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깨달음은 도(다르마)의 실증(實證)이며 이를 종지로 한 것이 중국선종이다. 선종사는 그대로 돈오의 역사이다. 보리달마가 서천축에서 중국으로 온 이래 조계혜능을 비롯한 남종의 선장들은 불교학문과 수행보다도 실제로 증도를 제일로 삼았다. 그의 수많은 제자들 중 혜능의 혁명적 생명을 더욱 선명히 계승한 것이 영가현각이다. 현각의 증도가는 이같은 돈오의 세계를 보이면서 혜능선의 엣센스를 노래한다. 그가 혜능을 참배한 것은 단 한번뿐이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직절의 세계에서 피어난 불꽃이었다. 현각이 참배 후, 바로 되돌아 나오려는 것을 혜능은 강하게 붙잡는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일까? 증도가 곳곳에 그 해답이 스며 있다. 그의 참선은 이 노래와 표리를 이룬다. 도에 살아가는 사
범주 스님의 달마도 부사의한 해탈의 힘, 이는 바로 나의 선지식이다. 네 가지 공양도 감히 수고롭다고 사양할까. 만량의 황금마저 녹일 수 있다. 분골쇄신해도 다 갚지 못하며 이 한마디야말로 확실히 백억 법문보다 뛰어나다. 해탈의 힘이야말로 ‘반야의 법문’을 가르쳐 준 나의 선지식이 된다고 하는 것. 이러한 선지식에게는 어떠한 공양도 아까워 할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더구나 일 만량의 황금을 사용해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임제록』에도 “이같이 견득(見得)하면 참된 출가이다. 나날이 만량의 황금을 받을 만하다”라고. 더구나 분골쇄신해도 못다 갚는다는 뜻. 이 한마디란 ‘본래자기’, ‘심성본청정인 자기’라는 반야법문을 뜻한다. 이 한마디는 불도의 제일이라는 것. 가르침가운데
송담의 '달마도' 종성(種性)이 나빠 잘못 분별해 여래의 원돈제에 이르지 못한다. 이승(二乘)은 정진해도 도심이 없고 외도는 총명해도 지혜가 없다. 종성은 선천적인 성품이다. 종성이 올바르지 않아 잘못 분별에 떨어져 버려 여래의 원돈의 계를 모르는 것이다. 원돈계는 ‘달마일심계’이며 단경 이래 ‘불성계’이다. 이승은 ‘자신만이 깨달으면 된다’고 하여 도심 즉 보리심(대비심)이 없고 외도는, 분별지는 예리할지 몰라도 반야의 ‘직관지(直觀智)’ 즉 ‘깨달음’이 없다는 것이다. 역시 우치하고 역시 무지하구나. 빈주먹 손가락 끝에 무엇인가 있는 것처럼 본다. 손가락을 달로 알아 헛되이 노력하고 감각(根)과 대상(境)과 법계(法)에서 허튼 짓을 한다. 외도와 이승의 우매함을 말한다. 아이들은 어
원담 스님의 노엽달마도. 전단숲에는 잡나무가 없고 울창하고 깊숙한 곳에 사자만이 살고 있다. 고요하고 한적한 숲에서 홀로 노니니 짐승과 새들은 모두 멀리 달아난다. 향기로운 전단숲에는 잡목이 없다. 전단은 여락(與樂)이라고 하며, 전단림은 발고여락(拔苦與樂)하는 수행자들의 모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곳 숲속에 사자가 홀로 유유자적하게 살고 있으면 이리나 여우는 멀리 도망간다. 즉 도인이 고요한 숲에서 정진하고 있으면 소인배들은 모두 흩어진다는 것이다. 사자는 일족의 무리들이 따르고 세 살이 되면 바로 포효한다. 이리가 법왕을 닮으려 한다면 백년의 요괴도 헛되이 입을 열려고 할 것이다. 사자의 일갈(一喝)은 선종에서는 선사의 법문이며 화두이다. 사자가 세 살이 되어 포효한다는 것은 선불
