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년 12월14일 완공조성과정 숱한 전설 구전“에밀레 전설은 정치 상황빗댄 신라인들 가공설화” 771년 12월14일 마침내 성덕대왕신종이 완성됐다. ‘성덕대왕신종명문’에 따르면 이 종은 혜공왕의 선친인 경덕왕 때부터 추진됐다.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부친마저 죽자 큰 시름에 빠졌던 경덕왕은 성덕대왕을 추모하고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청동 12만근을 희사해 범종 조성 불사를 진행했다. 그러나 거대한 범종 조성 불사는 쉽지 않았고, 경덕왕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선왕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른 혜공왕은 선친의 유업을 계승하기 위해 범종 불사를 다시 추진했다. 그리곤 즉위한 지 7년 만에
1550년 12월15일 하명허응당 보우스님과 함께교단복원·승려양성 매진유생 반대로 다시 폐지돼 1550년 12월15일 조선 조정은 크게 술렁거렸다. 이날 어린 명종을 대신해 섭정을 하고 있던 문정왕후가 비망기(備忘記)를 통해 연산군 때 폐지된 불교 승단인 선(禪)·교(敎) 양종을 복원하고 성종 때 폐지된 스님들의 과거제도인 승과를 실시하라는 명을 내렸기 때문이다. 조정 대신은 물론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이 즉각 반발에 나섰다. 또 성균관을 비롯해 지방유생들까지 나서 양종 설치와 승과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특히 당시 성균관 유생들은 양종 복립에 반대하며 수업을 거부하는 집단시위를 벌였으며 지방유생들도 이듬해 5월까지 무려 446건에 달
1921년 11월30일 문 열어일본 식민지불교 추진에 반발한국불교 전통회복 염원하며사부대중 십시일반으로 건립 1921년 11월30일 세간의 이목이 불교계로 쏠렸다. 일제가 한국불교의 식민지화를 차곡차곡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조선불교를 대표하는 수좌들이 조선총독부가 훤히 보이는 서울 종로 안국동에 선학원을 건립했기 때문이다. 선학원 건립은 조선불교계의 항일의식에서 비롯됐다. 일제는 1911년 사찰령을 공포하고 사찰의 재산과 인사권을 장악했다. 그런가하면 당시 한국불교계가 설립한 원종과 임제종을 폐지하고 30본산제를 시행했다. 일제의 강압에 의해 설립된 30본산은 자연 친일 성향을 띌 수밖에 없었다. 이렇다보니
1974년 11월1일 발간새로운 불교운동의 중심결호 없이 40년간 발행교계 대표 잡지로 도약 1974년 11월1일 불교잡지 ‘불광’이 창간됐다. ‘부처님의 반야지혜 광명으로 자신과 사회를 밝게 하는 공동체 구현’이라는 불광 운동을 이끌던 광덕 스님에 의해 발간된 ‘불광’은 창간과 동시에 불교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불광’의 창간은 기복불교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던 한국불교에 새로운 신행 문화를 선도했다. ‘불광’이 창간될 무렵인 1970년대 한국불교는 기복불교와 지식불교가 평행선처럼 괴리돼 있었다. 한쪽에서는 교리와 신앙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복을 비는 풍토가 만연해 있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불교를 단순히 철학으로
2002년 10월23일 도착종묘·덕수궁 등서 다례임진왜란 때 볼모로 잡혀日서 출가 일련종 이끌어 2002년 10월23일, 조선 선조의 맏손자로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뒤 그곳에서 출가해 큰 족적을 남긴 일연(日延, 1589~1665) 스님이 마침내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1593년 임진왜란 당시 왜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인질로 잡혀 친누이와 함께 현해탄을 넘은지 꼭 409년만의 귀환이었다. ‘일연상인 환국추진위원회’와 김제 금산사의 초청으로 이날 방한한 일본 후쿠오카 묘안사(妙安寺) 주지 가도다 쇼에이 스님 일행은 15cm 크기의 일연 스님의 존안상을 들고 서울 종묘와 덕수궁을 참배했다. 특히 이틀 뒤인 25일 금산사는
