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포교사회 기초불교 영어강좌대한불교조계종 국제포교사회(회장 강영성)가 제8기 기초불교 영어강좌 회원을 모집한다. 이번 8기 강좌는 내년 1월 12일부터 3월 8일까지 매주 토요일 오전 10~12시에 종로 중앙신도회관 교육관 2층에서 진행된다. 영어로 불교를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가가능하며 접수는 1월 11일까지 국제포교사회 사무국에서 받는다. 수업료 5만 원. 02)722-2206 화성 용주사, 일요일 참선법회조계종 제2교구본사 효찰대본산 화성 용주사는 매월 둘째, 넷째주 일요일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2시간 동안 효행교육관에서 참선법회를 봉행한다. 용주사 사중 스님들의 지도로 진행되는 일요 참선법회는 참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자 마음의 고향을 찾기 위한 시간이다. 참선에 관심 있는 불자 누
광해군에게 8세 된 아들 영창대군 억울한 죽음인조반정 후 명산대찰 돌며 아들의 명복 발원 영화 ‘밀양’에서 여주인공(전도연)은 아들을 죽인 유괴범에 대한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스스로를 파괴하려고 발버둥 친다. 자신을 괴롭힌 인간을, 그것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이를 용서하기란 죽기보다 더 고통스러움을 영화는 잔혹할 정도로 리얼하게 보여주었다. 타인에 대한 분노와 미움을 어떻게 버릴 것인가. 이것은 인류의 역사가 전개되는 동안 종교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였다. 붓다와 예수 같은 인류의 스승들은 미움을 버리고 대신 자비와 사랑, 박애를 전하라고 설파했다. 그들은 미움을 미움으로 갚으면 그 자리에 후련함이 남는 것이 아니라 더 큰 복수 내지는 스스로의 파멸이 있다는 진리를 알려주었다. 고매한 인격
전국 명산대찰에 원찰 설치해 아들 낳기 발원 후덕하고 인자해 ‘살아있는 관음보살’ 추앙도 만약 의인왕후에게 아들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물론 역사에는 if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지만, 의인왕후 사후에 벌어지는 조선왕조의 비극 앞에서 후대인들은 한번쯤 이 같은 가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세자 신분으로 의병을 모집해 선조의 의주 피난으로 추락한 조선왕조의 권위를 회복하고, 즉위 후에는 중립외교를 통해 청·명과의 외교에도 성공하는 등 조선의 왕 중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유능한 군주였다. 하지만 그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연산군이 온갖 폭정을 일삼은 데 비해 정치적으로 유능한 광해군의 폐위 명분은 유교적인 질서를 무너뜨렸다는 것이
행실 바르고 덕 높아 궁중 귀빈들 모두 존경궁궐에서 불공해도 불쌍히 여겨 왕이 허락왜란 때 시신 불타…임종도 불행했던 여인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바로 절망이라고 말했다. 그에게 있어 절망의 해독제는 희망이 아니라 ‘믿음’이었다.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벗어나 더 크고 높은 곳으로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 이것이 바로 인간이 종교를 믿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 절대 고독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은 신앙 이외에 없음을 키에르케고르는 강조한 것이다.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실의 수많은 여인들이 불교를 독실하게 믿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들이 그 어느 누구보다 절망에 빠지기 쉬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구중궁궐 속에 갇혀 수
A자를 평생 가슴에 달고 다녀야 했던 『주홍글씨』의 주인공 헤스더처럼 역사 속에서 한번 낙인이 찍힌 인물은 죽어서도 그 덫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더구나 정사(正史)에 기록된 이야기일 경우 그 사실관계를 뒤집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 이야기는 후인들에게 불변의 진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월산대군 부인 박씨는 그녀가 죽은 이후 500여 년간 가슴에 짙은 주홍글씨를 달아야 했던 비운의 주인공이다. 흔히들 폐주 연산군의 악행 중에 최고로 꼽는 것이 바로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씨와 간통을 했다는 ‘사건’이다. “내 소원은 불교 부흥” 월산대군은 성종의 친형이다.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정희왕후는 자신의 손자들 가운데 자을산군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인수
치명적 사랑. 사랑을 일컫는 말 중에 이 말보다 더 강렬한 표현이 또 있을까. ‘목숨이 위태할 정도로 사랑한다’는 이 말은, 사랑이 갖고 있는 여러 특성 중에서도 헤어날 수 없는 중독성, 즉 걷잡을 수 없는 소유욕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역사 속에는 자신도 주체 못하는 지독한 사랑으로 스스로를 파멸에 빠뜨린 인물이 여럿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최근 드라마 ‘왕과 나’의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성종비 폐비 윤씨는 치명적인 사랑으로 인해 연인을 잃고, 목숨도 잃고, 나아가 자식의 운명까지 망가뜨린 대표적인 여인이다. 윤씨는 본래 왕비로 간택된 여인이 아니다. 궁녀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가 오직 사랑의 힘으로 왕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성종의 첫 번째 왕비인 공혜왕후 한씨가 병으로 죽자, 왕실에서는 성종의
