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탈리반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바미얀석불.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안타깝게 떠오르는 불상이 하나 있다. 그건 내가 불심이 있다거나, 불교에 남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눈꼴사나운 국제정치가 어떻게 불상이라는 문화유산을 파괴시켜나가는 지를 똑똑히 보았던 탓이다. 바로 아프가니스탄의 바미얀(Bamiyan)석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돌이켜 보면, 1997년 9월 극단적인 이슬람논리-근본주의의 돌연변이라는 게 옳겠지만-로 무장한 탈리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할 때부터 바미얀 석불은 생존문제를 놓고 세계적인 관심거리로 떠올랐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당시 아프가니스탄을 취재하고 있던 내게도 바미얀석불은 중요한 사안이 되었다. 그러나 바미얀을 낀 중북부지역 전역에 전선이 형성되면서 기자들의
4000년전 유목 생활방식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 불교 영향 받은 것은 분명… 불교유적 단정 위험 “무엇을 볼 것인가?” 이 단순한 의문은 해묵은 역사 앞에 서면 가소로운 짓이 되고 만다. 바로, 모헨조다로(Mohenjo-Daro) 같은 곳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1980년대 말부터 몇 번 모헨조다로를 찾았던 나는, 때마다 그 황량한 모래밭에 앉아 알 수 없는 ‘아득함’을 느끼곤 했다. 그건 현대인과 단절된 세월만 소복이 쌓여있는, 하여 교통할 수 없는 답답함 같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한 번 두 번 모헨조다로를 찾으면서 나는 서서히 ‘무엇을 볼 것인가?’라는 화두로부터 해방되었다. 그냥 앉아서 또는 우두커니 서서 그 모헨조다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내가 흘러가는 역사 속
자와 중부 족자카르타에 위치한 프람바난 사원은 힌두교와 불교가 교차하던 9세기 무렵 산자야왕조에 의해 건립된 사원이다. 보코왕의 아들인 반둥 본도워소왕자가 이웃 라라 종그랑공주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자, 보코왕이 라라공주의 아버지를 공격해서 사로잡았다. 하여, 아버지를 구하고자 반둥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 라라공주는 대신 ‘하룻밤 사이에 절 1천개를 지어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자 반둥왕자는 묵상 끝에 마술을 부려 땅 속으로부터 마귀들을 불러내 순식간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999개 절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라라공주는 급히 하녀들을 깨워 쌀을 찧게 했고, 그 소리에 놀란 닭들이 울어대자 마귀들은 아침이 온 걸로 착각해서 땅 속으로 되돌아가버렸다.
진짜 '스리 파고다스'는 1983년 타이 정부에 의해 인공호수 속으로 사라지고 흰 페인트로 뒤덮인 가짜 탑이 진짜 행세를 하고 있다. 오늘은 ‘가짜 탑’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한다. 탑이면 탑이지, 무슨 보석도 아닌 걸 진짜 가짜 따진다며 좀 수상히 여기는 독자들도 있을 법한데, 아무튼 방콕에서 북서쪽으로 한 350km쯤 떨어진 버마 국경으로 가보자. 영토분쟁 터지자 댐 건설 이름 하여, 버마 사람들은 ‘파야톤주’라고도 하고 타이 사람들은 ‘프라 체디 삼 옹’이라고도 하는 국경 통과지점이 하나 있다. 이걸 우리말로 풀어보면 ‘탑이 셋인 고갯길’쯤 되는데, 오히려 현지인들이 부르는 지명보다는 영어인 스리 파고다즈 파스(Three Pagodas Pass)로 더 잘 알려져 온 곳이다. 수많은