1939년 10월16일 발각돼초월스님 등 일심교 회원용산역에 ‘조선독립’남겨일제에 모두 검거돼 와해 1939년 10월16일, 경성 용산역을 관리하던 용산경찰서 일본 경찰들과 용산헌병분대는 비상이 걸렸다. 이날 조선인 징용병을 실고 만주로 가기 위해 잠시 용산역에 정차해 있던 군용열차에서 ‘조선독립만세’라는 커다란 낙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낙서는 군용열차 뿐 아니라 용산역 구내 곳곳에서 발견됐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직감한 일본 군경들은 즉각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려 낙서를 한 범인을 색출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리곤 사건 발생 1주일만인 10월23일 유력한 용의자로 박수남을 지목했다. 당시 박수남은 조선운송주식회사 용산영업소 인부로 사건이 발생
1920년 9월 22일 조각 입문최초 조소작가·미술평론가금산사본존불 등 다수 남겨39세에 요절한 비운의 천재 ▲김복진 정관 김복진(1901~1940)은 일제강점기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를 다진 선구적인 미술작가이자 근대기 불상조각의 새로운 지평을 연 불모(佛母)로 추앙되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근대기 최초의 조소작가이자 미술비평가, 문예운동가로서 커다란 족적을 남겼으며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을 비롯해 예산 정혜사 관음전 관음보살좌상 등 수많은 불상을 조성해 근대 불교조각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또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구속돼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그 후유증으로 불면증과 신경쇠약으로 고통을 겪었고, 늦은 나이에 얻은 딸마저 병으로 잃고 그 충격으
1926년 9월 총독부에 건의대처승 주지 반대 무산되자비구·대처 구분 차선책 주장 비구 종단 조계종 출범배경 ▲용성 스님 1926년 9월 어느 날, 용성 스님은 조선불교의 현실을 목격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부처님가르침에는 ‘출가수행자가 아내를 얻고, 육식을 할 수 없음’에도 어느 때부터 ‘대처식육’이 만연돼 가고 있는 조선불교의 현실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어떻게 하면 세속화되고 있는 조선불교를 바로 잡을 수 있을까. 용성 스님은 깊은 고민 끝에 다시 한 번 조선총독부에 진정서를 내기로 결심했다. 이미 용성 스님은 지난 5월에도 함경도 석왕사 주지 대전 스님과 합천 해인사 주지 회진 스님 등 비구 127명에게 연서를 받아 1차 건백서를 제
1913년 8월20일 방한영국의 불교탄압 맞서인도불교 부흥에 앞장‘제2의 아소카’로 평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마(1864~1933) 1913년 8월20일 일본 불교계 초청으로 한국 땅을 밟은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마(1864~1933)는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불교 발상지인 인도에서 봤던 처참한 광경과 달리 1600여년의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불교의 모습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사찰마다 불상이며 조각들이 정갈하게 봉안돼 있고 법당에서 기도하는 한국불자들의 신심에 다르마팔마는 감격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환희심에 태국 국왕으로부터 받은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흔쾌히 한국불교계에 기증했다. 훗날 이 진신사리는 조
1592년 8월1일 전투에서영규대사·조헌 등 연합군임진왜란 첫 승리 이끌어 ▲영규대사 진영. 1592년 8월1일 이른 아침, 승병장 영규대사와 유생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조선 관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청주성 탈환을 위한 총공세를 감행했다. 7월 하순부터 계속된 조선 연합군의 저돌적인 공격에 청주성을 점령하고 있던 왜군들은 당황했다. 왜군으로선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조선군의 저항이었다. 1592년 4월14일 부산성 함락한 이후 충청도 보은과 청주, 진천까지 함락하고 한양을 향해 진격할 때까지 조선 관군은 이렇다 할 전투 한 번 치루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이무렵 왜군은 한양 진격에 앞서 청주성에 수천 명의 병력을 잔류시켰다. 청주성
