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건국 상징적 공간에중국적 이미지로 탈바꿈한20m 높이 거대한 문 건립 중국 고대신화 곳곳에 조각발해의 중국사 편입 일환일반인 교육에도 적극 반영 ▲발해를 중국사로 편입시키기 위한 중국 측 입장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육정산문. 이 문에는 ‘장백산’ 지역의 선사인류인 안도인을 시작으로 중국고대 신화와 관련한 조각과 발해의 건국, 발해와 당과의 교류(조공, 책봉) 및 청나라 시조의 탄생 등과 관련된 기록을 의도적으로 연결시켜 조성했다. “역사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 미래까지도.” 19세기 프랑스의 유명한 역사가 라마르틴의 말인데,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이기도하다. 과거를 거울삼아 오늘을 살고, 내일을 설계한다는 것은 인
법화신앙·유가유식사상발해불교 주류로 언급돼밀교연구 이뤄지지 않아 발해문물전시관서 소장한육비보살입상도 밀교유물정소 스님도 깊게 관련돼 ▲발해에 밀교신앙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서울대 소장 소조불좌상. 현재 서울대학교 박물관에는 발해시기 제작된 묘관찰지인(妙觀察智印) 혹은 아미타정인(彌陀定印)이라 부르는 수인을 결하고 있는 소조불좌상이 몇 구 전하고 있다. 정확한 출토지는 알 수 없으나 상경성(上京城)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한다. 발해 역사상 최후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의 치소(治所)였던 상경성은 성왕(794~795)의 즉위한 794년에 천도하여 발해가 멸망하는 926년까
인도신화서 유래된 사천왕일본은 북방천왕 위상 높아 한국서 건너간 승탑사천왕상중국식 다문천왕 특징 담겨관련연구 없어 가치 남달라 ▲ 네즈미술관 소장 고려시대 승탑의 다문천상의 도상은 통일신라시대까지는 전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고려시대에 들어서도 거의 볼 수 없는 매우 드문 모습의 귀중한 자료다. 한국 문화재에 대한 일본인들의 조사는 한일합방 이전인 1902년 무렵부터 시작됐다. 당시의 조사는 어디까지나 일본의 조선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었을 뿐, 우리 민족문화의 전통을 발견한다거나 선양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그 무렵 일본에서는 골동취미가 보편화됐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은 우리 문화재가 반
1909년 이후 매년 방한해최초의 한국문화재연구 주도관련자료 4000여점 남겨 2010년부터 한·일 공동으로세키노 자료 연구조사 착수 ▲세키노가 건판 사진·필름·탁본·실측도면·모사도 등의 형태로 남긴 자료는 문화재가 훼손되기 이전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받고 있다. 사진은 좌로부터 경주 원원사지, 경주 남산 보리사 석불좌상 광배,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의 필름. 한국의 문화재 관련 연구는 20세기 초 일본의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현재 도쿄대학에는 대학원 공학계연구과, 종합연구박물관 등에 그들이 조사한 한국관련 자료가 상당수 남아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건축학과
1970년 문경 도천사지서통일신라 석탑 3기 발견 도천사 탑지 조사 결과창건 때부터 나란히 배치 1탑·2탑 가람이 전통양식3탑은 역사 기록에도 없어새 가람양식 이해의 단초 ▲문경 도천사지에서 발견된 3기의 석탑들은 현재 직지사로 이전돼 대웅전 앞에 2기, 비로전 앞에 1기가 복원돼 세워졌다. 사진은 직지사 대웅전 앞의 2기. 1970년 1월13일자 한국일보에는 문경에서 통일신라시대 석탑 3기가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사진과 함께 크게 실렸다. 석탑들은 모두 무너져있으나 복원하면 8m가 넘는 국보급 석탑이라고 보도하였다. 바로 현재 김천 직지사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3기의 석탑들이다. 신문에 등장하고 4년 뒤 이 탑들은 직지사
일본왕이 본존불을 조성하자605년, 고구려왕 황금 보내불상 도금용으로 사용 추측인근공방서 작업 가능성 높아 긴테츠(近) 카시하라진구마에(原神宮前)역에서 버스로 10여분 거리에 아스카데라(飛鳥寺)라는 사찰이 있다. 행정구역상 주소는 나라켄 다카이치군 아스카무라 아스카682번지(奈良高市郡明日香村飛鳥682)인데, 이곳이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사원이 건립된 곳이다. 몇 해 전, 일본 아사히신문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사찰인 아스카데라(飛鳥寺)가 백제의 왕흥사를 본떠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당시 기사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부여의 왕흥사지의 조사결과와 함께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된 왕흥사는 백제 제27대 왕인 위덕왕(威德王·재위 554∼598)이 숨진
