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 동안 사진을 통해 19세기 말 개화승 이동인부터 2015년 12월의 한상균 사태에 이르기까지 120여년의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영욕(榮辱)을 살펴보았다. 솔직히 영광보다는 부끄럽고 힘든 일들이 많았던 어려운 세월이었다는 것을 이런저런 사진에서 느낄 수 있었다.‘살아남기 위해서’ 일본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사찰 주련 정도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이해해 줄 수 있겠지만 이 땅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든 제1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 박문사(博文寺) 개원법회에 숱한 스님과 고관대작들이 모여들고, “태평양전쟁에서
오래 전부터 종교편향적 언행이 자주 문제가 되었던 이명박(MB) 후보가 2007년 12월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는 순간 이미 ‘심각한 종교 갈등’ 상황이 예상되었다. 2008년 2월25일에 제7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뒤로 다섯 달 동안 특히 불교계와 MB 사이는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보였다.그 사이에 터져 나온 중요한 일만해도 ①국토해양부가 추진한 서울의 대중교통시스템 ‘알고가’에 교회와 성당은 빠뜨리지 않으면서 조계사와 봉은사 등 사찰은 완전 누락하고 ②주대준 청와대 경호처 차장이 “모든 정부부처의 복음화가 나의
오랫동안 경찰의 수배를 받아온 민주노총 위원장 한상균이 2015년 11월16일 서울 종로 조계사로 들어왔다. 일단 조계사로 들어온 뒤로는 경찰이 그를 잡으러 섣불리 진입하지 않았다. 실정법 규정에 앞서 먼 옛날 소도(蘇塗)에 대해 권력이 그러했듯, 종교시설에 대해 암묵적으로 ‘특별한 기능’을 인정해온 관례에 따르는 것이다. 과거 불교계는 내부 진통이 너무 오래 계속된 관계로 독재정권 시절에 이 역할을 거의 수행하지 못했다. 그 배경에는 ‘정권에 밉보이면 종권 안정을 기대할 수 없다’는, 현대불교사가 안겨준 본능적 반응이 있었고, 1
이명박 정권은 출범과 동시에 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등을 대상으로 ‘정비사업’을 강행했다. ‘4대강 정비사업’은 곳곳에서 반대 목소리가 높았지만, 정권은 이런 반대를 애써 무시하며 사업을 강행하려 했고 이에 맞서 환경단체와 종교계에서는 이 사업이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며 원천 봉쇄에 나섰다. 토론회가 열리고, 정부청사 앞에서의 시위는 물론, 공사 현장의 굴삭기 앞에서 드러눕는 물리적 저지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이명박 정권에게는 이 모든 활동이 ‘쓸 데 없는 짓’으로 비쳤고, ‘소의 귀에 경 읽기[牛耳讀經]’에 지나지 않았다.종교
1998년 가을, 제29대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몇 달 전부터 시끄러운 상황이 이어졌다. 10월14일 당시 총무원장 월주 스님을 후보로 내세우는 ‘추대위원회’가 발족되면서 갈등이 깊어지고 일촉즉발의 위기로 치닫고 있었다. 10월27일에는 원장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오던 종정 월하 스님이 “총무원장 3선 부당 … 종도들은 제2의 정화불사라는 마음으로 종단을 바로잡기 바란다”는 교시를 발표하면서 곧 터질 것 같던 화약더미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여주게 되었다.월주 스님 반대 세력은 월주 스님의 입후보가 ‘3선 중임 금지조항에 어긋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0대 종정 혜암 스님에 대해 ‘이 시대의 마지막 간화선 수행자’라는 호평이 있는가하면, 스님이 현대 불교사에서 맡았던 악역(?) 때문에 ‘권승’이라는 악평을 하기도 한다. 이런 상반된 평가는 평가자들의 입장과 스님과의 친소관계에 따라 다를 뿐 어느 쪽 주장이 ‘옳다’ ‘그르다’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스님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스님이 출가초기부터 입적할 때까지 참선수행에 매진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것이다. 성철‧청담‧향곡 스님 등과 봉암사 결사를 통해 수행 분위기를 일신했던 사실도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의 일
