막 순간까지 참선수행 조계종 전 사찰 타종 애도 우촌 전진한 선생은 자주독립과 노농대중(勞農大衆)의 복리증진을 위해 70평생을 불태운 정열적 애국지사이자 지극한 불교 수행자였다. 전진한 거사가 일제치하에 신명을 받쳐 추진한 협동조합운동은 일제의 착취에 제동을 걸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발판을 제공했다. 전진한은 1901년 경북 문경에서 가난으로 양식조차 부족했던 극빈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5세가 돼서야 보통학교에 입학한 전진한은 17세 되던 해 청운의 뜻을 품고 서울로 고학의 길을 떠난다. 서울에 도착한 그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사전상화라는 시계도매상에서 일하게 되는데 극심한 민족차별로 반일감정은 켜져만 간다. 그러던 중 20세
1974년 2월 15일 입적 국일암서 대교과 수료 비구니 교육 강조 비구니 선방 개설하기도 성문 스님은 근대한국불교에서 비구니 스님의 위상을 가장 드높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구니 강단조차 없던 시절 대교과를 수료했을 뿐 아니라, 수행에 있어서도 어느 비구 못지않은 뛰어남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조계종과 태고종의 분규로 어수선하던 1955년, 비구니 스님으로서는 처음으로 교구본사인 동화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종무행정에도 탁월함을 보였다. 스님은 1895년 5월 경남 합천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법화장, 모친이 묘법화라는 법명을 지니고 있을 정도로 어려서부터 불심이 돈독한 집안에서 성장한 스님은 자연스럽게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스님은 나이 겨우 열두 살 되던 해 부모를 한꺼번
1977년 2월 4일 별세 향가-고려가요 해석법 제시 사장된 옛 시가 발굴 앞장 동국대 교수로도 활동 양주동 박사는 국문학 연구 분야를 개척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국 고대가요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던 1940년대, 그는 신라 향가를 연구한 『조선고가연구』, 고려가요를 연구한 『여요전주』등의 저서를 발표하면서 한국문학을 올바로 읽고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을 번역과 번안으로 소개하면서 국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나갔기 때문이다. 1903년 개성에서 태어난 양주동 박사는 여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열두 살 때는 어머니마저 여의면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배움에 대한 갈망만큼은 누구보다 뒤지지 않았다. 3·1운동이 일어난 이듬해인
2005년 2월 1일 입적 정인보 학맥 계승 ‘대장경’서 ‘조당집’ 발굴 선종사 법계 문제 규명 구십 평생 학문 길에 무엇을 구했던가?/힘들어 한 숨쉬며 반쯤 간 걸 근심하며/촉도를 바라보니 흰 구름 잠겨 있고/여전히 한강 물은 서쪽으로 흘러가네. 서여 민영규 박사와 오랜 기간 인연을 맺었던 송광사 전 주지 현봉 스님은 박사의 작고를 애도하며 이 같은 시를 남겼다. 서여 민영규 박사는 한국 국학의 태두로, 동양사학자이며 불교학자, 서지학의 권위자로 칭송 받던 인물이었다. 서지학이라는 개념조차 미약하던 국내 학계에 1945년 한국서지학회를 창립했으며, 왜곡된 한국 선종사를 새롭게 정립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수많은 연구성과를 남겼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1965년 해인사 『팔만대장경』가운
1971년 1월 28일 입적 신여성운동 전개 백성욱 박사 인연 발심 비구니총림원 설립 주도 비구니 일엽 스님은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자 선각자로, 출가 후에는 만공 선사의 맥을 이은 선승으로 칭송 받았던 인물이다. 1896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목사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기독교계에서 설립한 구세학교와 삼숭보통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하며 부족함 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1907년 갑작스런 어린 동생의 죽음은 이후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고,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었다. 동생의 죽음으로 비애감에 젖어 있던 것도 잠
1965년 1월 19일 입적 비구에게 입실 첫 비구니 장좌불와-오후불식 실천 출가자 본분사 강조 ‘항상 계행을 스승으로 삼아 만법도생 하는데 조금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한국불교 비구니계 3대 강백 중 한 명인 월광(月光) 금룡(金龍) 스님. 이사(理事)를 겸비한 덕망 높은 스승으로 추앙 받고 있는 금룡 스님은 한 평생 방일을 경계하고 계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후학양성에 전념하는 동시에, 스스로 일상생활에서 출가자의 본분사를 다하는 것으로 모범을 보이며 비구니계를 이끈 입지전적 인물이다. 금룡 스님의 속성은 정씨. 부친 동래 정씨 명원, 모친 안동 장씨 성우 사이에서 1892년 6월 태어났으며, 2남 3녀 중 셋째로 딸로는 맏이이다. 스님은 불교경전을 손수 베껴 쓰는 신심 깊은 불자였
1915년 1월 16일 입적 교학에 뛰어난 학승 31세에 강사로 활동 수행자 계율 강조도 금파 경호 스님은 구한말 한국불교계에서 대강백으로 추앙 받던 인물이다. 스님은 철저한 지계(持戒)를 바탕으로 수행자로서 모범을 보였을 뿐 아니라 벽송사, 대원사, 화엄사, 백양사, 동학사 등 전국의 여러 사찰들을 돌며 수백 명의 후학들에게 불교 교학을 전파했기 때문이다. 1868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성장했다. 마을에서 ‘기동(奇童)’이라 불릴 정도로 그 영특함을 인정받았던 스님은 한번 배운 것은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매사를 평범하게 보고 넘기는 것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스님은 한학(漢學)에 심취해 10대에 대부분의 한서(漢書)를 모두 익혔으며, 동시에 의학
1983년 1월 9일 입적 민족사관서 역사 인식 74년 동국대 총장 취임 불교-건학이념 강조 이선근 박사는 일제시대와 근대기를 거치는 동안 사학자로서 한국근대사를 재정립하는데 앞장 선 인물이다. 일제에 의해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민족사관을 정립시키기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평생을 한국근대사 연구에 매진해 20여권의 저서와 500여 편의 논문을 남겼기 때문이다. 1905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이 박사는 1917년 아버지가 설립한 쌍빈의숙을 나와 휘문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하는 등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15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거리로 나왔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옥고를 당할 위기를 맞기도 했다. 당시 미성년이라
1979년 12월 4일 입적 한글 불교개론서 발간 불교교리 토요강좌 개최 불교사상연구회 창립 “1960∼70년대 황성기 박사는 학자로서 이론 연구에만 매진한 것이 아니라 일반불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불교학을 추구했습니다. 이는 후학들이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동국대 명예교수 목정배 씨의 말처럼 고봉 스님(속명 황성기)은 한국불교의 대중화에 앞장 선 인물이었다. 교계에서는 최초로 일반 불자들을 대상으로 사찰이 아닌 서울 중심부의 한 예식장에서 토요교리 강좌를 개최했을 뿐 아니라 한글로 된 변변한 불교개론서가 없던 시절 『불교학개론』을 발간, 일반인들이 불교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인 1919년 강원도 고성에서 태어난 고봉 스님은 34년 고성 공립보통학교를 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