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들어서면서 추위는 아주 매서워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내복을 입는 것이 일상다반사였지만. 요즘에는 내복을 입는 사람이 아주 적어졌습니다. 사무실이나 집에 보일러의 온도를 아주 높게 해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지하철만 해도 난방이 잘 돼 있어 공연히 내복을 입으면 더워서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복을 입지 않고 오히려 두꺼운 외투를 걸친 뒤에 사무실이나 백화점의 더운 곳에서는 벗는 행태의 옷 입기가 일상화됐습니다. 요즘 도시의 날씨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지구온난화의 영향 탓인지 아무리 춥다고 해도 20~30년 전 같이 춥지 않습니다. 더욱이 도시열섬현상으로 건물과 가정의 과도한 난방으로 도시자체의 온도가 높아져 과거처럼 춥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내복을 입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우
과거에는 암으로 사망하는 일이 비교적 드물었지만, 이제는 암이 사망원인의 1위를 차지할 정도로 늘었습니다. 화학조미료로 범벅이 된 먹을거리, 농약을 친 식품이나 외국 수입농산물 그리고 각종 건물이나 시설에서 나오는 유해 방사능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실제 호주와 뉴질랜드를 포함한 아시아에서 우리나라는 10만명 당 161명꼴로 암이 발병되고 있어 몽골 다음으로 암 발병률 2위라고 합니다. 한국인의 평균수명 79세인데 그때까지 10명 중 3명이 암이 걸리고 있다고 합니다. 암세포는 어떤 특정한 세균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이 아닙니다. 일종의 종기 같은 것인데 그것이 과도하게 커진 것을 종양이라고 하며, 이 종양 중에서 빨리 자라고 다른 조직에 전이 되고 재발가능성이 높은 것을 악성종양, 즉 암(癌
햄버거를 온 국민이 먹는다 해도 만드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TV라고 해도 한국사회의 시장규모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상품시장은 누군가 선점한 뒤 호황을 누리면 많은 기업들이 그 업종에 뛰어들어 결국 치열한 경쟁으로 시장은 포화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이걸 ‘레드오션’이라고 하지요. 그러나 시장은 상품시장만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를 테면 정부의 정책을 주시하고 국민의 세금이 효율적으로 잘 쓰이는지 감시하는 ‘Watch Dog’ 활동이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인권을 지키며 감시하는 활동, 가난한 나라의 긴급구호를 하고 개발지원을 하는 시민사회활동은 물건을 생산하는 활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한 사회적 가치와 도덕적 사회를 만드는 보이지 않는 생산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
주부가 집에서 하는 일을 영어로는 ‘house keeping’, 일본어로는 가사(家事)라고 합니다. 모두 집안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유독 ‘살림살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상하지요? ‘살린다’는 말의 반대는 ‘죽인다’입니다. ‘살린다’의 명사형이 ‘살림’입니다. 그러면 살림살이는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란 뜻입니다. 여성의 집안일은 곧 ‘살리는 일’을 하는 것이라는 전통의 지혜가 묻어 있는 아름다운 말입니다. 여자들의 살림살이는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아이 돌보고, 가족들의 건강을 건사하며 돌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마치 산에 돌을 올려놓으면 다음날 다시 굴러 떨어져 매일 다시 올려놔야 하는 ‘시지프스의 노동’같이 반복됩니다. 티도 안 나고 별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돈을 받는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전에는 거의 없던 피부병입니다. 대체로 농약, 비료 및 온갖 첨가제로 버무린 식품을 많이 먹거나 화학재료가 들어 있는 건축자재에서 나오는 새집증후군 등이 원인이라고 전문가들은 분석합니다. 때문에 유기농식품을 먹기 위해 도농공동체를 만드는 생협에 참여하거나, 도시를 벗어나 자연친화적인 생활을 하려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전통 시장은 대체로 5일장이었습니다. 장터에서 각자 농사지은 물건들을 가져와서 팔고 교환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서 놀이가 빠질 수 없습니다. 탈춤, 꼭두각시놀이, 남사당놀이, 풍물놀이 등이 바로 이렇게 펼쳐진 장터에서 발달했던 민중들의 전통놀이문화입니다. 장터는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것만이 아니라, 지역과 지역 간의 정보를
오늘날처럼 경제적 효율성과 돈 중심의 사회에서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예술적 소양은 갈수록 부차적으로 취급됩니다. 과거에 지식인(선비)라 하면 시도 잘 짓고 글도 잘 써야하며, 노래나 춤도 할 줄 알아야 훌륭한 인품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101가지 죽기 전에 해야할 일’이라는 주제의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남자 그리고 하모니’편이 8회에 걸쳐 방영이 되었습니다. 개그맨, 리포터, 격투기선수, 방송기술자 등 오합지졸들이 모여 2달 동안 진행된 이 합창단의 연습과 공연과정을 지켜본 시청자들은 많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열광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어우러져 소리를 맞추고 화음을 만드는 과정은 곧 상대를 배려하고 자기의
