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도봉구와 경기도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있는 도봉산은 예로부터 자운봉, 만장봉 등 우뚝 솟은 백색 화강암 봉우리와 기암, 암벽이 어우러진 장관 때문에 인적이 끊이지 않는 명산이다. 특히 만장봉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는 도봉계곡 옆(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길 90)에는 유서 깊은 조선시대 서원터가 하나 남아있는데, 조선초기와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 조광조와 송시열을 제사지냈던 도봉서원터(서울시기념물)의 자취이다.도봉서원은 수려한 영국동계곡(도봉계곡)을 즐겨 찾았던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
‘삼국유사’에는 백제 성왕5년(대통원년, 527)에 양나라의 무제를 위하여 웅천주에 대통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 무제는 불심천자 혹은 황제보살로 칭송 받았던 중국 남조 양나라의 황제였다. 성왕 역시 이러한 양 무제처럼 불국토 건설을 염원하였던 것 같다.성왕은 무령왕의 아들로서 역사적으로는 사비천도를 단행한 인물로 유명하다. 천도를 준비하면서 공주지역에 대통사 및 흥륜사를 창건하였고, 인도에서 5년 만에 귀국한 겸익 스님에게는 흥륜사에서 불경을 번역하게 하였다. 흥륜사는 일본 기록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 국내
최근 언론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7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기사가 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국보 제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을 국립진주박물관이 전시하기 위해 터파기 공사를 시작해 오는 30일께 복원을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범학리 삼층석탑은 9세기 무렵 조성된 후 조선시대까지 사찰과 함께 경호강이 바라보이는 둔철산 자락에 자리해 있었다. 원 자리에 허물어져 있던 석탑을 일본인 골동품상이 사들여 산청을 떠나게 되는데, 그동안의 사정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있
1919년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 1882~1950)는 경주 천관사지 인근을 지나가고 있었다. 오가와는 1916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회 일원으로 한국에 건너와 1944년 귀국할 때까지 많은 유적을 조사했던 인물인데, 마침 천관사지를 지날 때 사람들이 탑신석을 깨트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오가와는 일단 이들을 저지하고 이장과 경찰관에게 유적의 보호를 의뢰했다고 한다. 오가와 케이키치의 1919년도 천관사지 방문은 조사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석탑의 피해상황 정도를 파악했던 것 같다. 이후 본격적인 조사는 1923년 6월에
팔공산 갓바위에 기도하러 가는 신도들 사이에는 바위가 많은 곳이 지기가 강해서 소위 ‘기도발’이 잘 받는다는 소문이 있다. 해남 미황사가 있는 달마산, 봉화 청량사가 있는 청량산 등은 거대한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산인데, 특히 대구광역시 달성군에 있는 비슬산은 거대한 암괴류가 형성되어 있고 지형경관이 수려하기 때문에 2003년 12월13일에 천연기념물 제435호로 지정된 곳이다. 암괴류란 암석 덩어리들이 집단적으로 흘러내리면서 쌓인 것을 말하는데, 비슬산 암괴류는 중생대 백악기 화강암 거석들로 이루어졌으며, 동일한 사면경사를 나타내는
광주광역시 북구 임동 92번지 일대는 현재 주택가로 개발되어 있어서 사찰이 있던 곳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지만 원래 십신사라는 절이 있던 곳이다. 이곳이 십신사의 터로 알려진 것은 현재 광주시립민속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세워져 있는 십신사지석비(광주광역시 유형문화제 제3호)와 십신사지석불(광주광역시 유형문화제 제2호)이 처음 보고되었을 당시 위치가 광주농업고등학교(임동 92번지)였기 때문이다. 광주농고가 1975년에 이전하면서 그 부지가 택지로 불하되었고 현재의 임동 92번지 일대는 주택가가 된 것이다. 한편 석비와 석불을 이전할 당시
충청남도 부여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이 있다. 무량사이다. 불교에서 무량(無量)은 시간·공간·수량·능력 등이 인간의 지혜나 지식을 초월해서 한이 없는 것을 말한다.무량사의 자세한 연혁을 전하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일제강점기 이후 작성된 각종 중수기 등에는 통일신라 때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확인할 수 없고, 창건시기에 대해서도 문무왕 때부터 헌강왕 때까지 약 200여 년의 시차가 있기는 하다. 이후 무량사는 헌강왕 때 무염국사(無染國師)에 의해, 또 고려 고종 때 각각 중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자 지정학적으로는 정치, 군사, 교통의 요충지여서 고대로부터 대중국 교류의 중심지였다. 또한 잘 알려져 있듯이 고려~조선시대에는 임시 수도로서 역할을 하였고 수도방어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지리적 환경 때문에 강화도에는 많은 문화유적이 분포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조사된 것만 500여 곳이 넘는다.강화도에는 면적에 비해 많은 사찰이 들어서 있다. 강화도의 불교유적은 삼국시대부터 기원을 찾을 수 있지만, 활발하게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왕실이 몽골의 침입을 피해 강화도로 옮겨온
사적 제162호 북한산성에 대한 문화재청 누리집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백제가 수도를 하남 위례성으로 정했을 때 도성을 지키던 북방의 성이다.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세워진 곳으로, 11세기 초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현종이 고려 태조의 관을 이곳으로 옮겨오기도 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고, 우왕 13년(1387)에 성을 다시 고치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도성 외곽을 고쳐짓자는 의견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 왕명으로 토성을 석성으로 고쳐지었다.(중략) 성내에는 중흥사를
경주에는 현재 두 곳의 황룡사지가 알려져 있다. 한 곳은 신라 왕경지역 구황동에 있는 너무나도 유명한 신라시대 황룡사터이고, 또 다른 하나는 경주시 황룡동 산 170-1번지 일대에 위치하고 있는 절터이다. 황룡동은 해발 400m의 백두산 줄기 추령의 서쪽에 위치하며 경주시의 동중에서 가장 험준에 산골에 위치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경주에서 감포로 가는 4번 지방국도를 따라 덕동댐을 지나면 황룡동 사시목(현 황룡휴게소)에 이른다. 여기서 좌회전하면 속칭 ‘절골’이라고 하는 계곡이 이어지는데 두 갈래 길에서 왼쪽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
처음 석굴암에 들어가 본존불 앞에 섰을 때의 느낌을 잊지 못한다. 거대한 부처님 앞에서 한없이 작고 힘없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의 초라함이었다. 미소가 사라진 근엄한 표정과 날렵하면서도 당당한 신체는 충분히 주눅 들게 했다. 하지만 이런 느낌이 신비한 종교성과 절대자의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를 압도한 것은 전체 높이 5m에 달하는 크기였던 것 같다. 1300여 년 제자리를 지켜온 거대한 부처님 앞에서 압도당한 것이다. 월등하게 뛰어난 힘이나 능력 또는 크기 앞에서는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하고 한 편으론 공경하는 마음이 들기도
홍성군(洪城郡)은 충청남도의 북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북동쪽으로 예산군(禮山郡), 남동쪽에는 청양군(靑陽郡), 북서쪽에는 서산시(瑞山市), 남서쪽으로는 보령시(保寧市)가 접해있고, 서쪽은 서해와 접하고 있다.홍성지역의 지리 및 지형적인 특징은 높은 산이 적어 평야가 많고 비옥한 토양을 갖춘 농경지가 발달해 있어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530)에서 “홍주는 호서의 거읍(巨邑)이다. 그 땅이 기름지고 넓으며, 그 백성이 번성하고 많다”고 하였을 정도이다. 즉, 충남의 서해안 중앙에 위치한 홍성군은 변방이라기보다는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