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학은 한국의 학문지도에서 비교적 변방에 놓여있다.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의 새로운 이론들이 종종 미디어에 노출되며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과 달리, 불교학의 경우 대중적 확산 측면에서 분명한 한계를 노정해왔다. 때문에 한국불교학계 일각에서는 대중화를 주창하며 시대와의 소통을 모색하려는 시도를 이어오고 있다. 불자 수 감소에 따른 위기의식이 다소나마 반영된 이러한 시도들은 불교교리를 힐링 등 시대적 요구와 접목시키며 적지 않은 호응을 얻기도 했다.2007년 인문한국사업에 선정돼문헌학·사본학·언어학에 천착지론종 연구, 세계 최고 수준하
6세기 중국 지자대사가 완성한 천태교학이 11세기 의천대사에 의해 고려로 전해짐으로써 한국불교 역사상 최초의 천태종 개창 역사가 이룩됐다. 호국불교의 기치를 드높이며 민중 속으로 파고든 천태종은 곧 절정기를 구가했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 국가적인 불교탄압에 그 맥이 단절되다시피 했다. 그러던 천태종이 다시 중흥하게 된 것은 20세기 중반 상월 스님이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의 새불교운동을 전개하면서부터다. 총본산인 구인사 등에서 많은 대중들이 새불교운동에 동참했고, 중창된 지 70여년 만에 한국불교 제2종단으로 도약할 수 있
2006년 9월9일, 서울 동국대 다향관 세미나실에서 밝은사람들연구소의 첫 번째 학술연찬회가 열렸다. 주제는 ‘불교와 학습이론, 그리고 불교 상담’. 밝은사람들연구소는 그해 2월1일, 기존 불교학회들과는 차별화된 지향을 공표하며 창립됐다. 불교와 세상의 상생을 모토로, 학자나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공감할 수 있는 주제를 선정해 불교와 인문학의 통섭을 통하여 풀어내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박찬욱 소장은 연구소 주최 학술연찬회가 처음이었던 만큼, 많은 인원이 참석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메일로 학술연찬회 개최 사실을 알
언제부턴가 시작된 ‘커피 한잔’의 열풍은 사람들의 일상을 급격히 변화시키며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매김했다. 커피가 담긴 일회용 종이컵을 들고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 혹은 커피전문점에 앉아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업무를 보는 모습은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이러한 커피 열풍은 불교계도 예외는 아니어서, 적지 않은 스님들이 커피를 즐기고 있고 일부 사찰은 스님이 직접 원두를 갈아 만든 커피를 판매하는 매장을 운영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찰에까지 깊숙하게 스며든 커피가 깨달음으로의 여정에서 어떤 의미와 역할을 지니
2004년 6월5일 오전 10시, 고성 건봉사 내 보물 제1336호 능파교의 홍예(무지개 모양 문)가 보수공사 도중 무너져 내렸다. 안전보호시설을 하지 않은 채 석면을 쌓아올리다 하중이 반대편인 북쪽으로 쏠렸던 게 원인이었다. 국가지정문화재가 부실공사로 허물어진 것을 두고 비판이 쏟아지는 가운데, 불교계에서는 자성론이 대두됐다. 능파교 붕괴의 의미가 단순히 그 자체에만 머무르는 게 아닌, 문화재 이전에 성보로서의 인식과 관리 부족을 여실히 대변하고 있다는 참회의 목소리였다.조계종 불교문화유산 전문기관2002년 ‘사찰문화재 일제조사’
통계청이 지난해 12월19일 발표한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집계’는 불자 수가 10년 만에 300여만명 감소했다는 충격적인 결과를 통해 한국불교의 현실을 여실히 드러냈다. 개신교 967만명에 이어 761만명으로 종교인구 조사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2위로 내려앉았다는 사실은 불교계에 적지 않은 위기의식을 안겨주었다. 조사결과에 대한 신뢰도 논란과는 별개로, 불교의 존립마저 위태로워지지 않겠느냐는 우려와 함께 자성과 대응방안 모색이 시급하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어려운 교리로 인해 다가기 어렵고’ ‘타종교에 비해
