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심불이(信心不二)요 불이신심(不二信心)이니, 믿는 마음은 둘이 아니요 둘 아님이 믿는 마음이니라.”道란 말로 설명하면 할수록멀어지기 마련…언어의 길이끊어지니 ‘임제 할’ 나온 것부처님께서는 진리에 대해“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도그대로 있었고 깨달은 후에도억만년 후에도 그대로 존재”두손 모아 합장하고 들어야 할 말입니다. 우선 믿는 마음 즉, 믿음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신(神)을 믿는다고 하는 믿음은 나(我)와 신을 둘로 보는 믿음입니다. 믿는 마음을 내는 나(我)가 있고 믿어야하는 신(神)이 따로
“약불여차(若不如此)인덴 불필수수(不必須守)니라, 만약 이 같지 않는다면 지켜선 안되느니라.”만약 우주나 자연에게도있다·없다·좋다·싫다 등분별 망상이 있었다면 인간은 지구에서 추방됐을 것부처님 가르침도 이와같아마음이라는 불성이 없다면번뇌가 나올 수가 없으며번뇌가 없다면 불성도 없어이 구절에서 지킬 게 있다면 “머물러 있다”는 말인데 머물 수 있다면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지키고 지키지 않고 그렇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킬 수 있거나 머물러 있을 수 있는 독립성이 있다면 이미 도(道)가 아니고 모양이 있는
“극소동대(極小同大)하야 망절경계(忘絶境界)하고, 지극히 작은 것이 큰 것과 같으니 상대적인 경계가 모두 끊어진다.”상대적인 것이 사라지면 큰 것과 작은 것에 대한 차별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작은 방이니 큰 방이니 하는 차이가 나는 것은 순전히 벽하나 때문에 그렇습니다. 벽 하나만 허물면 큰방이다, 작은 방이다 하는 이름 자체가 없게 됩니다. 벽이란 본래부터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서 잠깐 동안 설치해 놓은 가설물일 뿐입니다. 그렇게 볼 때 ‘벽’이란 우리들 생각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
“종비촉연(宗非促延)이니 일념만년(一念萬年)이요, 종취(宗趣)란 시간을 초월한 자리이니 한 생각이 만년이요.”공간이라는 말 자체는 성립될 수 없는 말습관처럼 타성에 젖어 공간이라고 하는 것 텅빈 허공엔 틈 없어이쪽이니 저쪽이니 하는 분별의 말은 우리가 속고 있다는 의미일 뿐한 생각에 삼천대천세계모두 존재한다는게 진리태양광명 그 자체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아침이나 저녁이 없다는 말입니다. 항상 광명일뿐입니다. 태양광명 그 자체를 보지 않고 그림자인 지구의 움직임을 보는 까닭에 그 그림자가 시간이 되는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근
“요급상응(要急相應)하면 유언불이(唯言不二)로다, 재빨리 상응코자 하거든 둘 아님을 말할 뿐이로다.”“재빨리 상응한다”는 말은 몰록 “바로 본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바로 본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내 스스로 내 자신을 버려두고 번뇌 망상이라는 도둑을 따라 다니느라 그 얼마나 많은 세월, 생사윤회를 하였습니까? 생사윤회의 길을 선택하는 길도 나요,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나는 대자유의 길을 선택하는 것도 바로 나입니다. 그러한 나를 운전하는 이가 어느 쪽으로 운전하고 있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그 말은 오늘 이 시간 나는 어떤
“허명자조(虛明自照)하야 불로심력(不勞心力)이라, 비고 밝아 스스로 비추나니 애써 마음 쓸 일이 아니로다.”참으로 소중한 말입니다. 텅 비면 밝게 마련이고 밝으면 스스로 비추고 있게 마련입니다. 밝음과 비춤은 둘이 아닙니다. 텅 비게 되면 아무것도 없는 허무(虛無)로 생각하는 이도 있을 수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텅 비고 밝다는 말은 번뇌망상 즉, 미운마음이나 원망하는 마음 그러한 잡스러운 마음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요, 바로 공(空)이라는 말입니다. 공(空)이라는 말은 나의 본래의 모습입니다. 나의 본래 마음에서 보면 이 세상
