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청량 징관 국사가 지은 『화엄경 청량소초』를 완역하겠다는 발원으로 하루 20시간이 넘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번역 작업에 매진하고 있는 수진 스님. 스님은 “이 일을 끝마치는 것이 부처님과 스승의 가르침에 보답하는 길이라 믿는다”고 밝혔다. 노을을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해가 붉게 대지를 물들일 때면 말할 수 없는 기분에 들뜨던 소년의 가슴에는 어느 때부터인가 출가 수행자의 발원이 함께 물들기 시작했다. 낙동강 하구, 아름다운 노을을 만날 수 있는 부산 사하구 괴정동의 승학산 해인정사. 이곳에는 노을을 좋아했던 그 소년이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강백이 되어 『화엄경』의 큰 빛을 밝히고 있다. 해인사 강주를 지낸 수진 스님이다. 붉게 타오르던 노을이 지고 승학산
신라의 대국통 자장율사는 신라를 동방의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온 정성을 쏟았다. 그 실천 가운데 하나가 영축산 한 자락에 통도사를 개산하고 그곳에 계단을 조성해 중국에서 모셔 온 부처님 진신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이런 노력으로 당시 신라의 백성 10명 가운데 9명이 계를 받았다고 하니 지계 실천은 민족의 뿌리가 되어 신라의 국력을 형성하고 찬란한 정신문화를 꽃피우는 바탕이 되었을 터이다. 천년의 세월이 찰라 간에 흘러버린 지금. 가물거리는 그 먼 천 년 전 신라의 지계 정신은 여전히 통도사에서 유유히 계승되고 있는데 바로 그 중심에 자장 율사의 계율을 한 치의 어그러짐 없이 전하고 있는 스님이 있다. 바로 혜남 스님이다. 스님은 은해사 승가대학원장을 역임하고 제방의 강원에서 강의한 대 강백으로 더 잘
불교를 불효(不孝)의 종교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다. 『부모은중경』을 비롯해 효를 설한 경전들이 여럿 있지만 위작의 시비는 항상 끊이지 않았다. 사실 부모, 형제, 친구 할 것 없이 주변 인연을 단칼에 자르고 입산 출가해야 하는 수행자의 삶은 마치 물과 기름처럼 부모를 극진히 봉양해야 하는 효의 이미지와 어울려 보이지는 않는다. 연꽃마을 이사장 각현 스님. 스님이 교계에서 각별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불교에서 말하는 효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를 스님은 아름다운 삶을 통해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스님은 지난 1990년 연꽃마을 이사장에 취임한 이후 근 18년 동안을 노인복지를 통한 ‘효의 사회화 운동’에 매진해 왔다. 화두처럼 매 시간 효만을 생각하며 치열하게 붙들고 늘어지다 보니 어느덧 노
혼잡한 부산의 연산로터리에서 연산터널 방향의 도로를 가다 보면 터널 진입 직전에 작은 샛길이 있다. 초행에 발견하기란 쉬운 길이 아니며 차량으로 갈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샛길의 진입에 성공해서 조금만 오르다 보면 ‘넒은 세상, 밝은 마음, 맑은 불교’라는 글귀가 사찰임을 안내한다. 깊은 산 길 끝에서 암자를 만나듯 반갑고 설레는 순간이다. 산문을 대신하는 천왕문이 위엄을 자랑하고 그림 같은 능선이 대웅보전의 지붕과 조화를 이루는 이곳은 쌍계사 조실 고산 스님이 1975년 개산한 혜원정사다. 개산 당시 지은 ‘묘봉산’이라는 뒷산의 명칭은 30년의 세월을 넘어 사찰 입구를 ‘묘봉로’로, 연산중학교의 체육관까지 ‘묘봉관’으로 만들었다. 비단 이름만이 아니다. 혜원정사는 부산의 으뜸 포교를 톡톡히 해내며 지
새 천년이 열리는 2000년 1월, 세상이 온통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넘쳐 있던 그 순간, 일면 스님은 차가운 병원 수술실에서 홀로 죽음과 대면하고 있었다. 이미 기능을 상실해 버린 간, 육체는 죽음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들고 있었다. 생명나눔실천본부를 통해 구사일생, 다른 이의 간을 이식받게 됐지만 수술 결과는 장담할 수 없는 일. 수술도 수술이거니와 후에 오는 합병증을 견뎌내기가 더욱 어려웠던 탓이다. 수술 직전 스님은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조용히 올려다봤다. ‘저승에 가면 언제 죽었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살고 죽음에 대한 상념은 불문(佛門)에 들며 놓아 버린 터이지만, 그래도 지나 온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잠시 후, 기억은 가물거리듯 심연 속으로
황량한 사막을 경험한 이에게 오아시스는 시원한 호수의 의미 이상이다. 살인적인 무더위, 몸으로 파고드는 모래 폭풍의 지옥을 넘어 타는 목을 부여잡고 만나게 되는 오아시스는 생명이자 종교이며 삶의 축복이다. 또한 죽음의 터널인 사막을 탈출해 비로소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일 터이다. 25년을 하루같이 새싹 포교 충무공 이순신의 탄생지인 충절의 고향 충남 아산. 이곳에 조금은 색다른 오아시스가 있다. 옥련사 주지 종인(60) 스님. 스님은 이곳 아산 불교계라는 메마른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1982년 푸른 물이 넘실거리는 산정호 인근의 옥련암 주지로 부임한 이후 25년을 하루같이 청소년 포교와 문제 청소년 교화에 신명을 바쳐왔다. 청소년 포교라는 용어 자체가 낯설었던 1980년대, 종