전국에 ‘사라진 절터, 폐사지’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대부분 억불정책으로 일관했던 조선시대에 무겁고 고통스런 짐을 짊어지고 그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없었던 이유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절이 무너지고 아예 없어지는 데에는 규모가 크든 작든 관계가 없었다. 지역 신도들과 관계가 좋아 그들의 신뢰를 얻었던 절들은 힘겨운 가운데서도 폐사까지는 이르지 않고 버텨냈다. 그러나 지역과 유리된 채 중앙 권력과 권문세가에만 의존하던 사찰들은 과거의 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둥대다가 어느 때 그랬는지 기록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경우가 많다.신라 말
사진에서 보듯이 2013년 8월21일 오후 구례 화엄사에 “이제 해원의 때가 무르익었으니 천하의 영봉 지리산을 생사의 터로 삼아 동족상잔의 피어린 원한을 풀어 그 본연으로 돌아감이 옳거니 여기 근본 법륜 화엄사 청정도량에 한 사람의 자취를 돌에 새겨 기리도록 함이라”는 내용으로 고(故) 차일혁 경무관(1920∼1958)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새로 세우는 제막식이 열렸다. 9월1일에는 세종문화회관에서 ‘2013 박경랑의 춤 영웅찬가’에서 그를 추모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차일혁(이하 ‘그’로 칭함)은 한국전쟁 당시 남부
“인적 없는 수덕사에 밤은 깊은데 흐느끼는 여승의 외로운 그림자 / 속세에 두고 온 님 잊을 길 없어 법당에 촛불 켜고 홀로 울적에 아~ 아~ 수덕사의 쇠북이 운다. …”1966년 세상에 나온 이 노래 ‘수덕사의 여승’은 숱한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그때까지 대중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송춘희를 ‘10대 가수’ 반열에 올려주었다. 그러나 이 노래의 영향력은 전혀 엉뚱한 이미지를 수덕사에 남겨 불교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여전히 “수덕사는 비구니 스님들만 계신 곳 아닌가요?”하고 묻기도 한다. 아마 우리 국민들 중 수덕사가 비구니 사찰
1992년 4월2일, 대한민국의 중심인 서울 세종로에 자리한 세종문화회관에서 ‘창작국악교성곡 보현행원송’ 공연이 두 차례 열렸다. 사진에서 보듯이 광덕 스님의 ‘보현행원송’ 가사에 곡을 붙이고 지휘를 한 박범훈은 이때 40대 초반의 젊은이였다.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이 공연에는 불광사 합창단을 중심으로 한 500여 명의 대규모 합창단원들이 무대에 올라 멋진 화음을 선사했는데, 공연 마무리 대목에서는 무대 위 합창단과 객석의 관객이 함께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 보현행원으로 보리 이루리~”를 어울려 부르는 감동의 순간이 이어졌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높이 1.68m로, 상원사 동종, 성덕대왕 신종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동종이 있다. 국보 제280호로 지정된 이 종은 본래 충남 천안시 성거산 천흥사에 있던 것으로, 종의 몸통에 ‘성거산천흥사종명통화28년경술2월일(聖居山天興寺鐘銘統和二十八年庚戌二月日)’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고려 현종이 즉위한 1010년에 주조된 사실을 확인해준다.‘성거산’과 ‘천흥사’.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다. 전설에 따르면 성거산은 고려 태조 왕건이 삼국통일 과업 마무리로 동분서주할 때 이 산을 보고 “성스러운 신령이 있다”며 제사
조선 중기 풍기군수 주세붕이 세운 경북 영주의 소수서원은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전국의 서원을 철폐할 때도 살아남은 사액(賜額)서원이다. 일찍이 사적 제55호로 지정되었고 금년(2019)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인데, 이곳에는 보물 제59호로 지정된 당간지주와 함께 석등 좌대 등이 남아 있어 ‘본래 사찰이 있던 자리에, 아니면 사찰을 강제로 빼앗아 서원을 세웠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보물로 지정할 때의 명칭도 ‘숙수사지당간지주’로 분명히 하고 있어 이 서원 자리에 숙수사가 있었음을 확인해준다.지난 2012년에는 서울 도봉산 입구
유홍준의 ‘나의문화유산답사기’가 출간된 뒤로, ‘내포문화’라는 말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백제의 미소’로 알려진 보원사 입구 바위에 새겨진 세 분 불보살님인 ‘서산마애삼존불’과 함께 보원사의 여러 성보 문화재가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게 됐다.또한 많은 답사객이 찾아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사를 연발한다. 십수년 전부터는 보원사터에 대한 발굴조사가 본격 진행되면서 통일신라시대 이른바 ‘화엄십찰’ 중 한 곳이었으며 고려 초 왕실과 연계돼 중요한 역할을 하며 웅장했던 이 절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이제는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불국사와 석굴암은 우리 국민이 ‘가장 가보고 싶은 곳’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곳이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후에는 전보다 더 많은 외국인 관광객이 찾아와 감탄사를 이어가는 곳이기도 하다.