역사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으로서 사회문제를 진단하고 처방하는 데 기준이 되어준다. 사회구조의 두께가 나날이 증폭되고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인간의 행위는 반복되기 때문이다. 개별적 행위들이 상호작용하며 비롯된 사회적 양상들은 해당 시기의 구조적 틀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때로는 원인을 짚어내기 힘들 만큼 복잡하게 발현되곤 한다. 따라서 역사는 현시대를 명징하게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할 뿐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하는 데에도 핵심 역할을 한다. ‘역사를 아는 자는 무너지는 담장 아래 서지 않는다’는 ‘정관정요(貞觀政要
현재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명상이 가지는 의미는 각별하다. 본말이 전도된 물질만능주의 세태 속에서 많은 이들은 이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으로 명상을 찾는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불교 고유의 수행법이라는 인식을 넘어 대중에 급속도로 전파되면서 사회적 현상으로까지 자리 잡았다. 시대적 상황이 낳았던 명상 붐은, 이제 자신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확장시키는 단계에 이르렀고 종교를 대체하게 될 거라는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명상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불교계의 관련 움직임은 소극적이라는 지적이다. 문헌을 중심으
세계적인 입지를 가지고 있는 일본 불교학계의 연구 수준은, 역설적이게도 1868년 메이지정부의 폐불훼석(廢佛毁釋)에 기원을 둔다. ‘천황교’로 일컬어지는 ‘국가신도’를 국교로 삼고자 불교를 탄압했던 이 사건으로 일본불교는 생존을 모색하며 교단개혁에 이은 근대불교학 확립의 씨앗을 뿌렸다. 그 결과 오늘날까지 미국, 유럽, 중국 등의 학자들이 ‘불교를 연구하고자’ 일본 유학을 단행하고 있으며 많은 한국 학자들 또한 도쿄대학, 고마자와대학, 붓쿄대학, 하나조노대학 등에서 학문 초석을 다져왔다.일본불교사연구소 활동 계승해학문 교류·학자 양
시대를 휩쓴 근대화의 부산물들이 온 국민의 정신을 급속하게 개조하고 있던 1974년 4월. 서울 중구 묵정동 한국학생회관 자그마한 사무실에서 한국불교연구원이 첫 발을 내딛었다. 당시 창립을 주도했던 불연 이기영(1922~1996) 박사의 문제의식은 창립 취지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급격한 전통 가치관의 몰락,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혼돈, 깊은 불신으로 말미암은 인간성 상실 등의 어둠을 밝히는 예지의 빛은 불교’임을 천명하는 동시에 ‘관념의 유희로서가 아니라 이 시대에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산실로서 연구하고 실천하는 도량이 되겠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에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어색한 일이 아니다. 1962년 3월5일 국내 최초의 인문분야 대학부설 연구기관으로 문을 연 뒤, 같은 해 10월15일 교계 최초의 불교학 전문 학술지인 ‘불교학보’를 펴냈다. 종립대인 동국대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물론 불교와 역사, 문화, 철학 등을 아우르는 연구를 통해 궁극적으로 한국사회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후 1976년 ‘한국불교찬술문헌총록’ 발행, 1985년 ‘제1회 한일 불교학술회의’ 개최, 1989년 ‘한국불교전서’ 10책 발간, 1999년 ‘한국불교사
자력을 내세우는 한국불교에서 정토는 하근기 수행법으로 치부되며 긴 세월 동안 홀대받아왔다. 민간에서 아미타불신앙의 정토불교가 이어져왔지만 출가자 중심의 한국불교 주류 흐름은 교종·선종 사상의 변화에 따라 움직여왔기 때문이다. 불보살의 가피를 외면하는 풍토는 대중들이 깨달음을 어렵게 느끼는 요인으로 작용했고, 결국 현대에 이르러 불자 수가 감소하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정토학회가 ‘불교교학의 이론적 토대 위에서 정토 실현의 현실적 실천방도 모색’을 기치로 돛을 올렸던 것은 한국불교사에서 의미 있는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