‘식민주의’ ‘사회주의’ ‘불교’, 이 셋은 단어만 놓고 봐도 공존하기 힘든 거북한 관계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이 셋이 유네스코(UNESCO.유엔교육과학문화기구) 지휘감독 아래 ‘동침’하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철지난 이념타령이라고 타박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 셋의 관계는 본질적으로 어색한 구석이 많다. 서로 부정해 왔고, 서로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역사적 경험뿐만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서로가 지닌 ‘구원’을 떨쳐버렸다고 볼만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비록 정치 체제로써 사회주의가 지녔던 날카로운 각이 무뎌진 건 사실이라 하더라도,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은 수많은 사회주의자들에게 식민주의와 종교는 경계 대상임에 틀림없다. 반대쪽을 보자. 자유주의로 무장
앙코르와트라는 거대한 유적지에 들어서면 인간이 그 위대한 유적을 빚었다는 사실에 어지럼증이 느껴진다. ‘웅장하면 정교할 수 없고 정교하면 웅장할 수 없다.’ 이건 건축문화를 다뤄온 전문가들이 흔히 말해왔던 바다. ‘힘을 지닌 놈은 날카로운 발톱이 없다.’ 이건 짐승들을 연구해 온 전문가들이 해왔던 말이다. 이를테면 쌍극(雙極)이 한 몸에 어우러지기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고, 달리 보면 세상에 그런 완벽함이 없다는 뜻이 아닌가도 싶다. 이런 말들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왔던 나는 앙코르와트(Angkor Wat) 앞에서 건축의 논리도 자연의 이치도 모조리 흔들리고 말았다. 하늘을 가리는 거대한 건축물에 칼날로 빗어 놓은 예리함은 사람이 지닌 보편적인 상식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던 탓이다. 19
지난 10월14일, 국제인권단체들은 대우인터내셔널과 세계 곳곳에 나가있는 한국대사관 앞에서 버마의 슈에(Shwe)가스개발을 둘러싸고 ‘인권, 노동권, 환경권을 존중하라.’며 거센 시위를 벌였다. 1996년, 그 무렵에는 버마 군사정부가 이른바 ‘미얀마 방문의 해’를 선포하자 버마의 민주혁명·민족해방 조직들이 국제민주세력과 손잡고 ‘버마관광반대운동’을 벌였던 적이 있다. 9년 터울을 두고 벌어진 이 두 시민운동이 겉보기엔 서로 다른 모습인 듯해도, 국제사회의 경제봉쇄로 파산상태에 빠진 버마군사독재정권의 ‘돈줄’을 차단하기 위한 ‘압박전’이라는 점에서 속살은 같다. 아시아 정치판을 보자. 20세기를 통틀어 아시아는 비록 혼란을 겪어왔지만 이제 서서히 시민중심사회로 이동해 가는 기운이 엿보이고,
일본인 아내가 기념품 장사를 하는 예술가 수딴또 멘둣, 돈 안 되는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하다보니 틈틈이 외항선을 타며 목돈을 벌어야 하는 쁘리요또, 1983년 개발계획에 쫓겨난 초등학교 선생 밤방, 낡은 사진기에 밥줄을 매단 기념사진사 아리스와라…. 이들은 모두 보로부두르 사람들이다. 보로부두르 유적지 개발을 반대하는 주민들이다. 그리고 관광객이 몰릴 것이라는 기대감에 빚을 얻어 일찌감치 집 단장을 끝낸 모하마드, 뛰는 땅값에 이미 팔자 고친 기분인 바시오, 정부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 따라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 온 소또모, 일자리가 넘칠 것이라는 소문을 믿고 시위에 앞장서 온 압둘라…. 이들도 모두 보로부두르 사람들이다. 보로부두르 유적지 개발을 찬성하는 주민들이다. 2003년 초,
룽민저자 꼭대기에 자리잡은 법당에는 쑨원과 장체스의 사진이 불상보다 높이 걸려 있다. 오십년을 전사로 살아 온 사람들이 있다. 칠십 평생을 전쟁터에 바친 이들이 있다. 물론, 세계전사 어디를 훑어봐도 그이들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이들은 ‘국제반공전선’이 쓰고 버린 전쟁도구였던 탓이다. “난 평생 공산당과 싸웠으니 후회는 없어.” 피부염으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자오잉파(85세.윈난성 롱링 출신)씨는 한물간 ‘반공전사’의 명예를 안고 마지막 길을 가고 있다. 이렇듯, 타이-버마, 타이-라오스 국경지대에는 감춰지고 잊혀져버린 현대사가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도이 메사롱, 파땅, 반마이 같이 중국 국민당 ‘잔당’들이 험난한 국경 산악에 세운 이른바 ‘KMT마을’에는 이제 그
타이 국경 난민 속출에 탁신총리는 ‘전전긍긍’ 한때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말레이시아 국경 왓 포티위한 사원은 유혈 사태가 계속되면서 타이 불법 노동자들의 파난처 노릇을 하고 있다. “분리주의자들이 위장한 짓이다.” 탁신 시나왓 타이 총리가 발끈했다. 지난 8월말, 무슬림 분리주의 분쟁을 겪고 있는 타이 남부 3개주 빠따니, 얄라, 나라티왓 지역 주민 131명이 신변위협을 호소하며 말레이시아 국경을 넘고부터 다시 방콕과 쿠알라룸풀은 총성 없는 전쟁에 돌입했다. “타이정부가 자국의 6백만 무슬림들로부터 충성심을 얻겠다면 군사작전으로 억압하는 대신 새로운 길을 찾아야한다.” 말레이시아 외무장관 쉬에드 하미드 알바르도 지지 않고 맞받아쳤다. 그리고 유엔난민고등판무관실(UNHC
