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좌우합작운동 앞장중도적 삶 일관…69년 입적 성숙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한 이후 중경의 임시정부가 상해로 옮기고 조국의 앞날을 염려하던 중 같은해 12월 1일 전북 옥구비행장을 통해 입국했다. 임시정부 요인이었던 홍진, 조성환, 신익희, 조소앙 등과 함께 입국한 성숙은 다음날 서울에 도착했다. 이후 좌우합작을 주창하며 몽양 여윤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하고 중앙위원에 뽑힌 성숙은 해방정국에서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는데 앞장섰다. 이후 1955년 조봉암 등과 접촉하여 진보당 추진위원회에도 관여했으나, 훗날 5·16 군사반란 이후 이른바 통일사회당 사건으로 다시 옥고를 치러야만 했다. 성숙은 57년 11월 16일 근로인민당 재건사건이 불거지면서 근로인민당재건 당 총책의 혐의를
동필무에 연합국회의 소식 듣고김구에게 이승만 자격 박탈 요구 성숙은 예정에 없던 청년운동가의 방문에 순간 여러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으나, 이내 흐뭇한 마음이 되어 손수 차를 끓여 대접했다. 성숙은 이때까지만 해도 광동꼬뮨 사건으로 인해 소위 진짜 빨갱이라는 의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말하고 행동하는 것 하나 하나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김준엽 역시 공산주의에 대해 먼저 물었다. 성숙은 “내가 진짜 공산주의자라면 극좌파와 함께 연안으로 가서 투쟁을 했지, 여기서 국무위원을 하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국내의 절대 다수가 무산 대중인데 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는 나라를 운영할 수가 없네, 그렇다고 해서 계급 투쟁이나 폭력혁명을 해서는 절대 안되네.”
좌우 참여로 임시정부 역량 강화42년 내무차장·43년 선전위원 성숙이 1941년 12월 해방동맹을 임시정부에 참여시킨 이유는 오직 일본이 패망한 이후 독립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한 가지 뿐이었다. 따라서 현재 활동중인 독립운동단체 중에서 일반 대중들에게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영향력이 큰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모여 임시정부의 힘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 또한 좌우의 노선이 다르기는 하지만 당을 하나로 하자는 것이 아니라 정부를 같이 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크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성숙의 예상대로 해방동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류자명의 조선혁명자연맹과 신익희를 비롯한 전위동맹 맹원들도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러나 좌파의 가장 큰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민족혁명당의 김원봉만은
광복군 중심의 통일편제 주장독립운동세력 단결 초석 다져 조선의용대는 제1, 제2, 제3지대까지 만들었다. 그러나 성숙은 마음속으로 김원봉에 대한 생각이 교차할 수밖에 없었다. 김원봉은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기 위해 강택의 남의사로부터 돈을 받았던 것이다. 성숙이 볼 때 남의사는 파쇼단체이자 악명 높은 정보기관이었기 때문이다. 장개석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성숙으로서는 남의사의 돈을 이용하는 김원봉과 생각이 전적으로 같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의용대는 또 두 세력이 상존하는 구조였다. 국민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국민당에 가까운 사람들이 우파를 이뤘고, 그 반대세력이 좌파를 이루었다. 당시 함께 일했던 한빈과 김학무 김창만 등은 훗날 좌파 혁명가들이 조직한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의 간부로 활약할 정도로
“역량 결집·자주독립 완성”강조38년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활동 성숙은 해방동맹을 결성하면서 “지금의 조선혁명은 무엇보다도 자주독립을 쟁취하는 민족적 과업에 있으며, 이러한 민족적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각계 각층의 혁명세력을 결집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전선통일을 지향하는 궁극적 목적은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진정한 민주독립국가를 건설하는데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내외에 공표했다. 이에 따라 해방동맹은 민족운동진영의 전선통일을 당면한 주요목표로 설정하고, 일제를 타도한 후에 민주공화국을 건설하는 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아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때문에 해방동맹은 협동전선사업에 역점을 두었으며 이러한 활동은 훗날 임시정부에 참여한 후에도 임정 산하의 정당과 단체들을 합작하는데 있어서 빼놓을