유생들 반대불구 승과제도-선교 양종 부활각종 사화로 유생 탄압…역사에 ‘악녀’기록불법은 알았으나 탐욕 못 버린 미완성 보살 인간이라면 누구나 빛과 그림자의 양면성을 공유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 인물의 인생이 온통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면 그의 이면을 어떻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최고의 호불왕비(護佛王妃)로 일컬어지는 문정왕후(1501~1565)는 역사서 어디에서도 긍정적인 평가를 찾기 힘든 인물이다. 아니, 인간적인 면모라고는 일절 찾아보기가 힘들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지도 모르겠다. 조선 유생들은 그녀가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동안, 어느 고을에서 암탉이 수탉으로 바뀌었다고 비아냥대는 상소를 네 번이나 올렸고, 실록을 편찬한 사서들 또한 명종이 죽은 후 그녀를 일컬어 ‘아들에게 불선(不善)을
명군 성종의 친모이자 폭군 연산군의 조모각종 불경 간행…산스크리트 번역도 가능연산군 생모 윤씨 내쳐 비극의 씨앗 잉태 인수대비 한씨는 소혜왕후라는 왕비명보다 인수대비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인물이다. 이는 그녀가 한 번도 왕비였던 적이 없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인수대비는 처음부터 세자빈으로 간택된 여인이 아니었다. 시아버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남편이 의경세자가 되었고, 그녀는 수빈의 지위에 올랐다. 시아버지의 왕위 찬탈로 그녀는 하루아침에 세자빈이 되었지만, 갑작스런 남편의 죽음으로 무지개처럼 피어오르던 국모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시동생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요절함으로써 그녀의 인생은 또 한 번의 전기를 맞았다. 예종의 아들이 겨우 4살에 불과해 적통으로 보위를
왕위 찬탈한 세조가 남편과 아버지 죽여왕비에서 노비로 전락…정업원으로 출가영조, 비석 세워 위로…출가터 청룡사 복원 서울 동대문 밖 숭인동에는 동망봉(東望峰)이란 잘 알려지지 않은 봉우리가 있다. ‘동쪽을 멀리 바라본다’는 뜻의 이 이름에는 열여덟 어린 나이에 남편과 생이별을 해야 했던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 1440~1521)의 가슴 아린 사연이 깃들어 있다. 숙부의 정치적 야욕에 의해 왕위에서 내쫓기고 끝내 영월 땅에서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던 비운의 왕 단종. 그가 목이 졸린 채 동강에 버려졌다는 비보를 전해들은 왕비가 팔십 평생을 한 많은 영월 땅을 바라보며 통곡한 자리가 바로 동망봉이다. 동망봉에서 대학로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내려오면 나오는 청계천 영도교(永渡橋)와, 동망봉 아래 지금
단종을 폐위시킨 세조의 정비전국의 수많은 사찰 불사 주도조선 최초로 수렴청정한 대비 현재까지 전해지는 불화나 불상 중 최고 수준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은 대개가 왕실의 발원으로 제작된 것들이다. 당대 최고의 권력자가 화주가 되어 최고의 작가들로 하여금 불국토를 향한 서원을 발원하게 했으니 그 시대 최고의 작품이 탄생되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큰 사세를 유지하고 있는 큰 절들이 거의 왕실 원당이었다는 것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다. 불교가 이단으로 배척받던 그 시절에도 왕실의 지원을 받는 사찰들은 유생들이나 관아의 수탈을 피할 수 있었고, 이는 조선시대 불교를 보호하는 큰 버팀목이 되었다. 이런 불사들이 주로 왕실 여인들의 정치적·경제적 비호 아래 이루어졌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동화 속 이야기에 나오는 공주들은 대개 갖은 고난을 겪다가도 마지막에 이르면 멋진 왕자를 만나 듬뿍 사랑을 받으며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선시대에 등장하는 공주나 왕비 중에는 행복하게 살다간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는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또는 인간의 삶에서 행복은 잠시 고통을 가리는 커튼에 불과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네들은 고귀한 지위를 가졌음에도 늘 깊은 슬픔과 고독을 간직하고 살았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가장 흔한 방법은 내탕금을 보시해 불사에 동참하거나 명산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일평생 불경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살았다는 이유로 그들을 불
대학자 민제의 딸…왕위 계승에 탁월한 정치력 발휘외척 배척에 친정 몰락…아들 묘소 옆에 대자암 지어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苦)로 표현한다. 미운 사람을 만나야 하니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지 못해서 더욱 괴롭다. 그래서 『법구경』에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말라고 한다. 고통은 인간에게 독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파멸 직전에 놓인 인생을 되돌리는 전기충격기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고통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전제, 즉 일대사 해결을 위한 위대한 문제제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든 2500여 년 전 부처님이 설한 일체개고(一切皆苦)의 진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고통의 응어리가 풀리고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한다. 인생이 벼랑 끝으로 치닫는 지점에서 많은 이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