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연재를 시작한지 1년이 되었고 이제 마지막 회차가 되었다. 급작스레 건너뛴 느낌이 있지만,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는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대사들’이다. 홀바인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와 더불어 르네상스 문화가 북유럽에서도 풍미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특히 초상화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유럽을 먹구름 속으로 몰고 갔던 때였다.그는 독일의 화가 집안에서 태어
이탈리아 여정의 흥분을 뒤로 하고 밀라노 중앙역에서 23시5분에 프랑스 파리 리옹역으로 출발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리옹역에 도착한 것은 아침 10시 조금 전이었고, 바로 전철로 파리 북역으로 이동해 역 근처에 미리 예약한 숙소에 짐을 풀고 박물관을 찾아 나섰다. 파리에는 몇번 왔지만, 사실 그 유명한 오르세 미술관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맨 처음에는 조사 일정을 마치고 시간을 내려했지만 마침 월요일이어서 미술관이 문을 닫았고, 두 번째 방문에서는 사람이 너무 많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세잔과 반 고흐 같은 거
두오모 밀라노. 즉, 밀라노 대성당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성당이라고 한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성당이 성 베드로 성당이지만, 이것은 로마 안에 있으면서도 별도의 나라이기도 한 바티칸에 속하기 때문에 제외했을 때 밀라노 대성당이 가장 큰 규모라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성 베드로 성당이 더 크다고는 해도 체감하기로는 밀라노 대성당이 더 웅장하고 위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고딕성당이 보여주는 복잡하고 정교한 그러면서도 하늘을 찌르는 듯한 속성 때문이리라.이렇게 크고 웅장한 대성당이지만, 이미 피렌체의 두오모를 보고난 터인지라,
밀라노. 명품의 도시이자 라 스칼라 오페라좌가 있는 곳. 미술사학자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인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이 있는 곳. 그리고 즐비하게 늘어선 화려한 패션 상가 사이에서 고풍스럽고 거대한 밀라노 대성당이 중심을 잡아주는 도시. 그러나 필자가 밀라노를 찾은 가장 큰 이유는 미켈란젤로의 마지막 피에타인 ‘피에타 론다니니(Pieta Rondanini)’를 보기 위해서였다.‘피에타 론다니니’가 소장된 스포르체스코 성은 15~16세기 밀라노를 포함한 이탈리아 북부를 장악했던 스포르차(Sforza) 가문의 거점이었다. 레오나르도 다
중국 육조시대의 화가이자 회화비평가인 사혁(謝赫)은 저서 ‘고화품록’에서 그림을 평가하는 6가지의 기준을 제시했는데, 후대의 이론가들은 이를 ‘6법’이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다. 이 6가지 기준 중에서도 으뜸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었다. ‘기운생동’이라고 하면 언뜻 역동적인 그림을 높이 평가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꼭 그런 뜻은 아니다. 그 뜻을 풀어놓은 후대의 설명을 찬찬히 읽어보면 결국 인물화에 있어 그 인물의 내면적 성격을 정확히 드러내는 것을 의미했다. 이는 동양화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던 ‘전신(傳神)’, 즉 ‘정신을 전
우피치 미술관은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회화 작품이 오롯이 모여 있는 세계 최고의 미술관 중 하나이다. 앞서 소개한 지오토, 마사치오 외에 치마부에, 보티첼리 같은 화가들의 그림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매력이다. 그 중에서도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한 미켈란젤로의 ‘도니 톤도(Doni Tondo)’는 시스틴 성당의 벽화를 제외하고는 미켈란젤로가 유일하게 완성된 회화작품이다. 비록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도 ‘예수의 매장(Entombment)’과 ‘맨체스터의 성모(Machester Madonna)’로 전하는 그의
지난 글에 소개해 드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쿠폴라에 정신이 팔리면 자칫 이 성당 앞의 산 조반니, 즉 성 요한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과 이 세례당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거대한 청동문을 놓치고 지나갈 수 있다. 이 문은 브루넬레스키와 쿠폴라의 설계로 놓고 경쟁하기 몇 년 전에 로렌조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가 그와 첫 번째 경합을 벌였던 작품이다.브루넬레스키와 마찬가지로 금은세공인이었던 기베르티는 1400년 발발한 페스트를 피해 피렌체를 떠나 이탈리아
피렌체 시가 당시 기술로는 도저히 만들 수 없는 돔을 가진 성당을 채택한 것은 돔 아래 부분의 건축을 세우는 데에만도 백년은 족히 걸릴 것이기 때문에 그 동안 돔을 만들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되리라 낙관했기 때문이었다. 두오모의 거대한 공사는 1296년 9월9일 시작되었다. 그리고 설계자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몇 년 뒤인 1302년에 사망하자 공사는 지지부진 답보상태에 빠져버렸다. 공사가 재개된 것은 30여년이 흐른 후 화가 지오토 디 본도네를 새로운 공사감독으로 임명하고 난 1334년이 되어서였다. 그러나 지오토도 1337년
르네상스의 예술가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미켈란젤로이지만, 르네상스의 고향 피렌체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두오모(Duomo)’다. 곧 피렌체의 상징이다. 피렌체의 골목을 걷는 동안 건물들 틈새로 보이는 붉은 색의 거대한 돔은 내가 피렌체에 와있음을 늘 실감나게 한다. 그러다 문득 종탑에서 들려오는 영롱한 종소리라도 들려오면 집으로부터 정말 먼 곳에 와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불교에도 종이 있지만 어떻게 저렇게 소리가 다를 수 있을까. 건축이나 조각의 차이점을 보면서는 느끼지 못하는 한국과 유럽의 거리가 소리마저 다르다는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을 저술한 바자리의 기록에 의하면 미켈란젤로는 3점의 피에타를 제작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로마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 피에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미완성으로 끝났다. 그 중 하나는 피렌체 두오모 성당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피에타 반디니(Pieta Bandini)로 불리는 작품이고, 다른 하나는 밀라노에 있는 피에타 론다니니(Pieta Rondanini)이다. 특이한 것은 미켈란젤로가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를 완성한 것은 1499년이었고, 피에타 반디니는 1546년경부터 작업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의
피렌체는 세계인의 로망인 관광지인 만큼 수많은 인파가 몰리기 때문에 자칫하면 줄서다 하루가 다 지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많이 몰리는 곳, 특히 우피치 미술관, 아카데미아 미술관, 두오모 성당은 일단 무조건 아침에 일찍 가서 줄서야 다음 일정을 소화할 시간을 벌 수 있다. 만약 일정이 정확히 잡혀있기만 하다면 예약도 좋은 방법이다. 다만 배낭여행자들은 다음 목적지에 정확히 예상한 날에 도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으므로 예약이 어려운 편이다.지난 일정 중 가장 큰 기대와 흥분으로 기다렸던 장소는 미켈란젤로를 대표하는 작품, 다
아시시를 떠나는 것도 로마를 떠나는 것만큼이나 아쉬웠다. 어쩌면 더 큰 아쉬움과 망설임이 나를 주저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다음 행선지인 피렌체가 너무나 큰 무게로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필자는 “피렌체는 세계의 경주다”라고 말하고 싶다. 경주가 필자에게 주는 무게만큼이나 피렌체는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관광객이라면 그저 기대되는 도시이겠으나 미술사학자에게 피렌체는 말하자면 전쟁터 같은 곳이다. 수많은 걸작들과 씨름해야하고 그만큼 무엇인가를 배우고 얻어 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감돈다. 왠지 나는 아직 피렌체를 돌아볼 준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