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르지 말고 그 마음을 내어라 『금강경』중생의 지극히 힘들고 괴로운 모든 업보를 내가 대신 받으리 『화엄경』 「보원행원품」 몇 일전 서강대에서 ‘즐거운 혁명과 주체형성’이라는 주제로 심포지엄이 있었다. 마침 ‘즐거운 과학기술의 달콤한 유혹’이라는 역설적 제목으로 발표에 나선 필자에게 청중으로부터 질문이 있었다. 사는 것이 즐겁냐는 것과 이어서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 수 있느냐다. 물론 사는 것은 즐겁다. 굳이 즐겁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묻는 젊은이에게 세 가지를 들었다. 먼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하여 고민할 것. 그 앎과 삶을 일치시킬 것.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될지 생각 말고 매 순간의 과정에 몰입할 것. 내게 있어서 금강경 구절은 세 번째의 구체적 방법을 말해주고,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 (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모든 악을 짓지 말고 온갖 선을 받들어 행하라. 스스로 그 뜻을 깨끗이 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니라. -『출요경』·『법화경』- 칠불통게(七佛通偈) 또는 칠불통계(七佛通戒)라고도 일컫는 과거칠불(過去七佛)의 공통된 가르침으로 알려진 게송입니다. 명심보감 계선편에도 ‘자왈 위선자 천보지이복 위불선자 천보지이화(子曰 爲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라고 했듯이 선을 행하고 악을 멀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요, 도리입니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만 팔십 노인도 행하긴 어렵습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고 하여 수행정진을 통하여 깨달음, 또는 깨침의 단계에 이르려 합니다. 불자들은 궁극적 목표를 삼매, 해
다른 데서 그를 찾지 말라/오히려 그는 너를 떠나리라/이제 나 혼자 스스로 가니/어디에서나 그를 만나리/그는 바로 나지만/나는 바로 그가 아니다/이것을 깨달아야/본래의 얼굴과 하나가 된다. -동산 양개 스님 게송-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는 조동종의 개조로서 운암담성(雲巖曇晟, 782~841)의 법제자이다. 동산은 운암을 만나자마자 “생명없는 물건이 설법을 할 때는 누가 들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운암은 “그야 생명없는 물건이 들을 수 있지”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아미타경』에서 물과 새와 나무, 모두가 불법을 외운다는 구절을 읽지도 못했는가?”라고 물었다. 이를 듣고 문득 깨친 동산은 다음과 같은 시로 표현했다.“신기하고 신기하다!/불가사의한 무정물의 설법이여/귀로 들으려
삼계의 모든 현상은 단지 마음에서 일어난다.(三界所有 惟是一心) -화
욕구를 버리라는 말이 욕구를 없애라는 말은 아니다. 욕구의 방향을 고치라는 말이다. -법구경- 어릴 적, 스님 같은 선생님을 존경했다. 그 선생님은 학생들과 오래도록 토론하고 기도하곤 하시던 분이었다. 당시 나는 그 분을 통해 불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별히 불교적 사유방식을 고집하고 있지도 않았다. 헌데 선생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내 마음이 자연스럽게 불교적인 사고와 분위기에 스며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 무렵에는 입시를 앞두고 대학에 대한 불안감과 나 스스로도 간파할 수 없을 만큼의 끝없는 욕망에 많은 방황을 했다. 우주가 늘 흔들렸고 그 흔들린 우주를 잡으려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가을 날,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흰 구름, 그것들을 바라보다
겉모양으로 부처를 찾거나 목소리로써 부처를 구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지라 끝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 『금강경』- 내 주변을 둘러보면 불자보다 기독교인이 더 많다. 거의 교회로 다 나가나 싶을 정도다. 그만큼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전반적인 곳, 요소요소에서 열심히 맹목적인 전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그들의 저돌적인 신앙심에 찬사를 보낼 때도 있다. 요즘 내가 참여하는 단체도 거의 기독교인들의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밥을 먹거나 일상생활을 할 때도 항상 기도하고 찬양하고 그것이 생활의 자체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것이 때로는 무섭기도 하다. 물론 내가 그렇게 저돌적이고 전투적인 종교생활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모두들 마음에 견고한 갑옷으로 무장