석옹 철유의 수묵자화상 “법당을 건립하고 종지를 세운 것, 분명 불칙을 이은 조계 그 분이다. 제일 가섭이 처음으로 등불을 전하여 이십팔대, 서천의 기록이다.” 석존의 정법안장은 마하가섭에게 전해지고 28대 서천의 전등은 조계 혜능으로 이어졌다는 선맥을 밝힌다. 법당을 건립한다는 말은 『무문관』 22칙에, 종지를 세운다는 것은 『전등록』 달마장에 있다. 가섭을 제1조로 한 것은 『육조단경』, 『보림전』에 비롯되는 설이다. “강과 바다를 건너 이 땅에 들어선 보리달마를 초조로 한다. 육대의 전의는 천하에 알려졌고 뒷사람의 득도, 수를 헤아릴 수 없으리라.” 달마가 인도를 떠나 중국 광주에 도착, 중국선종의 초조가 된다. 그 뒤 육대조사에게 가사가 전수됨이 세상에 알려지고, 달마가 예언한대
“비방도 할 수 없고 찬탄도 할 수 없네. 본체는 허공과 같아 한계가 없다. 여기 이 처소를 떠나지 않고 언제나 꽉차있지만 (이를) 구하려고 하면 그대는 볼 수가 없음을 안다.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네. 얻을 수도 없는 가운데 다만 얻을 뿐이다.” 앞 절의 의미를 연계하여 노래한다. 선자와 교학자의 진리를 깨닫는 것에 대한 견해차가 보인다. 교학자는 법수(法數)를 중요시 하지만 선자는 그러한 법수에 관심이 없는 것이다. 다만 논리와 차제(次第)를 넘어선 ‘돈오’가 중요할 뿐이다. 이를 현각은 ‘영각(靈覺)’이라고 했다. 오직 불성의 달마가 현현(顯現)함이 중대할 뿐, 법수에 따르거나 그 틀에 끌려 성제(聖諦)를 지해(知解)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불성은 ‘비방과 찬탄도 할 수
“대장부, 지혜의 칼을 잡으니 반야의 칼날, 금강의 불꽃이다. 비단 외도의 마음을 꺾는 것만이 아니라 일찍이 천마의 간담도 떨어트렸다.” 노수현의 포대상. ‘대장부’는 부처님의 또 다른 이름이지만 여기서는 ‘한도인’ 즉 진인이다. ‘지혜의 칼’은 유마경에 ‘지혜의 칼로서 번뇌를 부순다’라고 하였지만 여기서는 ‘반야지견’의 칼이다. 이 칼끝, 금강명왕의 불꽃이 튀는 것이다. 이 칼날의 섬광은 외도의 마음을 부술 뿐만이 아니라 천마(天魔)의 간담도 써늘하게 한다. 외도는 자기 밖에서 부처를 찾는 무리이며 불도가 아니다. “법의 우레가 진동하고 법고를 치니 자비의 구름이 퍼지고 감로가 뿌려진다. 거대한 코끼리 힘차게 밟고 밟아 한없이 윤택하니, 삼승(三乘) 오성(五性)이 모두 깨친다.” 불법
“참됨도 구하지 않고 거짓됨도 끊지 않으니, 두 법이 공하여 무상(無相)함을 분명 알았다. 무상하여 공도 불공(不空)도 없어, 바로 이것이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다.” 참됨도 거짓됨도 구하지 않는다는 말은 증도가 첫머리에서도 밝힌 한도인의 사상이다. 절학(絶學)의 도인은 모든 존재가 공이고 무상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공, 비공에 관심이 없으며 상대적인 존재를 넘어선 세계를 ‘여래의 진실상’이라고 한 것이다. 진실상은 ‘본래면목’이며 ‘무상의 자기’다. “마음의 거울이 밝게 비춤에 걸림이 없어, 확연히 비추어 대천세계에 두루 하다. 삼라만상의 그림자 가운데 모습을 드러내니, 한 알의 빛이 뚜렷이 밝아 내외가 없다.” ‘여래의 진실상’을 마음의 거울에 비유한 노래다. 거울은 밝게 걸림 없
