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 그 자체를 들으며, 보는 그 자체를 되본다.(聞復聞 見復見)’ 능엄경 교육의 그 세 가지란 무엇인가. 가정교육, 학교교육, 사회교육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의 교육은 솥의 삼발[三足]처럼 정비례해야 된다. 학교교육, 그 이상으로 가정교육은 필요한 것이다. 가정교육 못지않게 또한 사회교육도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구의 문명을 흡수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학교교육만을 교육으로 착각, 가정은 학교교육을 위한 뒷바라지의 역할로 격하돼 버렸다. 교육의 울타리 밖으로 가정은 밀려나 버렸다. 그 결과란 무엇인가. 가정교육의 공허지대에 나타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대들의 현격한 범죄 증가와 잔인한 사회악뿐이다. 출세주의, 치맛바람이 이 사회를 휩쓸고 있다. 지
‘80년 전에는 그대가 나였더니(八十年前渠是我)/ 80년 후 오늘에는 내가 그대구나(八十年後我是渠)’ 청허집 여기에서 ‘그대’는 참의 자리를 가리고 있는 거짓의 자기[假我], ‘나’는 그 거짓의 자리로부터 떠난 참의 자기[眞我]로서의 자기의 본래 모습을 말한다. 우리의 비극은 ‘참나’의 본질에 있어서는 같지만 이 육체를 가진 육체적 인간으로서의 개개인은 변질되어 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참나’의 본질에서 각기 다른 우리 개개인이 동질의 것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어서 그 죽음의 적정(寂靜)으로부터 이 역동적인 삶으로 되돌아온 수행자들은 모두 기계적으로 동일하지 않다. 참나를 찾은 그들에게는 각기 그들 나름의 개성도
‘하루 일하지 않으면 그날 하루는 굶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 전등록 권9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불행한 것은 노동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기계 문명은 인간을 편하게 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안락이란 바로 퇴폐로 가는 기점이 된다. 인간의 몸이 편하면 편할수록 노동이 기계로 바뀌어지면 바뀔수록 인간에게 남는 것은 쾌락주의와 허무주의뿐이다. ‘선(禪)’하면 흔히 생각하기 쉽다. 노동과는 아주 멀고도 먼 세계처럼, 아닌 게 아니라 선원의 정좌(正坐), 침묵의 부동자세는 육신의 움직임을 최대한 축소시키는, 노동의 말살 작업 같이 보인다. 그러나 선만큼 노동과 관련이 깊었던 것도 없는 것 같다. 정신의 극치에 가면 그 형언할 수 없는 에너지의 집중력은 그대로 일상의 움직임이 되어 터져 나온다. 여기에
‘저 화가가 빈종이 위에 갖가지 그림을 그리듯, 마음은 이 모든 것을 만들어낸다.’ 화엄경 이 세상에는 수많은 불빛이 있다. 옛 사람들은 반딧불을 이용해 책을 읽었다 한다. 그러나 등잔불이 등장하자 반딧불은 죽어버렸다. 등잔불을 알게 된 사람이라면 이제 반딧불에 책을 읽을 수는 없다. 반딧불의 몇 만배 밝은 등잔불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촛불이다. 촛불 앞에서 등잔불은 패잔병이다. 그 사람은 이번에는 등잔불을 버리고 촛불 앞에 간다. 촛불의 밝음은 등잔불의 갑갑함을 태워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 전깃불이 나타났다. 촛불의 그것은 전깃불 앞에 가면 약소국가인 것이다. 슬픈 운명의 멍에를 짊어지고 제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전깃불의 저 불빛권을 벗어날
“이 모든 상황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만 있다면 내가 하는 이 모든 일은 본질로 통한다(隨處作主 立處皆眞).” 임제록 선(禪)이 인간의 근원 탐구라면 그것은 당연히 나의 근원, 그 파동으로서의 이 현실 사회와의 불가분의 관계이어야 한다. 아니 사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이어야 한다. 이러지 못할 때의 선, 사회생활과 연결을 갖지 못한 선은, 그것은 이미 선이 아니며 설사 선 이상의 그 어떤 것이라 해도 우리 인간사회에는 일고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선의 대사회적 연결은 구체적으로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는가. 정치·경제·문화 등 일체의 인간생활이 올바른 생각과 올바른 마음가짐에서 이탈되지 않을 때 인간생활은 그대로 선, 그것의 현실화인 것이다. 어떤 현실생활도 그 근저에 올바른 생각[
“외로 가는 길손이여 그림자만 따르나니/ 짐 벗은 이들 모두 같이 이 길에서 노닌다.(常獨行 常獨步 達者同遊涅槃路)” 증도가 선(禪)에서의 자기의 참된 성품은 ‘무성(無性)’, 즉 자기 아닌 자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무일물’이 자기이다. 그것은 자기라는 한계로부터 그 한계를 초월한 자기이다. 이 ‘무성’으로서의 자기는 자기부정의 극치에서 만나는 자기이다. 이 참된 자기에게 있어서는 일체의 타자가 곧 자기화 된다. 산하대지가 모두 남김없이 자기화 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여기에 오면 저 허공의 구름도, 달도, 별도 이 모두가 자기일 뿐이다. 유한상대의 자기의식, 남과 나의 대립 의식은 부서지고 대신 무한절대의 ‘참된 자기’가 나타난다. 이는 선 경험의 기본이다. 따라서 자기의식과 대립의식이
