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많은 지식인들질곡의 시대 차로써 극복 초의 업적 육우만큼 위대차의 진정성 다시 드러내 ▲독서를 하다가 책을 베고 자는 노인과 뜰 한 모퉁이에서 찻물 끓이는 동자의 모습을 격조 있게 표현한 이재관의 오수도(午睡圖). 조선후기 초의 스님에 의해 부흥한 차문화가 사대부 사이에 널리 확산됐음을 알 수 있다.(왼쪽) 1980년대 중반 초의차의 맥을 잇는 응송 스님과 그의 제자인 박동춘 소장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고 있다.(오른쪽) “초의스님의 다삼매를 찾아서”가 처음 연재된 것은 2010년 9월 초이다. 연재를 위해 답사를 떠나던 날은 음력 7월15일, 백중(百中)이었다. 백중은 목건련이 지옥에 떨어진
1857년 10월 추사 별세초의, 노구 이끌고 상경영전에 제문과 차올리며이생 하직한 ‘지음’ 위로 ▲초의와 추사는 ‘지음(知音)’이었다. 그 옛날 종자기는 자신의 음악세계를 이해해주던 백아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었던 것처럼, 초의 스님은 추사가 세상을 뜨자 더 이상 산문 밖을 나가지 않았다. 그림은 초의 스님(왼쪽)과 추사(오른쪽)의 영정. 초의 스님의 마지막 상경은 1857년 무렵이다. 이때 초의는 봉은사에서 간행된 화엄경의 교증(校證)에 참여하는 한편, 아끼고 그리던 벗, 추사 김정희의 조문(弔問)을 위해 상경하였다. 실제 추사의 서거일은 1856년 10월10일이다. 하지만 그는 단걸음에 추사의 상청(喪廳)을 찾지 못하고,
어느 시기에 차 따는지가명차 만드는 첫 번째 관문초의는 곡우 때 딴 차보다입하 이후를 적기로 간주 ▲ 초의차는 차를 따는 시기에서 덖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중국과는 다른 한국적 특징이 도드라진다. 사진은 필자인 박동춘 소장이 초의차를 재현하고 있는 모습.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 제공 제다(製茶)란 차를 만드는 전 과정을 말한다. 차 만들기의 첫 공정은 잎을 선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만 이에 앞서 어느 시기에 차를 따야하는지를 결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채다(採茶) 시기의 적합성은 명차(名茶)를 만들 수 있는 첫째 관문이다. 초의 스님은 ‘동다송’에서 채다 시기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차를 따는 시기는 (알맞은
차는 물을 통해 세계 현현물에 의해 향·색·맛 결정 좋은 차와 물이 융합될 때오묘한 차의 세계 드러나 ▲ 초의 스님은 “옥화차 한 잔 마시니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일어나고, 가벼워진 몸은 이미 신선의 경계를 건넜다”며 차를 마신 후 자신의 몸과 마음 상태를 이렇게 표현했다. 그림은 명나라 구영(仇英, 1494~1552)의 송정시천도(松亭試泉圖). 차의 근본은 기(氣)이다. 색(色)·향(香)·미(味)는 차의 외연(外緣)으로, 기의 적합성을 가름하는 잣대이다. 차의 진수(眞髓), 다시 말해 차의 기운은 물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물은 차의 진수를 담아내는 그릇이기 때문에 예로부터 물에 대한 탐구는 다서(茶書)
다산 강진유배 계기로그의 아들들과도 교유 다산가와 깊은 우정이차문화 중흥의 시발점 다산 손자도 차 애호가초의, 직접 만들어 선물 정대무의 감사 편지에는초의차 품격 잘 드러나 ▲다산의 아들 정학연과 정학유는 초의 스님과 깊은 정을 나누었으며, 초의 스님이 보내 준 차를 벗들과 함께 마시며 다삼매에 젖기도 했다. 그림은 이광사의 ‘고사주유도’.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이 초의 스님에게 미친 영향력은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과 같았다. 그로부터 훈습 받은 시학과 학문은 훗날 초의가 사대부들과의 교유를 풍요롭게 만든 원천(源泉)이었다. 뿐만 아니라 초의의 막후 후견인이었던 유산 정학연(酉山 丁學淵,
동다송은 한국 대표 茶書실증적 체험 담아서 저술 경화사족의 차 애호 촉발다양한 다서 출현 계기돼 초의 스님의 ‘동다송’은 한국의 대표적인 다서(茶書)로 손꼽힌다. 이는 우리나라의 차가 이미 선덕여왕 때부터 있었다고는 하지만 정작 차의 역사, 문화 전반을 살펴 볼 수 있는 자료는 매우 드물다. 따라서 ‘동다송’은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물론 한국의 차에 대한 정보는 ‘동다송’ 이외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고려사’, 서긍의 ‘선화봉사고려도경’, ‘조선왕조실록’ 등과 같은 역사서와 문인이나 승려들이 남긴 시문을 통해 시대마다 사람들이 차를 이해했던 편린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차의 전모를 살펴보기에는 자료의 제한성과 한계점을 극복하기 어렵다. 이러한 사료의 부족은 한국 차문화를 다층적으로 이해