우후죽순 혁명단체 통합 주장주의주장 떠나 이념문제 유연 1927년 광주봉기에 참여했다가 실패의 쓴맛을 본 성숙은 28년 상해로 주거지를 옮긴 후 8년여 동안 진보적 문필가로 활동하며 이론가로써의 면모를 완벽하게 갖출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광서성 성립사범대학 교수로 재직하다 34년 다시 상해로 돌아온 성숙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제1선에 뛰어들었다. 이 무렵 중국사회도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의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하자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운동이 중국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반일통일전선의 결성을 위한 국공합작이 36년 들어 다시 급속히 진행되고 있었다. 성숙은 독립운동의 일선에 나서면서 각지에서 활동하는 진보적인 독립운동가들을 규합해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조직했다. 박건웅과 신익희의 사위인 김재호,
파시즘-사회주의 등 다수 집필저서 단 한 권도 전해지지 않아 성숙이 상해에서 집필활동을 통해 모은 원고료로 일정한 벌이가 없는 혁명가들을 도와주었을 때, 광동 꼬뮨과 해륙풍 소비에트에 참여했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김산과 오성륜도 도움을 받았다. 오성륜은 한때 성숙의 처형과 연애를 하며 사랑을 나누기도 했으나, 30년대에 만주에서 중국공산당과 연결된 항일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끝내 체포되었고 일제의 회유로 결국 전향해 만주국 치안부(또는 관동국 특무대) 고문으로 일하기도 했다. 성숙으로서는 절친한 동지 한명을 잃은 셈이다. 성숙이 언론과 출판일에 종사하면서 식민지의 학생 문제 등 여러 가지 주제로 작성했던 논문을 엮어 낸 책은 무려 20여 권에 달했다. 한국혁명의 중요한 이론적 지도자였던 성숙은 비밀이 요구
집필과 번역 활동에 전념중국문화총동맹에 가입 성숙과 두군혜는 광동꼬뮨이 진압된 이후 잠시 은둔생활을 하다가 결혼하여 상해에서 살림을 차렸다. 성숙은 상해에서 신혼살림을 차렸으나, 광동에서 함께 투쟁했던 동지들을 잊지 않았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지원해 줄 돈을 벌기 위해 글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지냈다. 이 때는 조선청년들의 중국 내 활동이 상당히 위축된 시기였다. 따라서 경제적인 면에서는 먹고 자고 하는 기본생활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사정이 좋지 못했다. 따라서 성숙은 가명으로 책을 쓰고 번역을 하면서 돈을 마련했고, 그 돈이 동지들의 먹거리를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성숙은 상해에서 새 살림을 차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광동에서 실종됐던 김산을 만났다. 겨우 목숨을 부지해 상해로 잠입한 김산은
한달여 답장 없자 석달만에 귀국국민당에 쫓겨 아가씨 집에 피신 성숙은 김산에게 “자네가 아직 여인을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아마도 자네가 연애를 한다면 나보다 훨씬 더할 것”이라며 스님의 신분으로 수행을 했던 자신이 연애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상황을 설명하며 이해를 구했다. 성숙은 그러면서도 전과 다름없이 열심히 활동했으나, 그의 풍부한 학식과 순수한 열정에 눌려 그동안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반대파 사람들은 “김충창은 지나치게 낭만적이어서 독립투쟁과 혁명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산은 성숙을 이해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결국 성숙을 지지하고 두 연인을 돕기까지 했던 김산은 성숙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혁명가도 남자이고 인간이지 않은가. 어찌되었건
세련되고 개방적인 광동아가씨절친한 동지조차 ‘배신자’ 질타 성숙은 출가하기 전 고향인 평안도 철산에서 이미 결혼을 했고 지금 조선에는 처와 자식이 둘이나 있는 상황이었다. 성숙은 열 여덟 살 때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장남인 성숙이 독립운동에 나설 뜻을 비추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집안의 대를 잇겠다는 마음에서 강제로 인근 마을의 처자와 맞선을 보고 서둘러 식을 올리게 했던 것이다. 그렇게 집안 어른들의 뜻을 따라 부부의 인연을 맺은 이가 정 씨 부인이고 정 씨 부인과의 사이에 자식이 둘이나 있었으니, 사연이야 어찌 되었건 출가 승려의 신분을 떠나서라도 유부남이 아가씨와 열애에 빠진 꼴이 되었다. 성숙의 사랑은 1927년 늦여름 중산대학에서 시작됐다. 상대는 여섯 살 아래인 두군혜였다. 두군혜는 중산대학