“제가 드리는 이 물이 문득/ 감로의 차로 변하여지이다/ 당신에게 드리는 이 마음이오니/ 어린 중생의 바람을 받으소서.” 헌향게 물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인 니르바나의 경지를 뜻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진리란 ‘다르마(Dharma)’인데, 이를 중국에서는 ‘법(法)’이라 번역했다. 그런데 ‘법’이라는 이 글자를 두 개로 쪼개면 ‘물’이라는 뜻(氵→水)과 ‘간다(去)’는 뜻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진리로서의 ‘법’이란 ‘물이 흘러가는 이치’인 것이다. 불교 후기에 발달한 밀교의 신비주의자들은 부처님의 본질(대일여래)을 물 그 자체로 보았다. 인도의 경우, 물이란 생명의 원천이며 신의 젖줄이었다. 인도의 성스러운 두 강 갠지스와 야무나는 바로 이 히말라야신의 발밑에서 흘러나오는 물이라고 그들은
“내가 사르는 이 한 가지 향이/ 온 누리에 퍼져나가 향연기의 구름이 되길/ 부처님 전에 이 구름 보내오니/ 중생의 어린 이 마음을 받으소서./ 이 한 몸 수천의 몸이 되고/ 그 수천의 몸 하나하나는 다시 또 수천의 몸이 되어/ 그 몸마다 그 몸마다 향불을 사르나이다/ 온누리 계신 부처님 전에 향불을 사르나이다.” 헌향게 향은 자신을 태움으로써 남에게 향기를 준다. 그러므로 향 그 자신으로 본다면 이건 완전한 희생이다. 그러나 이 희생을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즐거움을 얻는다. 그러므로 이는 영혼의 심지에 진리의 불을 붙인 구도자들이 취해야 할 삶의 자세라 할 수 있다. ‘자기보다는 남을 위하여’를 외친 대승불교 정신의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잠깐! 자기보다는 남을 위해 주기
“벗이여, 캄캄한 밤에 등불을 켜면 그 방 속에 쌓여 있던 백 년 동안의 어둠은 일시에 사라진다. 이처럼 벗이여, 그대 마음에 진리의 불을 켜라. 거기 까마득한 날에 쌓였던 영혼의 어둠은 모두 사라지리라.” 화엄경 불에는 미래의 열정과 언어의 재능이 잠재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불에는 독(毒), 악령(惡靈), 사기(邪氣) 등을 제거하는 힘이 있다고 한다. 동시에 불은 생명을 양육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문명사적으로 볼 때도 이 불의 발견은 인간생활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불은 오랜 옛적부터 종교의식에서 가장 중요시되어 왔다. 불교 역시 불에 대한 관심이 대단했다. 특히 부처님의 탄신일에는 많은 등불을 밝히는 것으로 그 축하를 대신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부
“진정한 수행자는 점을 치거나 꿈을 해몽하지 않는다./ 사주나 관상을 보거나 남의 운명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하지도 않는다.” 숫타니파타 관상이 결국 심상(心相)만 못하다는 옛 어른들의 말이 있다. 허우대가 그럴 듯하게 생겨 제 아무리 관상이나 사주팔자가 좋다 하더라도 마음 쓰는 것을 고치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의 마음(생각)은 1찰나(75분의 1초)에 900번 움직이고 있다. 마음은 이런 식으로 1초마다 6만7500번이나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이 마음을 쓰기에 따라 운명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능동적으로 살지 않고 그냥 취생몽사, 되는대로 살려고 한다면 결국은 사주관상쟁이들의 말이 맞아떨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종교를 찾는 것은, 진리
“이 유등(油燈)을 켜는 순간/ 이 세상 어딘가에서/ 한 생명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태어나는 생명과/ 죽어가는 생명들/ 그리고 억울하게 가신/ 영혼들을 위해서// 아직도 제 갈 길을 가지 못하고 헤매는/ 이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위해서// 이 유등을 켜면서/ 마음의 기도를 드립니다.” 자작시 ‘유등기원문’ 지난 3월11일 일본 동북부 미야기현 앞바다에서 강도 9.0의 지진이 발생했다. 이 지진은 기상관측 이래 네 번째로 강한 지진인데 그 뒤를 이어 높이 20미터가 넘는 쓰나미(해일)가 밀려와 주변의 도시와 마을들을 삽시간에 삼켜버렸다. 이로 인하여 수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또 수만 명이 행방불명됐고 몇 십만 명이 삶의 터전을 잃고 하루아침에 이재민이 됐다.
“당신(관세음보살)의 거울에 비치는 제자의 몸으로/ 제자의 거울에 비치는 관세음보살님께 절 하나이다/ 이 고뇌의 소리를 들으시고/ 자비로써 이 중생을 인도하소서.” 의상대사의 백화도량발원문 의상 스님의 이 기도문은 즉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마음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며, 관세음보살이 관세음보살의 마음거울에 비치는 관세음보살에게 절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의 거울에 비치는 자기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며 자기 자신의 거울에 비치는 관세음보살에게 절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이 내가 되어 내게 절하고, 내가 관세음보살이 되어 관음보살에게 절하는 것이다. 절하는 자가 절 받는 자이며 절 받는 자가 절하는 자이다. 내가 관세음의 거울에 나타나고 관세음이 내 거울에 나타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