“계심평등(契心平等)하야 소작구식(所作俱息)이로다, 마음에 평등한데 계합(契合)하면 짓고 짓는 바가 모두 다 쉬리라.”그렇습니다. 불평등한 것은 평등하게 할 수 있지만 본래 평등한 것을 다시 평등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앉아있는 사람에게 다시 앉으라고 억지를 쓰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니까요. 그러하기에 선가(禪家)에서는 마음 닦아서 도를 깨닫는다는 것도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이미 완전한 부처인데 다시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한다는 것이 머리 위에 머리를 하나 더 만들려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본
“지동무동(止動無動)이요 동지무지(動止無止)니, 그치면서 움직이니 움직임이 없고 움직이면서 그치니 그침이 없나니.” 결코 쉬운 말이 아닙니다. 그침과 움직임, 밝음과 어두움, 옳고 그름, 이러한 일들을 우리는 상대성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심명’에서 말하는 이러한 세계는 양변(兩邊)을 부정하면서 긍정하여 원융무애(圓融無礙)하게 보고 있습니다. 바로 중도(中道)를 말하는 것이지요. 성철 큰스님께서 ‘신심명’을 강의하실 때 많이 강조하신 바로 그 내용입니다. 그치면서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면서 그침은 쌍조(雙照)를 보이
“일여체현(一如體玄)하여 올이망연(兀爾忘緣)이라.” 한결같음은 본체가 현묘(玄妙)하여 올연히 인연을 잊는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여(一如) 즉 ‘한결같음’이란 ‘신심명’ 처음 시작할 때 “지도(至道)는 무난(無難)이라 유혐간택(唯嫌揀擇)이니” 할 때 그 간택심이 끊어진 자리를 말함입니다. 그러니 현묘하고 현묘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일체만법이 “한결 같다” 함은 근본자리 즉 말길이 끊어진 자리를 표현하는 말이거든요. 그래서 도(道)라고도 하고 여여(如如)라고도 하며 다른 종교에서는 신(神)이라고도 하고 참선에서는
“득실시비(得失是非)를 일시방각(一時放却)하라,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을 일시에 놓아버려라.”무소의 소가 사자소리를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니나무로 된 사람이 꽃이나새를 보는 것과 같음이라목인은 본래 무정물이니새들이 어찌 두려워하랴마음이 항상 이와 같다면보리도를 이루지 못할까마음에 분별이 없으면온갖 법은 늘 한결같아 우리가 얻었다고 좋아할 때도 잃었다고 슬퍼할 때도 우리 코를 통해서 들어오는 공기는 그대로입니다. 우리 눈으로 보는 산하대지도 그대로 그 모습입니다. 조금만 더 큰 안목(眼目)으로 보면 얻었다느니 잃었다느니 하는 그 말은 왼
“미생적란(迷生寂亂)이요 오무호오(悟無好惡)이니라”, “미혹(迷惑)하면 어지러움과 고요함이 생기고 깨달으면 좋음과 미움이 없거니”라고 하셨습니다. 미(迷)했다는 말은 깨달음에 미(迷)했다는 말입니다. 미(迷)한 게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겁니다. 눈을 뜨지 못하면 캄캄할 수밖에 없고 눈을 뜨면 환하게 마련입니다. 눈만 뜨면 어두움 즉, 미(迷)함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했다면 이미 양변(兩邊)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미(迷)함만 없는 게 아니라 깨달음도 없을 때 바
“지자무위(智者無爲)어늘 우인자박(愚人自縛)이로다, 지혜로운 자는 함이 없거늘 어리석은 사람은 스스로 얽매이도다.” 지혜로운 이는 생사가 없는 대자유의 삶을 사는데 어리석은 이는 스스로를 생사윤회에 구속하는 삶을 산다는 말씀인데 여기에서 말하는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이는 차이가 없습니다. 한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무위(無爲)의 삶을 사는 사람이면 지혜로운 이, 바로 부처이고 스스로 구속당하며 살면 어리석은 이, 즉 중생이라는 말이니까요. 바로 보면 부처와 중생의 차이는 없다는 겁니다. 즉 지자(智者)와 우인(愚人)의 차이는 한
“불호노신(不好勞神)커든 하용소친(何用疎親)가”, 정신을 괴롭힘이 좋지 않거늘 어찌 성기고 친함을 쓸 것인가, 친하고 멀리함이 있어서 정신을 괴롭힌다는 이 말은 평등성인 우리 본마음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동안 자기 스스로 정신을 괴롭힙니다. 거의 혹사시키는 정도입니다. 몸은 피곤하면 쉬어주기도 하고 아프면 치료받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 정신은 몸이 쉬는 휴식시간에도 계속 괴롭힘을 당합니다. 그런데 정신은 다른 사람이 괴롭힐 수가 없는 겁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이 괴롭힐 수가 있는 것이지요.