1963년 7월16일 경북 의령서광배에 기록된 명문 해석으로조성연대·조성자 등 공식 확인현존하는 최고의 금동 부처님 ▲국보119호 연가칠년명금동불입상. 1963년 7월16일,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의 도로공사현장. 강씨 여인은 이날도 아침 일찍 공사현장에 나와 돌을 날랐다. 여인의 몸으로 하기에는 쉽지 않은 막일이었지만 강씨는 감지덕지였다.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홀몸으로 시어머니와 다섯 남매를 키우기 위해서는 이것저것 가릴 것이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지 몇 시간이 지났을 즈음 강씨는 공사장 돌무더기 사이에서 밝은 광체를 내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돌무더기를 더 파헤치자 그 속에는 놀랍게도
태종6년 7월6일 실록에 기록가뭄 심해 백성 고통 커지자흥천사서 기도, 비 내리게 해 ▲장원심 스님이 비가 내리도록 기도했던 흥천사 전경.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1406년 7월, 태종은 깊은 시름에 빠졌다. 몇 달째 가뭄이 계속되면서 기근과 고통을 호소하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종묘와 산천에 기우제를 지냈지만 하늘은 번번이 이를 외면했다. 태종은 백성과 고통을 분담하기 위해 수라상을 반으로 줄였고, 그렇게 좋아하던 술도 먹지 않겠다고 금주를 선언했다. 태종은 또 극형에 해당되는 참형과 교형의 죄수들을 제외하고 옥사에서 모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이쯤 되면 하늘도 태종의 바람을 들어줄 듯 해보
1963년 6월11일 호치민서 몸을 태워 베트남 평화발원 독재권력 붕괴시키는 계기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 말콤브라운이 촬영한 이 사진은 1963년 세계의 보도사진에 선정됐다. 1963년 6월11일, 베트남 호치민시를 가로지르는 대로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틱낫한 스님의 은사이자 베트남 불교계의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틱광둑(Thich Quang Duc 1898~1963) 스님이 소신공양을 단행한 것이다. 이 장면은 다음 날 언론을 통해 보도됐고, 세계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틱광둑 스님의 소신공양은 독재정권의 불교탄압에 대한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또 베트남을 강탈하려는 미국 등
1962년 5월31일 정부 제정국가가 사찰관리감독권 가져화장실 짓는데도 허가받아야 ▲박정희 군사정부는 통합종단 출범과정에서 비구측이 종단의 중심에 설 수 있도록 불재법 제정 등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1962년 5월31일 박정희 군사정권은 관보를 통해 ‘불교재산관리법(이하 불재법)’을 공포했다. 일제시대 사찰령을 근간으로 해 제정된 이 법은 사찰에 대한 관리감독권을 국가에 두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사찰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등록하지 않은 사찰은 불법으로 간주했다. 사실상 불교계의 자율권을 박탈하는 악법임에도 당시 비구 측이 중심이 된 통합종단은 크게 반발하지 않
1895년 4월23일 고종 단행해금 주체 두고 학계서 논란“입성금지 재해석돼야” 주장도 ▲스님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될 당시 남대문 전경. 사진=한국불교100년 1895년 4월23일 조선 고종은 스님들의 도성출입을 윤허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총리대신 김홍집과 내무대신 박영효는 이날 ‘이제부터 승도(僧徒)들이 성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던 이전 금령을 해제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고, 고종은 이를 허가했다. 이에 따라 조선시대 불교탄압의 상징으로 대표되던 ‘승려도성출입금지’는 마침내 해제됐다. 스님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는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 동안 학계에서는 이보다 누가 도성출입금지 해
