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헌법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나라에서 제정한 법을 국민 모두가 잘 알지는 못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되면 법관에게 의뢰하게 된다. 이때 법관은 헌법을 중심으로 하여 관습과 정황에 따라 판결한다. 승가에도 율법이 있다. 이 율법은 부처님 법에 따라 출가한 사람이면 누구나 지켜야할 의무이다. 그러데 가끔 계율은 율사만 지키고 일반 스님들은 지키면 좋고 지키지 않아도 무방하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는 스님들이 있다. 이것은 마치 국법을 판사 검사나 지키는 것이고 일반 국민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같다. 판사나 검사의 역할이 헌법을 잘 배워서 문제를 판결하는데 도움을 주듯, 율사 스님도 율장을 연찬하여 스님들에게 계율을 가르치고 승가에 문제가 발생되었을 때 율장의 정신에 의거하여 조
종교와 예술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생명이 길까?옛 고적에서 사라져버린 고대의 종교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보면 예술의 생명이 더 긴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러한 예술을 있게 한 원동력은 종교이고, 예술을 연구하다보면 종교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예술은 종교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이고, 종교는 예술의 좋은 모티브이다. 아잔타나 돈황의 불교예술을 빼고 동양예술을 말하기 힘들고 석굴암이나 고려불화를 제외하고 한국의 미를 논할 수 없다. 불교는 존재에 대한 덧없음을 깨달아 욕심을 제어하여 고(苦)를 줄여나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출가한 사람들에게 세속적인 미(美)는 상관없는 일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계율에 있어서 특히 음악예술은 금기시되고 있는데 사미계나 재가신도의 팔관계를 살
불자가 다른 종교로 개종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없기 때문에 마음을 바꾸는 일이 많다고 한다. 예컨대 정치인이나 기업가, 군인, 연예인 등 비교적 많은 사람을 접촉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타종교의 정치력이나 조직력 때문에 개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개인적으로는 불교가 좋다하더라도 생존과 번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돌리는 일이 허다하다. 제일 안타까운 일은 평생을 불교에 귀의하였다가 병든 뒤나 죽음을 앞두고 개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나 주변사람들까지 개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건강할 때는 누구나 친절하고 돈을 낼 여력이 있을 때는 절에 와서 대접도 받는다. 그러나 재력도 없고 늙고 병들어지면 평소 도반이라고 여기고 절에 같이
요즘 들어 반종교 사이트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반기련(반기독교시민연합)을 중심으로 한 안티기독교 사이트의 위세는 날로 더해가고 있다. 이들 안티기독교의 특징은 기독교인의 행태에 대한 불만도 있지만 그 교리에 대한 비판이 주요 핵심이다. 이에 비해 안티 불교는 거의 미미한 수준이며 교리보다는 사찰의 비리나 스님들 개인의 행위에 그 초점이 맞춰져있다. 불교를 교리적으로 거부하기 어려운 점은 △인간의 삶을 관장하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방대한 교리체계를 일반인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며 △경전의 대부분이 수행에 중심을 두고 △회향의 대상이 일체 중생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뛰어난 교리적 구성요소를 가진 불교가 그럼에도 최근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거부의 대상이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승단이
깨달음은 글자나 교양의 유무에 관계없이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옛 사람들이 말하였다.육조 스님은 글을 모르는 대표적인 선지식으로 꼽히는데 정작 육조 스님은 자신이 깨달은 내용을 설명하면서 여러 경전을 인용하여 증거로 하였다. 책 못 읽게 하기로 유명한 성철 스님이 부처님의 밥값을 갚았다고 자부하는 『선문정로』는 자신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만을 여러 경전이나 조사의 글들에서 골라 발췌한 것이다. 육조 스님이 생이지지(生而知之)가 아닌 이상 보지 않은 경전을 인용할 수가 없고, 성철 스님이 표방하는 종지도 옛 경서와 어록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부처님과 조사의 뜻에 어떻게 부합되는지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부처님 입멸이후 각 나라로 불교가 확대되면서 여러 경전과 수행법을 바탕으로 다양한 부파와 종파들이 생겨났