8~9년여에 걸쳐 108산사를 순례하는 인욕의 수행 프로그램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도선사 108산사기도순례회가 지난 9월 13일 창립 1주년을 맞았다. 지난 1년간 108산사 순례회의 활동은 일거수일투족 세간의 관심거리였다. 매회 37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순례객, 도로를 가득 메운 버스의 행렬. 공격적 선교로 유명한 개신교와 기세등등하게 세를 확장하고 있는 가톨릭의 성장세를 보면서 느꼈던 불자들의 ‘패배주의’를 한방에 날린 그야말로 한국불교 신행 역사상 쾌거 중에 쾌거였다. 8~9년 걸리는 인욕 대장정 그러나 이런 외적인 부분보다 더욱 관심을 끈 것은 이들의 치열한 구도 열정이었다.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악천후 속에서도 한 달에 한 번 변함없이 산사를 찾았다. 참가 인원만 수천 명
매일을 낯선 타인들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있는지. 바다와 같은 평정심으로 혹은 달라이라마와 같은 자비심으로 단련된 사람이 아니라면 타인과의 끊임없는 만남은 그야말로 고역일 터이다. 더구나 지금은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을 개인의 사생활에 대한 권리가 더욱 존중되는 시절이 아닌가. 인도 사르나트 녹야원 주지 만공 스님. 스님은 이런 세상의 흐름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 스님의 일상은 많은 이들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녹야원이 부처님의 첫 설법성지인 사르나트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절을 찾으면 공짜 숙식에 스님과의 가벼운 차담까지 보장돼 있으니, 인도 순례를 떠난 이들에게 이런 조건은 떨쳐 버리기 힘든 유혹이다. 덕분에 스님은 적게도 2~3명에서 많게는 수십 명까지 매일 모르는 타인들과 마주해야 한다. 올
도심 포교당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신도의 많음, 일사불란한 조직, 재정의 튼튼함, 이런 것들이 이심전심 통하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덧붙여 건물의 규모가 돈으로 환산되는 도심의 특성을 감안하면 건물에 매겨지는 값어치도 포교당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일 터이다. 그러나 경기도 의왕시 내손동에 자리한 미륵도량 용화사는 이런 물욕적인 가치 기준에서 한참 비껴나 있다. 신도를 줄이려는 스님, 자율로 움직이는 신도회, 언제나 빠듯한 절 살림. 그럼에도 용화사는 성공한 도심 포교당의 대표 사례로 세간에 널리 회자되고 있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등록신도가 대략 4000가구 정도이고 이 가운데 매달 한번 이상 사찰을 찾는 진성 신도는 1500가구 가량입니다.
지현 스님은 오늘도 어스름한 새벽, 머리를 쓰다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삭발한 머리는 머리카락 한 올 걸리지 않고 매끈하다. 손에 감촉이 걸리는 순간 그리운 음성이 가슴을 훑고 지나간다. “지현아, 네 머리는 만져봤느냐. 진짜 만져 봤어”. 스님에게는 요즘 부쩍 소천 노스님의 말씀이 자주 들린다. 이미 30년 전에 열반에 드셨건만 세월이 갈수록 노스님의 체취는 더욱 그리움을 더한다. 스님은 노스님이 돌아가시기 전 2년간을 시봉했다. 그때 공양을 들고 방에 들어서면 노스님은 어김없이 똑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지현아, 머리는 만져봤느냐” 돌아가실 때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나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삭발한 머리를 만져서 뭣 하겠다는 말씀인지. 스님은 그저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럼
범패는 동양 최고의 종교음악이다. 천신들이 부처님께 음성공양을 올리기 위해 불렀다는 천상의 소리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의 ‘그레고리오 성가’가 서양을 대표하는 음악유산이라면 범패는 아마도 한국불교가 인류에 남긴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일 터였다. 범패는 다른 말로 어산(魚山)이라고 부른다. 어산은 조조의 아들 조식이 명상을 하다 물고기가 노니는 모습을 보고 음률을 만들어 그렇다는 설과 서기 830년 국내에 처음으로 범패를 들여 온 진감선사가 화동 쌍계사의 섬진강변에서 물고기가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 창안했다는 구전이 함께 전한다. 이유야 어떻든 범패는 이승을 떠난 영가를 피안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자비로운 마음을 담고 있다. 이런 까닭에 불교의식의 총화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범패에 이런 아름다운 상찬
부처님은 계행의 중요성을 생명에 비유하곤 하셨다.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계행을 바다를 건너는 생명줄인 구명부대에 비유하셨고, 수행자들에게는 계율을 타협의 대상으로 보지 말 것을 당부했다. 바다에 떠 있는 배에 물이 샌다면 그 구멍이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결국 배는 침몰할 것이 자명한 일. 부처님이 편리에 따라 파계를 합리화 하지 말라 이른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또 계는 계, 정, 혜 삼학에서 알 수 있듯 정, 혜를 증득할 수 있는 원천이기도 하다. 계율의 중함이 이러하니 여기에 몇 마디 말을 보탠 들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조계총림 송광사 율원장 지현 스님. 시대를 대표하는 율사 중 한 분인 스님의 삶을 더듬다 보면 가물거리던 계행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스님은 근엄한 율사이면서도 포교와 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