1993년 4월1일 전차부대서보급창고 좁다며 법당 폐쇄불자 장병은 다른부대 전출 ▲17사단 훼불사건을 보도한 법보신문 1993년 4월12일자 1면. 1993년 4월1일 불교계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17사단 예하 전차대대장인 조모 중령이 부대 내 법당을 철거하고 불상을 무참하게 훼손한 뒤 야산에 버리도록 한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이 부대장은 그해 1월 부대창고가 좁다는 이유로 군수과장이었던 선모 대위에게 군법당을 폐쇄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선 대위는 법당에 봉안돼 있던 불상을 쌀 포대에 담아 법당 뒤편 야산에 버렸다. 그런가하면 이 부대장은 부처님오신날 불자사병들이 법당 주변에 연
1918년 3월10일 출판한국불교사 자료 총망라10년간 노력 끝에 결실근대사서 중 최고 역작 ▲상현 이능화 거사 “(한국불교) 12종파의 연혁과 900개 사찰의 유서가 조각조각 난 채 파묻혀 있고, 먼지더미 속에 버려져 있었으므로, 귀가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눈이 있어도 볼 수 없었다. 재주가 없는 내가 이를 염려하여 어리석음을 무릅쓰고 일을 시작하였다.” 1918년 3월10일. 상현 이능화 거사는 10년간의 각고 끝에 마침내 출간한 ‘조선불교통사’의 서문에서 책을 쓴 이유에 대해 이렇게 밝혔다. 총 2300여 쪽에 상중하 3권 2책으로 순한문체로 구성된 이 책은 한국불교 1600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근대기 최고의 역작으로
1908년 3월6일 원흥사서초대 종정에 회광 스님각황사 건립·잡지 발간日 조동종과 연합은 한계 ▲원종 초대 종정 회광. 1908년 3월6일 서울 원흥사에 모인 불교계 대표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날은 한국불교가 지난 500년간 지속된 탄압의 역사를 청산하고 새로운 도약을 기약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모인 52명의 대표들은 원흥사에서 총회를 열고 마침내 원종 설립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또 초대 종정에 해인사 강백 이회광 스님을 추대했으며 총무부장을 비롯해 교무, 학무, 서무부장 등에 대한 조직도 구성했다. 원종은 출범과 동시에 산적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우선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한국불교계가 안고 있던 각종 제약을 극복하고
1981년 2월27일 통도사사미 84·사미니 77명 배출수계 통일·정체성 회복계율경시풍조 회복 과제 ▲제1회 조계종 단일계단 수계 산림에 참가한 스님들이 통도사 금강계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계·정·혜 삼학(三學) 가운데 하나인 계율. 부처님 당시 제정된 계율은 한국불교가 1700여년의 전통을 면면히 이어올 수 있게 한 근간이 됐다. 특히 “계율을 어기며 100년을 사느니 하루를 살더라도 계율을 지키겠다”는 신라 자장 스님과 같은 서슬 퍼런 지계 정신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 승가 전통의 구심점이 됐다. 그러나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전통이 크게 흔들렸다. 특히 왜색불교의 영향을 받아 출가수행
1884년 2월9일 급사일본서 선진문물 전파근대 개화가들의 스승고종의 특사로도 활동 1884년 2월9일 일본 동경에서 비보가 날아들었다. 일찍이 이동인 스님과 함께 일본의 선진문물을 조선에 알리던 전령이자 개화 사상가였던 무불 스님이 일본 섭주 신호(攝州 神戶) 병원에서 원인모를 병으로 급사했다는 것이다. 그의 나이 겨우 34세였다. 뜻밖의 사건이었다. 특히 스님과 친분을 쌓고 일본의 정세를 들으며 조선의 개혁을 치밀하게 준비했던 김옥균, 박영효 등이 중심이 된 개화당 세력들은 충격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순간 자신들이 추진하고 있는 조선의 개혁에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로부터 10개월 뒤인 1884년 12월 개화당이 청의 간섭과 수구세력의 척결을 시도한 갑신정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