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우주에는 헤아릴 수 있는 생(生)이 있으며 헤아릴 수 없는 생이 있다. 여래는 수명(壽命)을 버렸다. 항상 여래는 안으로 기뻐하며 고요한 마음을 가졌으며 스스로 갑옷을 찢듯이 스스로의 생도 찢어 버렸다.’ 사람의 수명은 유한(有限)하다. 겨우 백년도 되지 않는 삶이다. 수행을 하고 자기 자신을 바르게 인도하는데도 모자라는 짧은 시간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이 많다고 느끼지만 실로 찰나(刹那)에 불과하다. 우리 인생은 찰나에 불과 어찌 보면 인간만큼 고통스러운 존재도 없으며 인간만큼 괴로운 존재도 없다. 왜냐하면 평생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고통 속을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짧고 고통스러운 생을 살면서도 인간의 마음속에는 항시 무한대의 탐욕이 덩굴채로 자라고 있다. 기쁨이 크면
불교의 진리는 나를 구제하는데 있는 게 아니라 남을 구제 하는 데에 있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하여 법을 깨달아 남에게 전파하는 것이 곧 부처가 되는 길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닦는 것이 불법(佛法)공부의 최우선 순위이라는 말이다. 자기 자신의 마음과 몸을 올바르게 닦지도 않고 남을 구제한다는 건 있을 수도 없으며 행복을 구할 수도 없다. 아함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自己心爲師 不依他爲師 獲眞智人法(자기심위사 불의지위사 획진지인법)’‘내 마음을 스승으로 삼고 부디 남을 스승으로 삼지 말라. 내 마음을 스승인 줄 아는 사람은 참으로 슬기로운 자이다.’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는 사람은 슬기롭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잘못된 길로 들어서지 않게 하고 항상 겸손하며 남을 바른 길로 인도할 줄
모든 과오와 모든 공덕을 부처님의 일로 ‘돌려놓아라’고 말하였는데 과연 그 부처님은 어디에 있을까? 바로 그 부처님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다. 결국 부처님의 일로 ‘돌려버려라’는 뜻은 바른 마음을 가진 나를 찾으라는 소리이다. 내가 중심이 되어 나를 믿고 나를 의지하라는 말이다. 어찌 보면 미묘(微妙)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나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위대한 법문임을 깨달아야 한다.지금 여기 ‘나’라는 존재가 없다면 ‘고통’과‘기쁨’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것도 바로 ‘나’라는 존재가 여기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착심(着心)이 생긴다. 우리가 부처를 찾고 바로 알고자 하는 것은 내 마음속에 든 부처를 찾아 그러한 고통과 번뇌 속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사찰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일주문(一住門)을 만난다. 그리고 그 다음에 천왕문이나 해탈문 혹은 불이문을 지나 만세루가 있고 정면에 대웅전이 있으며 마당에는 석탑, 석등들이 있고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여 좌체우용(左體右用))의 표현으로 왼쪽에는 비로전 용화전등이 있으며 오른쪽에는 관음전, 명부전, 나한전, 팔상전 등이 있다. 이것이 한국사찰이 가진 대표적인 건축규격이다. 다만 사찰의 건축규격이 어느 때부터 이렇게 되었는지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없다. 사찰의 건물도 아무렇게나 세워서는 절대로 안 된다. 반드시 좌체우용이라는 대원칙에 의하여 배열되어야만 한다. 체와 용이란 경전에 자주 나오는 말로, 체는 본체란 뜻이며 용이란 화용(化用) 곧 변화의 작용이며 그 용도란 뜻이다. 어떤 물체라도 체와 용이 있
“계와 선정을 몸에 지니고 해탈을 얻었음을 깨닫는 지혜를 가지는 것은 가르침을 잘 깨우친 사람이며 또한 가르침을 전해 주는 사람이며 가르침을 잘 설해 주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비구이다.”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한 설법이다. 우리는 가끔 길을 걷다가 혹은 절에서 스님들을 만날 때가 있다. 여기에서 스님이란 일반인들과 다른 수행자를 뜻하며 부처님의 제자들이다. 때문에 계를 지키고 열반을 위해 수행하는 스님들은 분명히 일반불자들이 경건하게 대해야 할 분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불자들은 스님 앞을 지날 때도 가벼운 목례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종종 본다. 부처님은 “비구들을 섬기고 봉사하고 존경하는 사람은 계의 덩어리(戒蘊)를 완전하게 수행하지 않았어도 그것을 완전하게 수행하게 되며 이런 사람은 또한 선정의 덩
사찰은 신앙의 도량이며 성불을 목표로 하는 지엄한 연마장이다. 때문에 건물의 위치와 규격에 대해서도 깊은 뜻과 심오한 법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글씨 하나 써 붙이고 돌 하나 올려놓는데도 의범과 표법에 맞도록 세심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찰간과 사물이 있다. 찰간이란 당간이라고도 하는 데 사찰입구에 돌이나 쇠로 만든 기둥을 뜻한다. 아래쪽에는 지주로 되어 있고 그 위에는 장대처럼 긴 쇠로 깃대를 세워 그 위에 절의 종지와 절의 격조를 표시한다. 요즈음 말로써 표현하면 그 절의 종지를 상징하는 기이다. 우리나라의 구산오교가 그 교세를 각자 자랑할 때 자기네들이 숭상하는 교의를 표시하는 기치이기도 하다. 오늘에 와서는 그 원형이 거의 없어지고 대개의 절이 지주만 남아 있는 곳이 많으나 아직도 갑사 철간만은