“깨달으면 바로 마친 것, 어떠한 노력도 필요치 않으나, 일체의 유위법(有爲法)은 같지 않다. 형상에 집착한 보시는 하늘에 태어나는 복이겠지만 마치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같다.” ‘본래의 자기’를 깨달았다고 하면 이것으로 마쳐진 것이다. 그러나 인과 연에 의해 만들어진 유위의 현상은 이 같지 않다는 것이다. 유위에 상대되는 무위는 인연의 조작을 넘어선 진여의 세계. 실체가 없는 현상에 집착한 보시는 생천(生天)의 복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석존도 방편교로서 생천을 설하셨지만 반야의 입장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유위에 집착한 보시행은 마치 하늘을 향해 화살을 쏘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현각은, 그대들은 반야에 의해 무상의 자기를 자각해야 한다고 했다. 무심, 무작(無作)의 행이야말로
“강과 바다를 돌아다니고 산천을 건너서 스승을 찾아 도를 구하고 참선을 했다. 조계의 길을 알고부터는 생사와 관계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다.” 현각자신의 구도행각을 말한다. 그리고 마침내 육조를 만나 개오(開悟)했음을 뜻한다. ‘참선’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쓰인 예가 이 노래부터다. 참선은 ‘스승에게 나아간다’, ‘선을 하다’는 의미. 현각은 참선한 끝에 조계의 육조를 상견하고 여래선을 깨달은 이후, 자신은 미혹된 생사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명료히 알게 된다. 여기서 생사는 ‘태어남과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혹한 인생’이다. 자신은 살고 있지만 산다는 그것을 모르는 미혹함이다. 그 미혹이라는 화두가 마침내 깨쳐진 것이다. 생과 사는 엄연히 있지만 생사를 떠나 열반(無生)이 있는 것이 아
“빈궁한 부처님의 제자, 입으로 가난하다고는 하지만 몸은 가난해도 도는 가난하지가 않다. 가난하여 몸은 언제나 누더기를 걸쳐도, 도를 얻은 즉 마음에 무가(無價)의 보배를 간직하고 있다.” ‘절학무인한도인’이 여기서는 ‘부처님의 가난한 제자(窮釋子)’다. 그는 가난하게 살지만 가난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값어치를 알 수 없는 여래장 즉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무가의 보배, 아무리 사용해도 다하지 않고 중생을 이롭게 할 때는 마지막까지 아끼지 않는다.” 불성의 작용은 광대무변하며 또한 중생에 대한 이타행은 끝이 없다는 것. 가난한 제자의 이 같은 빛남은, “삼신(三身)과 사지(四智)가 몸에 원만하고 여덟 가지 해탈과 여섯 가지 신통이 마음에 찍혀 있기 때문이다.” 도인은 법신, 보신
안중식의 대환희도 “사대를 놓아버려 붙잡지 말라, 적멸의 성품에서 먹고 마실 뿐이다. 현상은 무상하여 모든 것은 공한 것, 이대로가 여래의 대원각이다.” 유유자적한 수행자의 모습을 노래한다. 육신을 지탱하는 것은 사대 때문인데, 도인은 사대를 놓아버리고 적멸의 성품에서 삶을 살아간다. 그는 나, 나의 것에 걸림이 없다. 현상의 본질은 무아이며 적정하여 이를 ‘여래의 대원각’이라고 하였다. 원각의 적멸한 무심은 선의 본질이다. 어느 시인은 ‘내 앞에는 길이 없는데 내 뒤에 길이 생겼구나’라고 하였다. 자유인의 삶의 자취다. “결정의 말씀, 참된 수행자임을 나타내는 것. 알아듣지 못한 자가 있거든 납득이 될 때까지 물어라.” ‘결정의 말씀’은 『열반경』에서는 사자후라고 하였다. ‘모든 중생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배워야 할 것도 없고 할 일도 없어져 버린 한가한 도인을. (그는) 망상을 없애지 않고 진리를 구하는 일도 없다. 무명의 본래 성품이 그대로 불성이고 허깨비인 빈 몸이 그대로 법신이다.” ‘증도가’의 전체 내용이 바로 이 구절에 용해되어 있다. 