일본인들은 형식이 뛰어나면 내용의 부족함을 메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외형의 중요함을 강조하는 것이 그들의 생활 곳곳에 배여있다. 예를 들어 형식을 벗었다는 선종의 영향을 받은 다도(茶道)는 오히려 일본적 형식미의 대표적인 의식이다. 이러한 다도의 형식은 한국은 물론 차의 본고장인 중국이 모방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유교에서 교육받은 사람을 평가할 때 신언서판(身言書判)의 네 가지로 그 기준을 정한다. 기준의 첫째에 해당하는 신(身)은 품위 있는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승려다운 행동을 뜻할 때 흔히 팔만사천 세행(細行)을 말하게 되는데 이것은 올바르고 품격 있는 자세를 칭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출가한 사람에게 무조건 5년 동안 계율을 배우도록 한 것을 보면 교육의 기본은 역시 몸가짐이
공부하는 사람은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가봐야 한다는 말이 있다.만권의 책은 여러 분야에 걸친 지식이며 만리의 길이란 많은 경험을 의미한다.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교육은 작게는 한 사람의 장래를 결정하고 크게는 나라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 교육의 효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나타나기 때문에 인재에 투자하는 것은 그만큼 인내와 지속성이 필요하다. 또한 지도자들이 교육에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가에 따라 그 집단의 장래가 보인다. 사회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려면 대학에서 박사과정까지 8년이 넘는 시간을 쓴다. 하물며 인천의 스승을 배출한다는 승가의 교육은 다양하고 정교해야 한다. 티베트의 전통은 환생하는 스님을 인정하고 있다. 그들의 말대로 스님들이 환
비구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가사는 세 가지 종류이다.첫째는 치마처럼 둘러 입는 속옷에 해당되는 안타회라는 옷이며, 둘째는 절에서 늘 착용하며 포살, 참회, 갈마 등 거의 모든 일에 입을 수 있는 울타라승이며, 셋째는 외출할 때나 설법할 때 입는 승가리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남방과 기후조건이 다르므로 세 가지를 모두 갖추어 입지 않으며, 울타라승과 승가리를 특별하게 구분하지 않고 입는다.울타라승과 승가리를 구분할 때 조수를 헤아리게 되는데 울타라승은 7조이며 승가리는 9조에서 25조까지 홀수 숫자는 모두 해당된다.그러면 속옷인 안타회는 몇 조인가? 안타회는 5조로 정하고 있으며 사정에 따라서는 조가 없는 경우도 있다. 더운 지방의 스님들이 안타회 없이 지낼 수 없지만, 기후적 조건 때문에 우리나라 스님들
우파리 존자는 부처님의 대표적인 큰 제자 10분 가운데 계율을 잘 지키기로 유명한 스님이다. 우파리 존자는 부처님께서 정하신 계율이 크든 작든 어기지 않았으며 또 모든 계율을 잘 암송하였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후 500명의 장로 스님들이 모여 결집할 때 제일 먼저 뽑히어 율을 암송하였다고 한다. 부처님 당시에는 계율을 바탕으로 생활했기 때문에 모든 스님들이 계율과 생활이 괴리되는 현상은 없었다. 그 가운데 우파리 존자는 더 더욱 계율을 준수하였으니 지계제일(持戒第一)이라는 칭송을 들었던 것이다. 공자가 사생아로 태어났고 게다가 젊을 때 직업이 장의사였기 때문에 예(禮)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다. 사생아이기 때문에 예의를 모른다고 사람들이 말할 수 있으므로 그의 일생은 예의를 공부하고
우리나라의 불교종단은 부처님께서 만드신 승가의 형태라기보다 세속의 형식을 빌려온 불교 단체라고 말할 수 있다. 중국에서 불교가 넘어오면서 중국적 가치관이 섞여 있는데다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유교의 영향으로 세속적 가치관이 승단 곳곳에 스며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비불교적인 것을 그냥 전통으로 여기며 존속하는데 있다. 세속의 전통은 세속에 있어야만 그 가치가 빛나는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교리와 조직이 전혀 다른 불교가 정치적으로 약자의 위치에서 오랜 세월 보낸 것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지 못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승단에서 엿보이는 세속의 가장 큰 그림자를 꼽으라면 관료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어떤 마을에 나이어린 사람이 장원급제하여 마을의 수장으로 부임해 왔을
