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은 어디에서든 설탕을 싼값에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설탕이 이처럼 누구에게든 ‘친근한’ 식품이 된 것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40여 년 전만 해도 웬만한 서민들은 사카린 같은 인공 감미료를 써서 단맛을 냈는데, 5·16쿠데타 직후 터진 이른바 ‘사카린 밀수사건’을 돌아보면 그 당시 설탕이 얼마나 귀한 존재였는지 짐작할 것이다. 사탕수수는 뉴기니에서 최초로 재배되고, 인도에서 최초로 가공되었다. 아랍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다. 유럽인들의 설탕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들은 카리브해 연안 식민지에서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한다. 하지만 이 지역 생산농민들은 설탕을 쉽게 먹을 수 없었고, 수백 년 동안 스페인이나 영국·미국 등의 소비자들을 위해서 피땀을 흘렸고 설탕을 통해 유럽인들에게 철저히 종속
민간 정치인 출신이 정권을 잡아 형식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게 된 뒤로 가끔 정치적으로 ‘대통령에 대한 중간 평가’라는 말이 나오기는 했지만 실행된 적은 없고, 다만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를 통해 실제로는 정부에 대한 중간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여당이 승리한 적은 없고 번번이 참패로 끝나고 말았고, 이번 6·2지방선거에서도 이 징크스가 깨지지 않았다. 이를 두고 ‘우리 국민들의 절묘한 균형감각’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런 표심이 꼭 ‘유권자들의 높은 정치의식과 균형감각’ 덕분일까?황현은 말한다. “운현[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십년 간 안팎으로 위엄이 두루 미쳤다.… 깊은 산골이나 먼 바닷가의 백성들이 이를 원망하고 탄식하며 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운현이 정권
품종개량과 화학비료·살충제와 제초제 등 농약의 다량 보급으로 단위면적당 농업생산량이 급증하여 농촌 소득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던 1970년대 말의 일이다. 내 막내 이모 댁은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벼농사를 지으며 작은 과수원에서 복숭아를 키워 이모 내외와 그 부모님, 아이들 이 3대가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과수원에 농약을 뿌리고 집에 돌아온 이모부가 갑자기 경련을 일으켜, 병원에 가서 응급처치를 받아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면서 단란했던 농촌가정의 행복은 한 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 뒤로 이모 댁과 가까운 이웃에서 그들의 삶을 근본에서부터 흔들어놓는 농약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그 사용을 줄이거나 끊어버렸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모두 ‘지독하게 운이 없었던 일’이나 ‘사주팔자 탓
찬반 여부를 떠나 1960년대 월남 파병에서부터 최근의 아프가니스탄·이라크 파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미국의 요청을 받아 그것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월남 파병에 비해 최근의 반대 목소리가 아주 넓어지고 커진 것은 파병의 배후인 미국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변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 책의 저자도 조선시대 중국[明·淸]의 파병 요구, 그에 대한 조선 지배 엘리트들의 대응과 그 이념적 배경을 분석·해석하면서 현재의 한미관계를 자주 언급하였지만, 책을 읽는 내내 내 머리 속에서도 ‘조선시대의 명·청=현재의 미국’, ‘조선 지배엘리트의 모화(慕華)주의 = 오늘날의 숭미(崇美)주의’라는 등식이 계속 맴돌았다. 이점에 있어서는 다른 독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선
‘종교계 사립학교 안에서 당연한 듯이 억압당하고 있던 학생들의 종교와 신앙의 자유’를 주장하다 퇴학처분까지 받은 한 고등학생이 제기한 사건(?)이 6년 만에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았는데, 앞으로 이 일은 우리나라의 종교와 신앙 자유의 역사에서 기념이 될 것이다. 서양의 고전고대(classical antiquity)에는 비교적 사상의 자유가 확립되어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어가기도 하였지만 무오류(無誤謬)를 강제하는 성서가 없었으므로 “그 누구도 ‘천국’같은 것을 받아들이거나 무오류를 주장하는 권위 앞에 지성을 굴복시키도록 요구받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 공인 이래로 “이성이 속박되고 사상이 노예화되며 지식이 전혀 진보하지 못하였다.” 그들이 금지된 신앙이었을 적에는 관용을 주장했지만
일본 사이타마현 생활클럽은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커피 등을 제외한 모든 먹을거리 상품을 국산으로만 만든다.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상생을 특별하게 여기며, “지역의 생산자가 있어야 소비자도 있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이 책의 필자는 “일본의 생활협동조합은 공동구매를 넘어서 세상을 바꾸는 중이다. 만드는 손과 먹는 손이 맞잡으니 세상이 바뀌고 있다”고 하는데, 이 원칙은 세상 어디든 적용될 것이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정부와 국민·종교 지도자와 재가 신도가 손을 맞잡으면 세상이 바뀌는 정도가 훨씬 달라질 것이다. 먹을거리를 바르게 해결하려는 몸부림은 이제 세계 곳곳의 도시인들에게 ‘텃밭’ 만들기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도시 주변의 자투리 공간을 활용하거나 집안 정원의 잔디를 거두어내고 텃밭으로