축구 중 골인을 하면 박주영 선수나 이영표 선수가 무릎을 꿇고 기도세리머니를 하는 걸 봅니다. 그 때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거부감을 주고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어 개신교를 품위 없는 종교로 만들지 않는가 생각하곤 합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해서 자신의 아들까지 대신 죽게 만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자기를 믿는다고 이기게 해주고 믿지 않는 다고 지게 한다면 그 하나님은 사랑과는 반대되는 신, 너무 속 좁은 신 아닌가 하는 겁니다. 좋아하는 사람은 떡 하나 주고, 싫어하는 사람은 안주는 것은 중생의 수준인데,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중생 수준이면 그런 신은 별로 믿을 필요 없지 않은가요. 전쟁에서 자기를 믿고 기도한다고 한쪽 편을 이기게 하고 다른 편은 죽게 하는 부처님이나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말을 들어주고,
얼마 전 아이티에 지진으로 엄청난 인명피해가 있었습니다. 인도와 인도네시아를 휩쓸었던 쓰나미 해일이나 파키스탄 지진, 미국을 휩쓴 카트리나 등의 자연재해가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10년에 1번이나 2번 있었던 재난이 최근에는 1년에 수차례나 발생하고 있고, 그 원인은 지구온난화 때문이라고들 생각합니다. 한국은 올해부터 OECD국가 임원국가인 DAC에 가입되어 활동합니다. 그동안 한국은 가난한 나라에 대한 원조 지원액수가 적어 국제적으로 많은 비판이 있었습니다. OECD국가 권고치는 국민총소득(GNI)의 0.7%이나 한국은 1/10밖에 되지 않는 0.07%수준이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12~13위의 경제부국이라면 그에 해당하는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는 책임의식을 느
현재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Green Growth)’을 주된 국정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녹색을 내건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성장이라는 용어가 결합되어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현 정부의 녹색성장은 ‘환경과 경제의 선순환’을 기치로 녹색기술개발과 녹색산업육성을 통해 국민소득증대와 일자리 창출을 제일 목표로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산업구조도 녹색화하고 청정에너지를 개발, 확대하여 기후변화에 대응하며 온실가스를 감축하겠다고 합니다. 또한 생활의 녹색혁명을 추구해 저탄소형 국토개발, 생태공간조성, 녹색교통, 녹색소비 등 핵심주력산업의 ‘녹색’을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제 기후변화논의에 적극 대응하고 글로벌 리더십을 발휘해 국제적 기대에 부응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말 아름다
휴가(休暇), 여름에 정기적으로 진행되는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교통체증으로 막히고 돈 들어가는 짜증스럽고 피곤하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휴가가 연례행사처럼 의무가 되었을까요. 휴가는 일과 놀이를 분리하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일은 힘들고 고통의 반복이며, 그래서 정해놓고 휴일을 정하여 긴장과 이완, 완급을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때 일은 자신의 가치와 원을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돈벌이를 위해 긴장과 피곤을 무릅쓸 수밖에 없는 고통스러운 것이지요. 이처럼 오늘날 현대인들은 생계와 돈벌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일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고 일이 놀이고 놀이가 일인 사회나 자신을 상품화시켜 돈의 가치로 환산하지 않는 사회는 휴일을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 이상적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
우리가 부르는 동요나 가요를 보면 대부분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에 대한 노래입니다. 나머지는 ‘자연’을 노래하거나 특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남녀 간 사랑의 감정이야 사람간의 일이라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며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이나 고향은 한번 없어지면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처럼 고향이나 산과 강 등의 자연은 우리 마음의 원천, 감성의 근원입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고향을 향해 머리를 둔다는 뜻의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는 말은 산과 들에서 뛰어놀고 이웃집과 함께 길쌈하면서 살던 고향이라는 마을공동체가 사람에겐 정신적 귀의처라는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갈 고향이 있을까요? 6~70년 이농현상과 도시화로 고향을
6월 14일 수경 스님은 ‘다시 길을 떠나며’라는 글을 남겨두시고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나셨습니다. 문수 스님의 소신공양 이후 가까이 뵈면서 스님은 공식, 비공식행사장에서 평소와는 다르게 감은 눈으로 침묵을 하시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대답으로 말씀을 아끼셨습니다. 결국 이러한 결단을 위한 과정이라는 걸 이제야 깨닫게 됩니다. 몇몇 분들은 ‘수경 스님답게 선승으로서 온 몸으로 화두를 던진 것이며 참 종교인의 표상을 보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10여년 넘는 환경운동과정에서 수경 스님에게 지워진 그 막중한 사회적 책임에 대한 부담’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틀로 해석할 뿐이지요. 스님은 새만금 갯벌을 지키기 위한 삼보일배와 4대강을 위한 오체투지로 급기야 무릎연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