수행자를 여기서는 도인으로 표명한다. ‘증도가’는 도인의 깨침에 대한 경계, 공부의 과정, 수행자의 정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삼학의 수행도 이제 끊어지고 해야 할 일도 없어져 버린 이 도인은 ‘자연’으로 돌아 간 것이다. 그는 망상과 진리에 대해 이제 관심이 없다. 그것은 무명의 본체가 불성이고 육신이 그대로 공신(空身)이며 법신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백장광록』에서 ‘부처는 무사인(無事人)이고 무구인(無求人)’이라고 한 것처럼
‘증도가’는 ‘신심명’과 함께 선종초기의 대표적인 운문작품이다. 8세기말, 황벽, 임제, 조주, 동산, 등 많은 선어록에 그 인용이 빈번함을 볼 수 있다. ‘증도가’를 ‘선문비요결’, ‘불성가’, ‘도성(道性)가’라고도 했는데 ‘증도가’라고 정해진 것은 『전등록』 이후 인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인도승에 의해 범어로 번역되어 ‘동방의 대승경’으로도 알려져 있다. ‘증도가’는 이름그대로 ‘증도의 노래’다 증도가 현성(現成)된 도인에 대한 노래이며 도인은 증도를 향한 길을 가르치기도 한다. 이 노래는 명확한 의미를 모르더라도 읽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다. 강의실에서 읽는 선전(禪典)가운데 증도가 만큼, 흡입력을 가지고 교수와 학생이 하나가 되어 읽는 선전은 없다. 이는 그만큼 단도직입
지난 세월 윤회의 업을 되돌아보면 몇 천겁을 두고 흑암지옥에 떨어지고 무간지옥에 들어가 갖가지 고통을 받았을 것인가. 불도를 구하고자 하여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고 오랜 겁을 생사에 빠져 깨닫지 못한 채 갖은 악업을 지은 것이 또 얼마나 될 것인가. 때때로 생각하면 모르는 새에 긴 한숨이 나오는데 어찌 방종하여 그전 같은 재앙을 다시 받겠는가. 그리고 누가 나에게 지금의 인생을 만나 만물의 영장이 되어 닦는 길을 잃지 않게 하였는고. 실로 눈먼 거북이 망망한 바다에서 구멍 뚫린 널빤지를 만남이고 겨자씨가 바늘 끝에 꽂힌 격이다. 그 다행함을 어찌 말로써 다할 수 있겠는가. 내가 지금 스스로 물러설 마음을 내거나 게으름을 부려 항상 뒤로 미루다가 잠깐 사이에 목숨을 잃고 지옥에라도 떨어져 갖은 고통을 받
깨달은 뒤 닦는 문 가운데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가진다는 뜻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자성의 선정과 지혜이고 둘째는 상을 따르는 선정과 지혜이다. 불꽃처럼 사나운 태양이 머리위로 지나가고 있다.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이다. 분명하게 지금 덥다고 괴로워하는 이것이 무엇인가. 더운 줄 아는 것을 바로 돌이켜 이 속으로 들어가면 일체의 시비가 끊어지고 더위가 본래 없는 청량한 세계이다. 이것을 마음, 불성, 본래면목, 한 물건, 화두라고 이름 하지만 스스로는 일체의 이름과 모양을 벗어나 있으며 선정과 지혜를 고루 갖추고 있는 원만한 성품이다. 또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는 연기의 법칙이며 공이고 일심중도의 세계이다. 조주스님은 이것을 무라고 바로 가리켜 보였으니
