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는 미술작품을 다루는 학문이다. 거기에는 미적취향, 감수성과 같은 주관적 요소가 개입되기 마련이다. 때문에 미술사를 엄밀하고 객관적인 학문으로 만들기 위해 미술사 연구자들은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 미술이라고 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영역으로 보이는 대상을 다루는 학문이니만큼 그 객관성을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그 비판의 요점을 쉽게 표현하자면 “미술사란 어차피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학문 아닌가?” 하는 것이다.지나친 문헌 확실성 강요가 인문학 전반에 문제 일으켜학문 논쟁은 이론·해석 싸움
고려시대에는 팔각다층석탑이 많이 만들어졌는데, 평양의 영명사 및 홍복사 7층석탑, 그리고 묘향산 보현사 13층석탑처럼 고려의 수도 개경에 가까운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그리고 드물게 남한에서는 강원도 평창 오대산의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이 남아있다. 이러한 팔각형 평면의 탑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나 추정되고 있다.안정적인 높이·균형미 압권명확한 조성 연대는 알수없어 유연 스님 중창때 조성 추정되나유사 형태로 중국 연관성도 제기10세기~조선까지 견해 다양해월정사탑은 비록 개경의 입장에서 보면 멀
고려불화는 지금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되어 있지만, 불과 1978년 이전까지만 해도 그 존재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 이전에는 대체로 일본 혹은 중국의 불화로 알려져 왔기 때문에 단지 고려시대 건축인 수덕사 대웅전의 벽화 정도만이 유일한 고려불화의 흔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었다.고려불화 대표 도상 중 유독 많은 작품 전해져 임종 지키는 그림으로 추정‘수기도’와 유사한 양식으로 명확한 구분 기준 찾기 어려워지협적 문제 연연하기보다부처님과의 만남에 의미 둬야고려불화 연구의 도화선은 1978년 일본 나라의 야마토분카간(
전남 화순 운주사는 계곡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는 수많은 탑과 불상 전체에 대한 통칭이다. 하지만 단순히 넓게만 분포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범위 안에 밀집되어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분명히 하나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 사역에 왜 이렇게 많은 불탑과 불상을 세웠는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더구나 그 조형양식이 마치 헨리 무어(Henry Moore, 1898~1986)의 조각을 보는 듯한 추상성을 느끼게 해 도대체 이런 양식이 언제 어떻게 등장한 것인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광범위하게 분포된 탑·불상유례없는
개태사(開泰寺)는 충남 논산에 있는 사찰로서 고려초에 개창한 거찰이었다.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절은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후백제 견훤(甄萱, 867~936)의 아들 신검(神劍, 재위 935~936)과 싸워 이김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후삼국통일의 위업이 부처의 가호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에 보답하고, 아울러 통일한 고려를 지속적으로 보호해 주십사 하는 발원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한다. 이렇게 왕건이 발원하여 세운 사찰이니만큼 고려시대에는 국찰로서 대소 행사가