“방지자연(放之自然)이니 체무거주(體無去住)라, 놓아버리면 자연히 본래로 되어 본체는 가거나 머무름이 없도다.”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자연(自然)이라고 이름 지은 ‘자연’은 이미 자연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만이 아니고 일체 이름 있는 모든 것은 인간들의 생각으로 포장한 명사(名詞)일뿐입니다. 나무 한그루만 보더라도 참나무니, 소나무니 자신들 스스로 이름을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나무들이 인간들에게 작명을 부탁한 일도 없이 사람들 임의대로 그렇게 이름 지어 놓은 것입니
“대도(大道)는 체관(體寬)하야 무이무난(無易無難)이어늘, 큰 도(道)는 본체가 넓어서 쉬움도 없고 어려움도 없거늘”, 이 말씀은 대도(大道) 즉 큰 도(道)는 본체가 너무나 넓고 넓어서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넓고 넓다고 하니 넓은 공간이 있는 걸로 생각하는데 그런 것은 아닙니다. 가없다는 말이요, 공(空)이라는 얘기입니다. 지금까지 많이 강조해온 얘기입니다만 대도는 우리들 각자 내 자신의 참모습입니다. 연기공성(緣起空性)으로서 바로 내 모습이니까요. 그러나 육신(肉身)의 눈인 육안(肉眼)으로 볼 수 있는 세계는
옳다는 생각없는 것이 진참회 내 입장에서는 내가 옳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반대일 뿐 옳고 그름 논리로 인간세상은 너무도 많은 전쟁 되풀이 했고지금도 여전히 싸우고 있는 중전쟁으로 소비되는 에너지가 너무나도 많아 안타까울 뿐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내 입장에선 남쪽에 있지만 그 사람 입장에선 북쪽일 뿐 남쪽도 옳고 북쪽도 옳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름다울 뿐 “능수경멸(能隨境滅)하고 경축능침(境逐能沈)하야, 경유능경(境由能境)이요 능유경능(能由境能)이니”“주관(主觀)은 객관(客觀)을 따라 소멸하고, 객관은 주관을 따라 잠겨서 객관은
“이견부주(二見不住)하야 신막추심(愼莫追尋)하라.”두 가지 견해(見解)에 머물지 말고 삼가 쫓아가지 말라, 두 견해에 머물지 말라는 말은 두 견해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얘기와 같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란 마치 장벽이 없는 허공과 같습니다. 그래서 달마대사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고 하셨거든요. 확연하여 성스러움이니 성스럽지 못함이니 하는 경계가 없다는 얘기입니다. 물론 이러한 말의 낙처(落處)는 말길이 끊어진 자리요, 마음길이 멸(滅)한 자리입니다.그런데 우리는 벌써 한 생각 일으켜서 감정을 따라다니느라 확연한 그 마음을 스
“수유반조(須臾返照)하면 승각전공(勝脚前空)이라.”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보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사실 진리에서는 잠깐과 영원을 둘로 보지 않습니다. 잠깐사이 돌이켜 비춰봤다는 얘기는 “눈을 뜨면 즉, 마음의 눈을 뜨면 앞의 공(空)함보다 뛰어남이라” 이런 말입니다. 우리는 영원이라고 하면 긴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잠깐은 매우 짧은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이라는 실체가 있다면 그렇게 볼 수 있겠지만 시간은 고정된 실체가 없습니다. 모두가 우리 생각놀음에 속고 있는 겁니다. 길다, 짧다고 하
“견유몰유(遣有沒有)요, 종공배공(從空背空)이라”하는 대목으로 들어갑니다. “있음을 버리면 있음에 빠지고 공(空)함을 따르면 공함을 등지느니라”하는 말씀입니다. 있음의 세계 즉, 세상 삶이 어렵다고 세상을 벗어나고자 하면 벗어나겠다는 그 마음이 더큰 문제가 되고 공적함을 추구하면 구하는 그 마음이 이미 공을 그르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이 육신이 있는 한 결코 세상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내 몸이 곧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내 몸이 곧 세상이라면 어디로 벗어난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세상을 벗어나려는 목적이 내 몸 하
“일종평회(一種平懷)하면 민연자진(泯然自盡)”이라, 한 가지를 바로 지니면 사라져 저절로 다하리라고 하니 그 한 가지라는 게 뭔가 있는 걸로 압니다. 특별히 깨달은 세계가 어떤 세계일까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거죠.망상이 일어나든 말든말려들지 말라는 의미망상은 그림자에 불과그냥 한발 한발 대지위를 걷듯이 정진해야대지 위 걸으면서도흙이 검다, 붉다하며끝없이 분별한다면결코 나아갈 수 없어그만큼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중도(中道)라고 누누이 말을 하는데도 몰록 무심(無心)으로 들어가지 못합니다. 취하고 버리는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