오후불식(午後不食)이란 정오 12시가 지나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 계율을 일컫는다.2500여년 전 부처님 당시 경제가 열악해 세간 사람조차 음식이 풍부하지 못하였다. 당시 인도는 스님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도의 출가자들도 걸식하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세간에서 사문들에게 매일 공양해야 하는 그 양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스님들은 새벽에 죽을 먹고 정오가 되기 전에 걸식한 음식을 먹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더욱이 새벽에 먹는 죽도 풀잎으로 죽의 표면에 그림을 그려보아 그 자국이 남으면 안 될 정도의 멀건 것이어야만 먹는 것이 허락되었다. 오후가 넘는 것을 비시(非時)라고 하여 음식을 먹기에 알맞지 않은 시간으로 간주하였고, 병자가 아니면서 먹었을 경우에는 바일제를 적용해 참회를 해야 했다. 오후불식은 음식법 가
지난주 율장에서 부처님께서 마늘을 먹지 말라고 하신 계를 제정한 동기를 설명하였다. 비구의 입 냄새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 것과, 비구니들이 마늘을 남김없이 가져갔기 때문에 먹지 말라고 한 것은 기본적으로 출가자들의 깨끗한 행위를 위해 제정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는 본래 마늘을 먹지 말라는 계에다가 마늘과 유사한 냄새가 나는 것은 모두 금지함으로써 수행자로서 품위와 깨끗한 몸을 유지하게 하였다. 이것은 여럿이 모여 수행하는 승가나 사찰에서 서로를 위하는 길이며 개인적으로도 맑은 기운을 돋게 한다. 사회에서도 오신채를 먹은 뒤에는 여러 사람이 냄새 때문에 고역을 치루기도 하는 것을 보면 재가불자들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오신채를 오래 먹게 되면 그 냄새가 몸에 축척되어 항상 좋지 못한 냄새가 나서 사람들이
우리나라나 중국의 사찰음식에서 오신채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다.오신채를 섭취하면 화를 잘 내게 되고 음욕이 많아지기 때문에 먹지 않는다고 한다. 오신채가 그런 약리작용이 있다하더라도 개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먹지 않아서 화나 음욕이 적어진다고 볼 수 없다. 재가인 가운데 오신채를 늘 먹지만 화를 잘 내지 않고 불사음계를 잘 지키는 불자도 있고, 오신채를 안 먹지만 음욕이 강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도 있어, 화나 음욕은 마음에서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율장에서는 오신채 가운데에서 마늘 먹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마늘의 강정효과나 진심(嗔心, 화내는 마음) 때문이 아니다. 비구의 경우 마늘을 먹고 온 비구가 냄새 날 것을 염려하여 부처님 가까이 앉지 못한 것 때문에 마늘을 먹지 않도록
부처님께서는 출가를 위해 온 가족을 뒤로하고 깊은 밤 궁궐을 빠져 나오셨다. 오직 한 사람의 마부만이 태자였던 부처님을 모시고 있었다. 이 마부가 곧 천타(闡陀), 혹은 차익(車匿), 팔리어로 찬나(Channa)라고 부르던 사람인데 그는 부처님께서 성도 하신 후 고향에 돌아오셨을 때 출가하였다. 천타는 출가 후 무리를 지어서 여러 가지 비법을 일삼던 육군비구 가운데 한사람이 되었다. 그는 악한 성품으로 욕설을 잘하며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을 충고하는 스님들에게 “너는 나를 가르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너를 가르칠 수 있다. 어떠한 까닭인가? 부처님은 우리 집안의 부처님이시기 때문이다. 나와 근보(부처님이 타시던 말)가 부처님을 입산시켜 도를 닦게 하였다. 모든 장
불교가 지금까지 전승된 가장 큰 공적은 가섭존자가 주도한 결집에 있다. 결집이 없었다면 삼장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을 것이고 불교도 융성하지 못했을 것이다.가섭존자가 결집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계율 때문이었다. 부처님께서 입멸하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 어리석고 좋지 못하며 늦게 출가한 발난타(스밧다)비구가 말하기를 “저 장로(부처님)가 항상 이것을 하라, 이것을 하지마라 잔소리하였는데 (열반에 드셨으니) 이제 자유를 얻었으니 즐겁다.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그치자” 라고 하며 기뻐하였다. 가섭존자가 이 말을 홀로 듣고 승가의 존속과 질서를 위해 부처님의 유훈이 사라지기 전에 율과 경을 모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가섭존자는 오백 명의 아라한을 모으고 먼저 계율을 잘 기억하고 있는 우