국·공 분열 때 무한정부 지원1927년 학교서 첫 사랑 만나 성숙은 광동에서 본격적으로 정치활동과 독립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유학한국혁명청년회를 결성하고 기관지 『혁명운동』을 발행하면서 민족해방의 당위성을 역설하는 한편, 북경에서부터 인연을 맺어 의열단 활동을 함께 했던 김원봉과 협의를 거쳐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이에 따라 1926년 성숙과 뜻을 함께 한 김원봉을 비롯해 의열단 단원 12명이 황포군관학교 4기로 입학해 민족해방운동에서 대중운동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군사이론 그리고 실전 등을 학습한 이후 10월에 졸업했고, 그동안 성숙과 김산(장지락)은 황포군관학교와 중산대학 졸업생들을 의열단에 가담시키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리고 단원이 100명을 넘어서자 광주에 모여든 청년 활동가들을 정파와
독립운동 계파간 결속에 주력‘혁명운동’ 창간, 주필로 활약 1925년 겨울. 성숙이 혁명 활동을 위해 광동으로 떠날 때 김산(장지락) 역시 동행을 결심했으나, 서로 다른 길을 택해 독립운동에 매진하기로 하고 아쉬운 이별을 했다. 성숙이 광동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길 무렵 광동은 시베리아나 만주 등 곳곳에서 옮겨오는 조선 청년들의 발길로 분주했다. 이른바 광동꼬뮨의 서곡이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성숙이 봉선사를 떠나 북경으로 유학한 1923년, 중국에서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형성되었었다. 북경 민국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그해 11월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하는 소위 ‘국공(國共)합작’이 이뤄졌고, 소련의 지원을 받으며 광동을 중심으로 봉건군벌을 타파하려는 북벌주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
민족주의 사상 바탕 독립 주창의열단에서 김원봉과 첫 만남 성숙은 창일당 기관지 『혁명』을 한글판으로 발행하기 위해 직접 판을 써서 석판으로 인쇄하는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점차 시력을 잃어갔다. 보다못한 창일당 동지들이 치료를 권했음에도 차일피일 미루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아 자리에 주저앉는 일을 겪고서야 마지못해 병원을 찾았다. 성숙의 눈을 검사한 북경협화의과대학 의사는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눈이 이렇게 됐소. 조금만 늦었더라면 이대로 실명하고 말았을 것이오”라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성숙은 그저 헛웃음만 지을 뿐, 머릿속으로는 기관지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처럼 실명 위기에 이르면서까지 열정적으로 발행했던 『혁명』은 대부분
임시정부 내분 상황에 비통독립운동세력의 통합 강조 성숙은 어느날 상해를 떠나 소련으로 가는 길에 유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북경에 들른 원세훈과 신숙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원세훈과 신숙은 상해임시정부와 이승만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당시 상해임시정부는 개조파와 창조파로 나뉘어 싸움이 한창이었고, 그 여파는 이미 북경까지 미치고 있었다. 사실 상해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3일 발족한 이후부터 내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조선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맡겨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참가자들의 지역감정과 이념적 방향의 차이 그리고 독립투쟁의 방법을 놓고도 노선의 차이가 심했던 상황에서 그 일이 발단이 되어 내부 분열을
금강산 유점사 거쳐 중국행창일당 가입하며 본격 활동 봉선사에 머물던 김봉환, 김규하, 김정완, 윤종목, 차응준 등 다섯 명의 다른 스님들과 함께 길을 나선 성숙은 금강산으로 향했다. 해제철을 맞아 만행을 나선 것으로 위장했으니, 다른 절을 찾아가는 것처럼 해야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금강산에 무슨 연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호형호제하며 지내던 운허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공부했던 인연이 있어서 그쪽을 거쳐가기로 했던 것이다. 여름과 가을 사이를 오가는 날씨가 조금 덥기는 했어도 힘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일행은 산길을 돌고 돌아 3일만에 유점사에 닿았다. 유점사에는 공부하는 스님들이 생각보다 많았고, 운허에게 듣기는 했어도 공부하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그리고 유점사에는 학승