현대 중국을 탄생시킨 두 주역인 마오쩌둥(毛澤東)과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출신 배경과 성격이 크게 다른 사람들이다. 크게 다른 이 둘이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미국의 지원을 받는 막강한 국민당 군대를 물리치고 전 중국을 통일하여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하였는데, 이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문화대혁명 기간을 비롯해서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일어날 가능성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교묘하게 조절되어 큰 충돌을 피하였다. 아마 마오(毛)쪽보다는 저우(周)쪽의 인내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그래서 이 책의 번역본에 ‘황제가 된 마오쩌둥, 재상의 자리가 족했던 저우언라이’라는 부제를 붙인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이 두 사람의 일생은 ‘최고 권력자와 제2인자 관계’의 가장 완벽한 모범사례
이 책의 첫줄은 “쓰고 싶어서 쓴 책이 아니고,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었던 책”이라는 변명(?)으로 시작한다. 평생을 기독교인으로 살아온 저자가 이제 ‘교회답지 못한 교회’가 돼버린 한국 교회의 잘잘못을 속속들이 파헤친다. 이런 일은 자칫 잘못하면 ‘사탄’이나 ‘이단’으로 몰려서 사회적 생명이 끝날 수도 있기 때문에, “특별히 강한 심장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다”며 기독교 내부의 무서운 공격성을 고백한다. 저자가 보기에 한국의 목사들은 대부분 예수님의 말씀과 길을 전하는 사도가 아니라 하나님과 일반 신도 사이의 브로커가 되었고, 종교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가 일으킨 기업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고 자녀들에게 물려주려고 하는 기업가에 가깝다. 그래서 예수님은 “더욱 낮아지라”고 하였지만 오늘
계족산 금정사 입구. 금정사는 계족산 최고봉인 천주봉 해발 3240m에 위치한다. 계족산(鷄足山) 축성사(祝聖寺) 아침 공양시간은 7시 30분이다. 오늘은 아침을 먹자마자 계족산 정상을 등반해야 한다. 계족산의 최고 봉우리에 위치한 가섭전사와 금정사 참배에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모르니 일찍 출발하기로 했다. 허운대사가 운남성(雲南省) 계족산에 처음 온 목적이 가섭전의 가섭존자를 친견코자 했던 것이니 힘들어도 꼭 가야할 일이다. 산길을 걸으면서 스님이 만년에 불사했던 사찰들을 떠올렸다. 허운 스님(1840~1959)이 19세에 출가했던 복건성(福建省) 용천사(涌泉寺)는 1920년대 군벌할거로 인해 절이 완전히 타락했다. 당시 양반 자제들이 군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도첩을 사
세상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일까? 이 책을 쓴 사이토 다카시는 세계 역사를 움직여온 것은 ‘인간의 감정’이 만들어낸 ‘욕망·모더니즘[근대]·제국주의·몬스터[자본주의·사회주의·파시즘]와 종교’, 이 다섯 가지라고 본다. 그런데 나머지 네 가지를 움직이는 주요 원인이 바로 무한한 인간의 ‘욕망’이니, 실상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욕망 하나라고 해도 무방하다.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라는 유명한 책을 통해 ‘자본주의 발달과 개신교’가 관계가 있다는 정도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커피-근대-제국주의-자본주의-개신교’가 결코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본래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 커피가 유행하게 되는 데에 개신교가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는 1945년 전쟁이 끝나고 귀국하는 김범우 등에게 미군들이 DDT를 마구 퍼붓던 장면이 잘 묘사되어 있다.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이지만, 이 DDT는 한 때 인류를 질병과 해충에서 구해준 ‘구세주’와도 같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제 공식적으로 사용이 금지되고 그보다 더 효과가 뛰어난 다른 살충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도 이 DDT가 널리 쓰였다. 맨 처음 DDT를 개발한 스위스의 뮐러는 ‘DDT 개발을 통해 전쟁 기간과 이후에 많은 사람들을 살려낸 공로’를 인정받아 1948년에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그의 노벨상 수상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반응을 받을 수 있을 만큼 DDT의 공은 엄청났다. 말라리아 발생이 거의 1만분의 1로 줄어들었고, 세계보건기구는
우리에게 아이티는 낯설지 않다. 최근 일어난 지진으로 1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곳이고, 지독한 가난 때문에 온 국민이 고통을 겪고 있어서 ‘사람 살 곳이 못되는 땅’이라는 느낌이 널리 퍼져있다.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의 후예들이 식민제국 프랑스에 맞서 싸워 중남미 최초의 독립국가를 건설한 영광의 역사를 가진 곳이지만, 아이티는 독립한 지 200년이 지난 지금도 식민의 어두운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음하고 있다. 국민 가운데 단 15%가 프랑스어를 말할 수 있는데도, 200년 동안 모든 정부 업무가 프랑스 말로 집행되고 있어 나머지 85%의 국민들을 소외시킨다. 가톨릭 사제 출신인 아리스티드는 네 차례나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번번이 쿠데타를 만나 임기를 마치지 못해 총 집권기간은 5년 8개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