17년전 피흘린 산천, 사람은 간 곳 없으나 총칼 들이댄 자들은 여전히 칼자루를 쥔 채 권좌를 지키고, 매년 8월 버마 하늘에는 붓다 후배들의 영혼이 터트리는 울음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네. 구속된 스님들 리스트. 1988년 민중 봉기 당시 1000명 이상의 버마 스님들이 군사독재자에 의해 구속됐다. 어언 17년 세월이 흘러버렸다. 불타던 의지도 터질 듯한 가슴도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속절없는 회오리바람만 몰려다니고 있다. 버마민주항쟁 17주년을 맞는 8월은, 또 이렇게 지난 16주년과 15주년과… 다를 바 없이 권태로운 하루로 흘러가고 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7년 동안 수많은 이들이 ‘민주주의’와 ‘민족해방’을 외치며 전선에서 사라져갔지만, 동시에 국경혁명지대
타이정부에 반기든 낏띠삭 스님 그의 사원에서 발생한 살해사건 줄잇는 인권운동가 살해와 실종 타이의 대표적인 민주투사 낏띠삭 낏띠소바노 스님. 최근 그가 부원장으로 있는 메따담마부디스트 센터 수도원장 수뽀 수와차노 스님이 처참하게 살해되면서 그에 대한 사회적 눈길이 쏠리고 있다. “어쨌든, 가는 거야!” 그이는 변함없다. 장난끼가 섞인 목소리도 여전하다. 지난 6월17일, 타이 북부 팡(Fang)의 메따담마 부디스트 센터(Mettadhamma Buddhist Center) 수도원장인 수뽀 수와차노(Supoj Suvachano)스님이 처참하게 살해당하면서부터 요즘 그이에게 눈길이 쏠리고 있다. 낏띠삭 낏띠소바노(Kittisak Kittisobha-bo)스님을 말하려고 한다. 거침없이
국제 불교계에도 널리 알려진 인슌(印順) 스님이 100세를 넘긴 지 두어 달 만인 지난 6월4일 고요한 새벽길을 따라 저승으로 건너가자, 타이완 언론들은 저마다 현란한 제목 아래 그의 입적 소식을 일제히 머리기사로 뽑아들었다. 언론과 불교계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총리 같은 정치가들도 앞 다퉈 ‘애도전선’에 동참했다. 그건, 불교를 비롯한 종교들이 그리 날 뛰지 않던 타이완 사회 분위기를 놓고 보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 만큼, 인슌이 큰 인물이었다는 걸 증명한 셈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 무렵 타이페이에서 정치판을 취재하고 있던 나는 요란한 인슌의 입적 소식과 냉담한 시민들의 반응 사이에서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초호화판 배우들을
에라완사원에서 '람께본'을 추고있는 무용수들. 신을 기쁘게 한다는 춤으로 알려진 람께본도 에라완사원의 명물 가운데 하나다. ‘세계 최고’ ‘세계 최초’ ‘세계 최대’ ‘세계 최장’…. 아마도, 이런 세계적인 기록들에 목매달기로는 한국과 타이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지 않을까 싶다. 뭐든 세계에서 1등을 하겠다는 데 굳이 나무랄 것도 없지만, 그 내용들을 살펴보면 그다지 찬양·고무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예컨대, 자유나 인권 같은 기본적인 의식이라든지 문학이니 예술 같은 문화적인 것이라든지, 이도 저도 아니면 적어도 경제투명성 같은 것에서 1등을 다툰다면 얼마나 좋으리오만, 실상은 늘 ‘세계최대 에어로빅’ ‘세계최장 국수’ ‘세계최초 VIP카드’ 같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이
“공공연히 여성 차별하는 불교계가 미녀와 달러에 눈 먼 정부 탓할쏘냐” “사찰 배경 삼아 발가벗은 사진 찍지 마라!” 타이불교가 발끈했다. 방콕의 한 사원을 배경으로 미스유니버스 참가자들을 찍은 사진을 게재해 논란이 된 방콕 네이션지. 이건 요즘 타이사회를 휘젓고 다니는 미스유니버스(Miss Universe) 행사를 놓고 불교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대목이다. 그럴 만도 한 게, 세계 곳곳에서 몰려 온 이른바 ‘잘 빠진’ 여자들이 때도 장소도 가림 없이 사정없이 벗어제치고는 사진들을 찍어대고, 그걸 또 신문과 방송들은 ‘얼씨구나’하며 매일 1면 톱에 올리는 눈꼴사나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으니. 게다가, 정부와 언론이 5월 31일로 잡힌 이 미스유니버스 결승전을 향해 거의 ‘광기’에