요즘 조그만 절의 주지를 맡거나 비중 있는 자리의 소임에 있는 스님들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큰스님으로 불린다. 이것은 신도가 자신이 다니는 절의 주지 스님을 존중하는 뜻에서 이렇게 부르기도 하고, 공식석상에서도 대접하는 의미로 높여 불러주기 때문이다.그래서인지 지금보다 큰스님이라는 명칭이 흔했던 시절도 없는 것 같다. 옛 스님들의 호칭은 문헌이나 부도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나마 역사에 기록된 분들은 문자 그대로 큰스님들이었을 것이다. 그 호칭은 대개 대선사, 대종사, 대율사, 대강백. 대화상이 아니면 대(大)자가 빠진 선사, 종사… 등으로 되어있다.이런 와중에 OO비구 이런 호칭을 보면 반갑기 그지없다. 스님에게 가장 합당한 호칭은 바로 이 비구라는 말이다. 우리가 스님이라는 말 대신 흔히 사용하는 화
율장은 부처님의 옛 자취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문헌이다. 율장에는 승가의 생활에 필요한 규정들이 있는데 불교가 북방에 유입되면서 율장과 위배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생활들이 형성되었다. 이것은 율장이 인도의 기후나 풍습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북방에서는 그대로 수용하기가 어려움이 있었던 까닭이다. 부처님이 계실 당시에도 인도 변방지역에 있던 스님들이 다른 기후나 풍속 때문에 지내기가 힘들어 지자 부처님은 그 지방에 알맞도록 제도를 고치도록 허락하셨는데 이것을 일러 방면비니(方面毘尼)혹은 수방비니(隨方毘尼)라고 한다. 북방에서는 인도나 남방과는 달리 걸식에서부터 삼의를 걸쳐야 하는 것과 땅을 파지 말아야 하는 것 등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으로 도저히 율장의 원칙대로 할 수 없는 일도 있다.
요즘 계율에 대한 사부대중의 관심이 어느 때 보다 높다. 계율은 승가 내에서도 율사만 지켜야하는 것으로 인식될 만큼 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형편이다. 그래서인지 계율에 관한 일은 자신과 무관하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승가가 청정하기를 바라는 재가불자들이 계율에 관심을 두는 것은 어쩌면 승가의 이러한 상황과도 관련 있다고 할 수 있다. 몇 해 전 동화사에서 재가불자들에게 율장을 공개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이 있었다. 재가불자도 율장을 읽어야 한다는 의견은 현재 남방이나 대만 등지에서 율장을 공개하고 있고, 신도도 율장을 알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남방은 확인하지 않아 모르겠지만 대만은 아직까지도 율장을 인쇄할 때 출가자 이외는 읽지 말라고 밝히는 경우가 종종 있어, 재가자에게 율장을 공개하는 것에 그리
우리나라 역사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려 때 팔관회나 연등회 같은 불교의식이 성행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팔관회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절에 오래 다닌 불자도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다. 늘 계율생활을 하기 힘든 일반 사람들이 짧은 시간이나마 청정하게 보내도록 마련된 계율법회가 바로 팔관회이다. 팔관회에서 주는 계율은 여덟 가지 항목으로 이것을 팔계, 혹은 팔관재계라 한다. 팔관재계(八關齋戒)에서 관(關)은 단속한다는 의미가 있고, 재(齋)는 닦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어, 여덟 가지 계율(팔계)을 잘 지니고 닦는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팔계는 남의 목숨을 자비롭게 여기라, 나의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 하지 말라, 음란한 행위를 하지 말라, 거짓을 말하지 말라, 술이나 마약류
오랫동안 눕지 않고 앉아서 수행(장좌불와)하거나, 말하지 않는 수행(묵언)을 하는 스님들에 대해 흔히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일반인이 하기 힘든 수행을 하기에 존경과 찬사를 보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다. 여러 수행 가운데에서 묵언은 쉽지 않은 수행으로 통한다. 몇 년, 혹은 십년을 넘게 묵언 정진하시는 스님들이 도처에 있는 것을 보면, 한국 불교에서 묵언은 중요한 수행방법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여럿이 함께 수행할 때 묵언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어느 때 비구의 한 무리들이 묵언을 하며 안거를 보내기로 결정하였는데 부처님께서는 이를 꾸짖으신 일이 있다. 부처님께서 이들의 묵언을 허락하지 않으신 까닭은 안거 중에 묵언을 하게 되면 포살설계에 참여하여 참회하거나 갈마 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