선정은 본체이며 지혜는 작용이다. 본체의 작용이기 때문에 지혜는 선정을 떠나지 않고 선정이 곧 지혜이므로 고요하면서 항상 알고 지혜가 곧 선정이므로 알면서 항상 고요하다. 육조 스님께서 말씀하신 마음이 어지럽지 않음이 자성의 선정이고 마음이 어리석지 않음이 자성의 지혜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제 먼 바다에서 만선의 기쁨을 안고 도착하는 배들은 저마다 마음의 등불을 치켜들고 항구는 어느덧 불야성을 이루었다. 법회를 마치고 서둘러 먼 길을 출발했으나 항구에 도착하니 섬으로 가는 마지막 배가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오랜만에 굳은 비 내리는 늦은 뱃길에 오르니 선상에서 바라보는 밤바다는 멀리 이국의 정취를 대하는 듯 본분 납자의 살림살이를 더 없이 조촐하게 하고 있다. 수행의 길이 수없이 많으나 결국에는 선
대혜종고 선사께서 말씀하시길 ‘가끔 영리한 사람들은 큰 힘을 들이지 않고 이 법을 깨치고서 쉽다는 생각을 내어 닦으려고 하지 않고 세월이 흐르다보면 예전 버릇에 빠져서 윤회를 면하지 못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한 번 깨쳤다고 하여 뒤에 닦는 일을 버려둘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깨친 뒤에도 늘 비추고 살펴서 갑자기 망념이 일어나면 아예 따라가지 말고 덜고 덜어 무위에 이르러야 비로소 구경의 자리이니 천하 선지식의 깨달은 뒤에 소먹이는 행이 바로 이것이다. 마음은 안개처럼 빈 하늘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온갖 번뇌망상을 일으킨다. 처음 발심하여 마음을 닦는 사람들은 아직 공부길을 모르기 때문에 생각생각 일어나는 번뇌를 끊는 것이 마치 돌로 풀을 누르는 것처럼 하고 몸을 조복 받는다고 하여 가지가지 고
깨달음에 들어가는 문은 많으나 그대에게 한 가지 문을 가리켜서 본원으로 돌아가게 하리니 그대가 까마귀 울고 까치 지저귀는 소리를 듣느냐? 예 듣습니다. 그럼 그대의 성품 가운데에도 많은 소리가 있음을 듣느냐. 이 속에 이르러서는 일체의 소리와 분별을 얻을 수 없습니다. 중생의 고통이 한량없어서 끝없이 생사에 유전하는 것은 소리로 인하여 마음에 덮임을 입어서 물들어 버린 때문이다. 세상은 온통 소리로 가득하고 허공에는 소리의 그물로 빈틈이 없다. 보통 범부들은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를 따라가서 분별을 하고 번뇌를 일으켜 고통을 당하지만 수행하는 사람은 일체의 소리를 들을 때 소리가 소리가 아니고 그 이름이 소리인 줄 알아서 소리의 성품이 본래 공함을 살펴서 소리를 따라가지 않고 듣는 성품을 곧바로
어떤 방편을 지어야 한생각 기틀을 돌이켜 문득 자성을 깨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대의 마음일 뿐 다시 무슨 방편을 지으리오. 만일 방편을 지어서 다시 앎을 구할진데 문득 얻지 못할 줄 알 것이니 다만 알지 못할 줄을 알면 이것이 곧 성품을 보는 것이다. 적멸의 바다에 보름달 떠오르니 천 개의 섬마다 달 하나씩 머금고 연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달빛을 따라 관음상 앞에 나섰더니 초여름 밤은 풀벌레 울음소리로 밝아오고 소리마다 영롱한 달그림자 마치 관음의 교향곡이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기의 천진한 성품은 보름달처럼 홀로 외로이 밝아 경계를 따라 나타나지 않는 곳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는 사람은 경계를 보면 곧 마음을 볼 뿐 달리 특별한 방편을 짓지 않는다. 며칠 전 장마 준비를 하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