泰 정계 ‘세계적 위사카 부차’ 준비 분주 정작 불교계는 ‘집안싸움’으로 봉축 뒷전 “정부 관료나 정치가들 가운데 뇌물 받은 이가 절대 없다. 만약 미국 측 회사가 증거를 대지 못한다면 모든 계약을 파기할 것이다. 타이의 명예가 돈이나 시간보다 더 중요하다.” “모두들 임금님께 바칠 진실을 맹세하라!”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이 두 문장은 탁신 시나왓(Thanksin Shinawatra)총리가 어제오늘 사이에 내뱉은 말로, 요즘 타이사회를 주름잡는 ‘화두’이기도 하다. 앞에 것은 9월 개장 목표인 방콕 수와르나부미공항에 설치할 폭발물 탐지기 거래를 놓고 미국 정부가 자국회사 인 비전(GE In Vision)과 타이 정부 사이의 뇌물거래 혐의를 폭로하면서부터 비롯되었는데, 부정부패로 둘째가라
‘내부의 적으로부터 무너진다.’혁명사의 전통적인 이 화두는 버마 민족해방. 민주혁명전선에도 어김없이 찾아들었다. 1994년 말을 돌이켜 보면, 버마 소수민족들의 해방투쟁을 주도해 왔던 카렌민족해방군(KNLA) 분열은 혁명사에 지울 수 없는 얼룩을 남기며 버마군사독재정권 장기화에 이바지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더구나 그 적전 분열이 정치적 신념이 아닌 ‘종교’를 내세웠던 탓에 혁명전선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로부터 10년 세월이 흐른 뒤, 타이와 버마 국경을 가르는 모에이강 물도리동에 자리잡은 카렌민족해방군의 난공불락 요새로 또 버마군사정부에 맞선 50년 투쟁사의 상징이자 최대 격전이 벌어졌던 완카기지에는 이름만 바꿔 단 같은 얼굴들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 주민은 불교-해방군은 기독
‘철의 여인’이란 이름을 지닌 이 배구단은 코치와 선수 모두가 동성애자들로 구성된 팀이다. “타이는 불교와 투어리즘(tourism)으로 이뤄진 사회”란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6500만 국민 가운데 90%를 웃도는 이들이 불교를 받들어왔고, 한 해 1천만명이 넘는 외국 관광객들이 몰려들어 경제를 먹여 살린다 해서 생긴 말이다. 그만큼 ‘불교’와 ‘관광’은 타이사회의 정신과 물질을 구성하는 중요한 두 축이란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지난해 연말 쓰나미가 푸켓을 비롯한 남부 안다만해 연안 6개 주를 휩쓸어버린 타이 사회는 실로 엄청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타이정부는 쓰나미가 빠지기 무섭게 곧장 ‘투어리즘’ 복구에 온갖 정열을 다 바쳤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값도 모른 채 쌀자루부터
맨위 사진은 미군이 남긴 불발탄 앞에서 노는 캄보디아 어린이들. 미국이 저지른 ‘킬링필드’를 증언하는 불발탄은 캄보디아 곳곳에서 아직도 시민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인도주의 폭격’(humanitarian bomb ardment)이란 말이 있었다. 이 얼토당토 않는 말은 1999년 코소보전쟁에서 미군과 나토(NATO)가 세르비아계를 공격할 때 만들어낸 신조어다. 당시 토니 불레어 영국 총리는 “세르비아계가 알바니아계 주민 50만명을 학살했다”며 전쟁몰이를 했다. 그러나 종전 뒤, 밀로세비치 유고 전대통령을 국제형사재판(ICTFY) 법정에 세웠지만 그 ‘50만명 학살설’은 결코 거론된 적도 없다.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1차 대학살은 미국이 자행 캄보디아 땅을 밟으면 늘 이런 역겨운 역
1990년대 버마민주화를 위해 끝까지 군부에 저항했던 버마학생민주전선의 전사들. 이 세상에 그리 흔치 않은,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강 가운데 하나가 타이-버마 국경을 가르는 모에이강(Moei river)이다. 거의 모든 강들이 바다로 빠져나가며 일생을 마치는 것과 달리, 타이 남부를 출발한 모에이는 티베트를 떠나 중국을 거쳐 내려온 살윈강(Salween river)과 마주치며 버마 국경에서 삶을 마감하는 강이기도 하다. 또 모에이는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강들이 황토를 흘리는데 비해 드물게 맑은 물을 실어 나르는 강이기도 하고…. 말하자면, 이 모에이는 지리를 따져 볼 때 좀 별난 강이라는 뜻이다. 이런 모에이강을 국경 사람들은 또 ‘눈물의 강’이라 불러왔다. 타이와 버마 국경을 가르는 이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