한국의 불탑 역사에서 석탑, 목탑과 함께 전탑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탑은 전(塼), 즉 벽돌로 쌓은 탑을 말하는데, 비슷한 것으로 모전석탑이라는 것도 있다. ‘모전(模塼)’이란 ‘전’을 모방한다는 뜻이므로, 돌을 마치 벽돌처럼 다듬어서 쌓은 탑을 말한다. 재료 및 블록을 만드는 방법은 다르지만, 축조의 결과물인 탑은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같은 것으로 간주되고 비교도 자주 된다. 특히 현존하는 신라의 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분황사탑이 바로 모전석탑이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제기되었다. 분황사탑 이후 나타난 신
철불(鐵佛), 즉 철로 주조한 불상은 금동불상의 주재료인 구리와 달리 철이라는 소재를 녹여 만들었다는 뜻이지만, 단순히 재료의 차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철불만의 고유한 표현 감각을 지니고 있다. 철불은 금동불에 비해 주조기법이 투박하고, 불상의 표현 자체도 거칠며 그로테스크한 느낌이 강하다. 철이 구리에 비해 녹는점이 높기 때문에 보다 높은 화력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조각적 표현기법의 기초가 되는 원형을 만드는 방식이나 이에 맞는 외형 거푸집을 만드는 방법 등은 금동불 제작기법과 대체로 동일하다. 일단 녹이기만 하면, 주입하는 쇳물
불상은 그 수인(手印, 손 모습)으로 존명을 판단한다. 항마촉지인은 석가모니불, 구품인은 아미타불, 약함을 들고 있으면 약사불 등으로 읽히는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눈에 띠는 수인은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이다. 왼손은 주먹을 쥔 상태에서 마치 ‘하나’를 의미하듯 검지를 세우고, 이 검지를 오른손이 움켜쥔 듯한 모습이다. 비로자나불은 흔히 ‘화엄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등장하는 부처로 알려져 있는데, 화엄사상이 이야기하는 ‘일즉다 다즉일’, 즉 하나가 모든 것으로 확산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수렴한다는 개념을 표현한
불국사는 석가탑·다보탑 및 청운교·백운교로도 유명하지만, 비로전에 봉안된 금동비로자나불좌상과 극락전에 봉안된 금동아미타불좌상도 미술사학자들에게는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국보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석불상은 많지만, 이렇게 거대한 규모로 만들어진 금동불상의 사례는 매우 드물 뿐 아니라, 그 조형성 역시 뛰어난 작품이다.신라 불상 중 규모·수준 독보적봉안 시기 추정 견해는 분분하나8세기 중엽 이후 작품으로 간주최치원 찬문과 연관되면서 주목찬문 향한 가필·진위 논란 속금동불상 찬탄글이란 주장 제기 조성시기 877년 확정 근거되기도2
전남 구례 화엄사에는 귀중한 성보가 많이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것은 4사자 석탑이다. 일반적인 탑과 달리 이 석탑은 네 귀퉁이에 사자가 앉아서 머리로 탑을 떠받들고 있고, 그 가운데 안쪽에는 어떤 인물이 서있는 형상이어서 매우 독특한 느낌을 준다. 다보탑과 더불어 통일신라의 이형(異形) 석탑을 대표한다.석탑 안에 인물 입상 봉안일반적 탑과 달라 ‘눈길’석탑 앞엔 무릎 꿇은 인물독특한 구도 궁금증 유발‘화엄사적기’ 청건설 따라 연기조사·어머니로도 해석탑 앞 인물 주목한 새 견해도공양 대상 ‘부처’로 보는
충남 조치원 연기군의 비암사(碑巖寺)에서는 매년 4월15일이면 ‘백제대제(百濟大祭)’가 열린다. 이는 백제의 왕들과 대신, 그리고 부흥운동을 펼치다 목숨을 잃은 혼령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4월15일일까. 이유는 바로 1960년 9월, 이 절에서 발견된 불비상에서 비롯된다.1960년 연기군 비암사 시작으로 7개 불비상 잇따라 발견돼 주목처음 발견된 독특한 형식의 사례 고 황수영 박사 등, 선구적 분석신라에 멸망한 후 조성된 불상에백제 양식 특징들 등장해 주목‘당나라 도상의 영향’ 의견도풀어야 할 과제 여전히 산재
‘석굴암’이라는 단어에 많은 사람들은 그 안에 결가부좌하고 앉은 하얀 화강암의 부처님을 떠올린다. ‘불국사’ 혹은 ‘마곡사’라는 절간의 이름이 그곳에 모셔진 부처님을 연상시키는 것은 아닌데, 석굴암은 그렇다. 어느새 ‘석굴암’이라는 이름은 절간의 이름이 아니라 그 부처님의 이름처럼 되어버렸다. 그만큼 석굴암 본존불의 존재는 거대한 무게로 다가온다.1907년 일제강점기 처음 발견편단우견에 ‘항마촉지’ 수인일본인들, 석가모니불로 판단1964년 아미타불 주장 제기도‘삼국유사’ 기록 조성이유 근거 다양한 학설 제기됐지만 미결 “당시 불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