우리나라의 많은 사찰들이 비슷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지만, 특히 불국사는 창건 이래 1000년 세월을 거치며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런데 일부 전문가를 빼고는 불국사의 현재 가람 배치와 전각‧불탑 등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에 김대성이 창건할 당시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불과 100여년 전 불국사의 모습
고등학생 시절 3년 동안 역사와 철학을 가르쳐 주고, 졸업하고 10년이 훨씬 지난 뒤 대학원에 다닐 때에는 오로지 나 하나만을 위해 집까지 오셔서 ‘사기’와 ‘논어’ 등 중국 고전 강독을 하며 한문의 문리를 틔워주신 선생님이 계셨다. 고등학교 2~3학년이던 1972년과 1973년에 그 선생님이 “서울에 가서 좋은 강의를 듣고 왔다”는 말씀을 하시며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불편한 몸으로 버스를 몇 차례 갈아타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주에서 서울로 선생님을 유혹(?)했던 그 강의가 누가 하는 어떤 내용이었
‘10‧27법난’에 휩싸여 전국의 사찰이 몇 달 동안 강제적으로 침묵에 잠겼고, 스님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던 1981년 초, 대한불교조계종이 오랜만에 기지개를 펴고 불자들이 환하게 웃는 날이 왔다. 1970년대 내내 지속된 ‘종정과 총무원장의 갈등’ ‘종정과 총무원장 자리를 둘러싼 다툼’과 여러 승가세력들의 이합집산이 잠잠해지고, 새 종정과 총무원장을 선출하여 1981년 1월20일에 취임식을 갖게 된 것이다.이날 불교인뿐 아니라 세상의 수많은 눈이 조계사로 쏠렸다. 무엇보다도 ‘가야산의 호랑이’로 불리며 오랜 장좌불와와 동구
2003년 12월4일 조계종 종정을 지낸 영축총림 통도사 방장 월하 스님이 법랍 71세로 열반에 들었다. 월하 스님은 선사였지만, 한국불교 현대사의 중요한 순간마다 종단에 불어오는 바람, 때로는 태풍을 피하지 않고 그 중심에서 맞서 버텨낸 인물이었다. 월하 스님의 입적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사람들이 “월주 스님이 과연 조문을 갈까?” “조문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할까?” 등등 월주 스님의 반응과 행보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월주 스님은 소식을 듣자 곧바로 통도사로 달려가 월하 스님과의 인연을 말하며 고인에게 예를 다한 것으로 알려
“김영삼 대통령은 오늘 부인 손명순 여사와 함께 국방부 안에 있는 국군중앙교회의 주일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김대통령과 손여사는 1시간 동안 진행된 예배순서에 따라 찬송가를 부르고 성경 구절을 봉독한 뒤 군인신도와 가족 300여명과 함께 애국가를 불렀습니다. 김대통령은 이어 국군중앙교회 정재석 목사 등과 다과를 함께 한 자리에서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고생하는 군장병을 위해 열심히 기도해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국군 통수권자인 대통령이 군인교회를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1996년 1월21일 저녁 9시 문화방송의 ‘뉴스데스크’에
“옛 절은 30여 칸에 지나지 않았는데, 북한산성을 축성한 뒤 중건하여 136칸이 되었다.” “총섭의 승영을 두었던 149칸의 사찰이었다.” ‘북한지’와 ‘동국여지비고’에 기록된 북한산성 내 중흥사에 관한 기록이다. 두 기록에 차이가 있지만, 당시 서울 근교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찰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고려 태조가 창건하고 고려 말 태고 보우 스님이 주지로 주석했다고 하지만, 중흥사의 정확한 창건 연대는 확인하기 어렵다. 발굴조사 결과 고려시대 어느 때인가에 세워져 조선 중기까지 중요한 역할을 해오다가, 숙종 때 북한산성을 쌓은
지난 2018년 4월 문재인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10‧27법난’에 대해 공식 사과하였다. “한국불교는 군부독재 시절 국가권력에 의해 종교의 성역을 침탈당하는 가슴 아픈 일을 겪었다. 38년 전 신군부가 전국의 사찰을 짓밟고 무고한 스님들을 연행했던 10.27법난이 그것이다. 불교계에 여전히 남아있는 깊은 상처에 대해 이 자리를 빌려 심심한 유감의 뜻을 전한다. 불교계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어, 한국불교가 더욱 화합하고 융성하길 기원한다.”정부 차원으로는 1988년 12월30일 당시 국무총리(강영훈)가 “불교계 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