가족에 하직…속가에서 하룻밤안거 끝난 시기 만행 위장 출발 성숙은 1923년 4월 8일 비구계를 받고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으나, 이때부터는 경전공부보다 중국 유학 준비에 바빴다. 사실 말이 유학이지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한 돌파구였고, 일본 경찰의 감시에서 벗어나려는 망명이기도 했다. 운허와 성호를 차례로 만나 중국행을 알리고 난 성숙은 얼마 후 속가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경기도 고양시를 찾았다. 성숙의 가족들이 살고 있는 이 집도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특히 그들을 따돌리고 유학길에 오르기 전에 마지막으로 찾은 터라 가족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앞서기도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 마당에서 놀고 있던 딸 숙녀가 먼저 인사를 했다. 성숙은 딸을 가만히 안아 주었다
화상이 “중도 잃지 마라” 당부운허·성호에게 북경유학 알려 운암 김성숙은 1923년 경기도 양주군 소요산 자재암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사진은 당시 받았던 계첩. 월초 화상은 성숙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는 듯,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둘 사이에는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의 고요함이 이어졌다. 짧은 시간의 침묵을 깬 이는 월초 화상이었다. “그렇다면 네 가슴속에서 그토록 용솟음치고 있는 그 뜨거운 용암을 한 번 원 없이 분출해 보거라. 하지만 성숙아 네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승려라는 점은 잊지 마라. 언제 어디서나 중도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고, 항상 백성의 편에서 민족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화상의 눈가에는 비칠 듯 말 듯한 물기가 고였
강원에서 중도 도리 배우고유학 준비하면서 주변 정리 성호에게 출가를 권하고 봉선사로 돌아온 성숙은 공부에 매진했다.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에 투신할 마음을 굳히면서 어떻게든 지금 하고 있는 불교공부를 마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때부터 밤잠을 줄여가며 경전을 보기 시작했다. 보통 강원의 교육과정이 사집과는 2년, 사교과는 4년에 걸쳐 이수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성숙은 이미 사미과를 공부할 때도 남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보이며 2년 과정을 6개월 여만에 마친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남들보다 짧은 시간에 『서장』『도서』『선요』 등 사집과 과정을 이수하고 사교과 공부를 하고 있었기에 그 과정만은 마치고 싶었던 것이다. 한문에 통달했다고 할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었던 성숙은 공부하는 속도나 경전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부처님 가르침 배우고 익혀전하는 것처럼 좋은 일 없다” 성숙이 야심한 밤에 운허를 만난 곳은 광릉천변 3·1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당시 ‘조선독립단 임시사무소’명의의 격문을 등사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등사기를 짊어지고 왔던 봉선사 뒷산 약수터였다. 운허와 단둘이 마주한 성숙은 “월초 화상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출가인연을 맺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역시 독립운동의 꿈을 갖고 집을 나섰다가 이렇게 출가하여 절에 있으나, 아직 그 꿈을 접지 못했기에 잠시 뵙자고 했습니다”며 운허를 찾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성숙과 특별하게 가까이 지내던 사이가 아니었기에 잔뜩 긴장했던 운허는 그때서야 경계심을 풀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나도 아직은 쫓기는 몸이라 이렇게 스님의 모습으로 살고 있으나, 언젠가 때가 되면 다시 독
운허의 출가-봉선사 인연성숙의 지난 행적과 흡사 1921년 가을부터 이듬해인 1922년 4월까지 국내에서는 서울청년회, 조선청년회연합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사상이 빠르게 전파되고 있었으나, 그 안에서 얽혀 있던 사회주의자,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들은 서로 다른 이념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다툼을 벌이는 등 아직은 혼란한 면이 많았던 시기였다. 성숙은 봉선사 강원에서 사집 과정을 마치고 이제 막 사교 과정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으면서도, 밖으로의 활동 폭을 넓히기 위해 1922년 1월에 결성된 무산자동맹회에 가담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성숙은 이 시절 또 다른 한사람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는 다름 아닌 훗날 대강백이 되어 봉선사는 물론 한국불교발전에 지대한 공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