추사가 보낸 편지만 60통신분과 시대 초월한 교류신뢰와 애틋한 정회 담겨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완당전집’ 35신(위)과 36신(옆). 본지를 통해 처음 공개되는 추사의 친필 서간문이다. 조선 후기 최고의 다인(茶人)으로 칭송되는 인물은 초의 스님과 추사 김정희이다. ‘완당전집(阮堂全集)’과 ‘벽해타운(碧海朶雲)’, ‘주상운타(注箱雲朶)’, ‘나가묵연(那迦墨緣)’, ‘영해타운(瀛海朶雲)’, 필자가 수집한 추사의 또 다른 편지 첩(帖)에는 초의를 향한 그의 깊은 신뢰와 애틋한 정회가 드러난다. 이 편지를 통해 그들의 정감어린 교유는 차와 불교를 통해 더욱 돈독해졌음이 확인된다. 그럼 지금까지
매화도의 명인 조희룡초의 스님과 깊은 교류 늘 유마경 즐겨 읽으며스스로 佛奴라고 호칭 ▲조희룡이 초의 스님에게 보낸 시첩. 조희룡(1789~1866)은 조선후기의 서화가이다. 그는 시와 그림, 글씨에 능해 시·서·화 삼절이라 칭송되었던 인물로, 근현대에 최고의 감식안을 가졌던 오세창은 그를 ‘묵장(墨場)의 영수(領袖)’라 하였다. 특히 그의 매화도는 중국화풍을 탈피,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드러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의 작품 ‘용매도(龍梅圖)’와 ‘장육대매(丈六大梅)’는 이러한 그의 예술성을 잘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조선후기 한국 화단을 이끌어 조선인의 정서와 미적 감수성으로 ‘조선문인화’의 세계를 열었으며, 초의선
심혈 기울인 추사 ‘명선’은 제주 유배 시절에 썼을 것 초의 스님에 대한 고마움과 초의차에 대한 경외심 담겨 ▲추사는 초의를 통해 차의 심원(深遠)한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고, 초의는 추사를 통해 평생의 든든한 후원자를 만날 수 있었다. 추사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명선(茗禪)’은 추사가 초의를 위해 쓴 글씨로 두 사람의 지음지정(知音之情)이 잘 나타나있다. 조선후기 초의 스님과 추사 김정희가 나누었던 우정은 유불(儒佛)간의 아름다운 교유로 회자된다. 이들은 차와 시, 불교를 통해 더욱 굳건한 상호간의 신뢰를 구축했는데 추사가 초의에게 차를 독촉하는 편지가 많다는 점은 이들의 교유
차는 선불교 대표적 문화스님들 수행 중에도 즐겨 대흥사·운흥사·불회사 등조선후기까지 차명맥 유지 ▲나주 불회사는 예로부터 다소(茶所)가 있었던 고찰로 초의차의 형성 및 전승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초의선사는 조선후기 민멸 위기에 처했던 차문화를 복원, 중흥시킨 인물로 칭송된다. 그가 세운 이 업적은 대둔사(현 대흥사)에 남아 있던 사원차를 복원·재정립한 것으로, 그 토대는 운흥사와 대둔사에서 연원된 것이다. 항간에 초의의 제다법이 다산 정약용에게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이러한 견해는 다산의 입장만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겨진다. 조선후기 초의에 의해 중흥된
시서화 삼절로 칭송되던조선후기 대표적 지식인 자신의 집 ‘北禪院’ 명명참선과 차에도 깊은 이해 ▲ 신위는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했을 뿐 아니라 깊은 삼매에도 이르렀다. 그림은 신위의 ‘묵죽도 지본묵서’. 초의차를 사랑했던 자하도인 신위(申緯, 1769~1845)는 조선후기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그는 초의 스님을 통해 불교를 이해했고, 초의는 그의 조언을 통해 초의차를 완성했다. 뿐만 아니라 초의가 민멸된 차문화를 중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바로 신위와 추사의 후원으로, 차의 애호층이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초의와 신위가 처음 만난 시기는 1831년경이다. 1830년 겨울, 취연(醉蓮)을 대동하고 상경한 초의는 추사 댁에 머물면서 스승
창암은 호남칠우 중 한명1830년부터 초의와 교유 10여년 뒤 운암집서 상봉“초의는 벽나의 입은 신선” ▲ 칠순을 넘겨 초의 스님을 만난 창암 이삼만은 서로 헤어지기 아쉬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해보지만 이미 늙어버린 그이기에 재회의 약속을 지키기 어렵다고 고백한다. 사진은 전주 창암의 집터. 도서출판 동아시아 제공 초의 스님이 불후의 명필이었던 창암 이삼만(1770~1845)을 만난 것은 1830년경의 일이다. 이러한 사실은 창암이 지은 ‘증별남해승초의(贈別南海僧草衣)’의 서문을 통해 확인된다. 초의 스님은 호남칠우(湖南七友) 중에 한 분이시다. 일곱 사람들 중에 네 분은 돌아가셨고, 오직 나와 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