“무릇 세간의 작용이 발생하는 것은 모두 아집에서 생긴다. 자아에의 집착을 제거하면 세간의 작용은 일어나지 않는다.”-『화엄경』 제 22장 「십지품(十地品)」- 경전엔 많은 좋은 말씀들이 있지만 시인으로서의 나는 이 중에서도 『화엄경』에 있는 위의 경귀를 항상 마음에 새기고 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이야 말로 시창작의 본질을 설파해주는 촌철의 비의(秘意)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내게 있어서는 그렇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시란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출하는 것이라 믿는다. 실제 그런 태도로 시를 쓰는 시인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는 옳은 생각일까. 시는 그것이 무엇이든 일차적으로 어떤 진실에 대한 이야기이어야 할 터인데 ‘생각을 품고 있는’ 주체 자체가 과연 진실한
살아있을 때는 삶 그 자체가 되어 살아가야 한다. 죽을 때는 죽음, 그 자체가 되어 죽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 어떤 두려움이나 불안한 마음도 없게 된다. -벽암록- 무더운 여름입니다. 오늘도 흐르는 땀과 함께 흙을 붙이다 제가 불모로서 지낸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들을 돌이켜 봅니다. 몇 해 전 불모라는 길이 이렇게 어렵나 하는 것을 한참 몸으로 알아가고 있던 때 저를 아끼는 많은 이들의 격려와 응원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구속은 저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나게 힘들게 했습니다. 어떤 때는 작업장으로 가다가 본 집 앞 택시회사의 ‘기사모집’이라는 현수막이 제 마음을 많이 흔들기도 했습니다. 그 때 우연히 책을 통해 만나게 된 『벽암록』의 ‘살
처음 마음을 발할 때가 곧 정각(正覺)을 이룬 때이다.(初發心是變正覺) -법성게- 내가 법성게(法性偈)를 만난 것은 1974년 여름 불국사에서였다. 불국사하면 신라시대 고찰인 관광사찰로만 연상하였었는데,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주최 하계 연수에서 본 불국사는 나에게는 경외감으로 다가왔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불국사 경내로 들어가 참선, 염불 그리고 설법을 듣고 있노라면 한낮의 번잡한 불국사가 참선도량으로 새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특히 그 때 지도법사님이신 동국대학교 이기영 교수님의 사자후는 지금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법성게가 특히 내 마음에 와 닿는 이유가 있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내가 가진 근기가 짧아서인지, 색이 공인 듯하면서도 역시 색으로 돌아서버리는 안개 같
하나의 티끌 속에 온 세상이 들어 있고, 모든 티끌이 모두 그러하다.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법성게- 1997년, 펜화를 시작한지 4년 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영주 부석사에서 무량수전과 안양루를 스케치북에 담았습니다. 요즈음에는 4절 크기의 펜화 한 장 그리는데 보름정도 걸립니다만 당시에는 하루에 두어 장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펜 선이 성글고 그림도 엉성할 때였습니다. 시간이 남기에 유물전시관을 들러서 대웅전 천정 닫집에 있던 목조용도 그렸습니다. 참 잘 만든 용이었습니다. 그림을 끝내고 돌아 나오는데 전시관 벽에 붙여 놓은 의상대사 법성게 중 두 구절이 번개처럼 머리를 때렸습니다.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
“드넓은 바닷물이라도 쉬지 않고 퍼낸다면 언젠가는 그 밑바닥을 보게 될 것이다. 하물며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구도의 길을 간다면 무슨 구함인들 얻지 못하며, 무슨 소원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대아미타경』 中 어느덧 스무 살을 채워 이제 정말 어른이 되는 길의 출발점에 섰다고 느끼던 즈음에, 저는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것도 스무 살의 대학생으로선 아주 드물게 새로운 찬불가를 부르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들어설 때는 미처 몰랐지만, 제가 선택한 이 길은, 세상 모든 길이 그렇듯 평탄하기만 한 길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그 당시의 저에게는 어쩌면 피하고 싶을 만큼 고난의 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걸음부터 많은 벽에 부딪혀야 했으니까요. 2006년에 ‘패랭이꽃과 나
“수행승들이여,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말한다. 방일하지 말고 정진하라. 모든 형성된 것은 무상한 것이다. 이것이 여래의 마지막 유훈이다.” -쌍윳따니까야 (전재성역) 잠자리 침대 맡에 책이 여러 권 놓여 있다.논어(論語), 파우스트, 맛지마니까야1권, 쌍윳따니까야 4권.어떤 사람들은 잠이 안 올 때 수면제를 먹기도 하는데, 나는 위에 열거한 책들이 수면제를 대신한다. 그 중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이 쌍윳따니까야다. 왜냐하면 서양에서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세다가 잠이 드는 것처럼 쌍윳따니까야에서는 똑같은 말을 전하기 위해서 토시하나 틀리지 않는 말을 화자(話者)만 바꾸어 서술하거나, 거의 같은 형식의 문장 속에서 교리적 단어만 바꾸어 서술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