소조로 불상형태 완성하고칠과 마포 겹쳐서 바른 뒤소조상 제거·개금으로 완성건칠불상연구 중요한 자료 ▲ 중국 베이징 구관복미술관(舊觀復美術館) 소장 명대 협저불상은 지금까지 자료가 극히 부족했던 협저불상 제작기법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2005년경 베이징시내의 화랑가를 배회하던 나는 어느 작은 미술관의 진열장 안에 놓여 있는 매우 독특한 느낌의 불상을 한 구 발견하였다. 전신에 개금이 되어 있는 중국불상이었다. 얼핏 보면 목불 같았지만 보면 볼수록 느낌이나 질감이 다른 것 같았다. 망설이던 나는 결국 미술관 안으로 들어가서 자세히 불상을 살펴보았다. 가까이서 직접 보니 역시 목불은 아닌 것 같아서 점원에게 불상의 재료
동북아교류서 교통 요충지로한·중·일 관심 가지고 발굴청동거울·철제화살촉 등 출토고구려·발해 문화연속성 밝혀 ▲크라스키노를 출발해 일본으로 향한 발해사신이 도착한 곳은 현재의 후쿠라항으로 추측되고 있다. 후쿠라항의 전경.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에 있는 발해성 유적에서 낙타의 뼈가 확인됐다. 발해 유적에서 낙타 뼈가 확인된 것은 처음이다.”(8월 5일 연합뉴스) 동북아역사재단은 러시아과학원 극동지소 역사·고고·민족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해 성터를 발굴 조사한 결과 지난해 출토된 동물 뼈 중에서 낙타의 뼈가 포함돼 있음을 확인했다고 5일 밝혔다. 이것은 발해가 서역과 직접적으로 교역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
우리문화재 최초의 조사강점기 일본인들이 시작당시 조사로 알려졌지만현재 사라진 유적지 다수 발굴돼도 방치로 이어져 정비·관리 이뤄지지 않아 지속적인 훼손 안타까워 적극적인 대책 마련 절실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 야산 기슭 절터가 약사암터라는 것과 사방불상이 새겨진 탑신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세노키 타다시의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사진 덕분이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아쉽게도 일제강점기 일본인 연구자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근대적인 조사의 맹아는 야기 소우사브로(八木裝三郞)에 의하여 1900년에 최초로 행해졌다. 그는 도쿄대학(당시 동경제국대학) 인류학 교실의 일원으로 조선에 파견되
4~7세기 조성 벽화고분집안 등에 90여기 남아1500년 넘게 색채 간직“유례 찾기 힘들다” 평가표면옻칠 후 채색 ‘추정’ ▲좌로부터 천장 받침돌, 서벽 백호도, 농사의 신과 인물도, 그리고 무덤 내부 습기가 이슬이 되어 맺히는 결로현상. 오회분 5호묘는 벽면이 이슬방울로 가득 차 있음에도 전혀 색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화려해진 색채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을 이야기할 때 늘 서장을 장식하는 것은 고구려 고분벽화이다. 고구려는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당나라의 동진을 저지하면서 안으로는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는 대국토 건설을 꾀했던 야심만만한 국가였다. 고구려는 정치적·군사적으로 안정되었던
‘삼화령 미륵삼존불상’과‘청와대 불상’은 원위치서옮겨진 ‘이산문화재’ 분류 문화유산 복원 과정에서‘의미 있는 장소’ 인식과가치지속 위한 노력 절실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의상’은 1925년 경주 남산 장창곡 상류에 있는 절터에서 발견됐다.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을 거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수많은 불교문화재가 전시되고 있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불상을 들라면 1위는 단연 남산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의상일 것이다. 특히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많이 좋아하는데, 처음 만나도 스스럼없이 친해져 이내 같이 뛰노는 아이들의 천진함이 불상에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친
섭정이던 태자의 교육담당사상·이념 확립에 큰 영향외교정책에도 깊이 관여‘일본서기’ 성인으로 추앙 ▲쇼토쿠태자는 혜자 스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세 가지 경전의 소를 찬술하는 등 일본 아스카(飛鳥)시대 불교중흥을 이끌었다. 일본 최고의 사찰 호류지(法隆寺)의 쇼료인(聖靈院)이란 전각에서는 매년 2월21일 일본인들이 신으로 받들고 있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제사를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이 날은 쇼토쿠태자뿐만 아니라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의 제사도 함께 모신다. 둘은 한 해 차이로 같은 날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대단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했으나 사실은 우연이 아니었다. 고구려의 승려 혜자(慧慈)는 일본의 스이코(推古)천왕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