큰 절 입구에는 대개 천왕문이 있고 그 안에는 무서운 장군상(將軍像)같은 탱화(幀畵) 혹은 조각(彫刻)으로 조성한 신장(神將)의 모습을 모셔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사대천왕은 제석천(帝釋天)의 불법을 수호하거나 염원하기 위해 불법에 귀의(歸依)한 사람들을 수호하기로 맹세한 호법천신(護法天神)들이다.동쪽을 맡아 다스리는 신은 지국천왕(持國天王), 남쪽을 맡아 다스리는 천신은 증장천왕(增長天王), 서쪽을 맡아 다스리는 천신은 광목천왕(廣目天王), 북쪽을 맡아 다스리는 천신은 비사천왕(毘沙天王)이다. 이들은 석가세존이 설법(說法)하실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호법(護法)의 책임을 다했으며 세세생생(世世生生)에 불법을 옹호(擁護)하겠다는 굳은 서원(誓願)을 하였다. 그러므로 사찰(寺刹)이란 곧 부처님을 모셔놓은 도량
사찰 생활을 하거나 수행을 할 때는 지켜야 할 엄격한 규범이 있다. 신 하나을 벗는데도 법도가 있으며 길을 걷을 때도 신행에 어긋나지 않아야 하며 공양을 할 때도 참회와 기원(祈願)이 들어 있어야 한다. 이밖에 사찰의 문을 열거나 닫을 때도 순서가 있으며 앉고 눕고 말하고 잠자는 것까지도 절행(節行)의 규범을 지켜야만 한다. 사찰에서는 어느 것 하나라도 평범한 것이 없으며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은 하나도 없다. 심지어 삭발을 할 때도 날짜가 정해져 있고 세탁(洗濯)을 하는데도 정한 날이 있다. 그래서 수행자조차 이 규범과 율범(律範)을 지키기란 매우 힘들다. 이것은 그 속에서 생활하는 대중들에게 불편을 주기 위해서라든지, 고통을 주기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전부가 도를 닦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만든 것이다
‘부처님의 사랑은 크고 작고 곱고 미움이 없는 일체평등의 사랑이다. 우리는 이것을 두고 자비심이라 한다.’ 불교에서 가장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자비(慈悲)사상이다. 자비는 불교의 근본이 되며 또한 부처의 씨앗이다. 불교뿐 만아니라 이 세상 인류 생활에 있어서 뿌리가 되고 줄기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자비란 말은 곧 사랑이라는 뜻인데 사람에게서 이 사랑을 빼앗아 버리게 되면 삭막한 공포와 지옥처럼 변해버릴 것이다. 사랑이란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자식간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봄이면 꽃이 피는 것도 사랑이며, 가을이면 잎이 지는 것도 사랑이다. 이 자연의 사랑과 인간의 사랑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것이 우주의 사랑이다. 이 속에서 인간은 호흡하고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서는 안
‘사람은 전생의 업고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먼저 돌아가신 조상들을 위해 정진과 발원을 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절에서 점안불사(點眼佛事)를 한다. 그런데 본법상(本法上)으로 볼 때 점안이란 말 자체는 매우 모호하다고 할 수가 있다. 어디를 가리켜 부처의 눈이라 할 것이며 또는 어디에 점안을 한다는 말인지 참으로 우스운 말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전부 일원상 최청정법신(最淸淨法身)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곳이 부처의 눈이며 어느 곳이 부처의 귀인지 말 할 수가 없다. 『금강경』에 ‘금불(金佛)은 불도로(不渡爐)이며 목불(木佛)은 불도화(不渡火), 니불(泥佛)은 불도수(不渡水)’라 하였다. 이는 금불, 목불, 니불도 모두 실상 부처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점안불사를 한다는 말은 도
‘자(慈)는 아버지의 마음이며 비(悲)는 어머니의 마음이다.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자식들의 괴로움을 덜어 주기 위해 자기의 희생을 달게 받고 있다.’ 이것은 중국의 천태(天台) 스님이 말씀하신 부모님의 은혜이다. 또 선도(善導)가 지은 ‘십사행게’(十四行偈)에는 ‘부처님의 대자비를 배워라’는 말이 나온다. 부모님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무한한 자비심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아무런 조건이 붙지 않는다. 내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저들도 응분의 보상이 있을 것이라는 ‘바램’도 없다. 부모가 자식들에게 베푸는 은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위대하다. 어릴 때 젖을 먹여 길렀고, 더러운 것을 씻어 주었으며 맑고
방생이란 말은 불교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말로서 고통의 세계에 갇혀 있는 생명들을 놓아준다는 뜻이다. 사람의 목숨만 귀중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은 모두 귀중하다. 생명이란 우주와 통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며 또한 창(窓)이며 부처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신성 존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방생이란 고통과 슬픔, 괴로움이 있는 것을 풀어주고 놓아주어 살아 있는 동물이 스스로 자유의 경지를 얻도록 해주는 데에 있다. 방생의 유래에 대해서는 『금광명경 유수장자품』에 자세히 나와 있다.“유수라는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하루는 유수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를 하다가 연못가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못은 오랜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말라 많은 고기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그것을 본 유수는 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