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원(體元)은 몽고간섭기인 14세기 전반 해인사를 중심으로 인근 법수사·반룡사·동천사 등 경상도 일원에서 활약한 화엄종 승려였다. 그는 1320~1330년대 ‘화엄경관음지식품’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백화도량발원문약해’ ‘삼십팔공덕소경’ 등의 화엄종 관음신앙에 관한 불서들을 펴냈다. 그 가운데 특히 주목받은 저술은 의상의 찬술로 전해져온 ‘백화도량발원문’을 주해한 ‘백화도량발원문약해’였다. ‘백화도량발원문’은 의상이 당에서 귀국한 직후 낙산을 찾아 관음진신을 친견하고 지은 것으로 전승되어 왔는데, 체원도 의상의 진찬임을
11세기 후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화엄종을 개혁하고 천태종을 개창함으로서 중앙불교계는 교종 계열의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 계열의 천태종과 조계종 등 4개 종단으로 개편되었다. 특히 화엄종에서는 의천이 고려 초기에 균여의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서 종단의 주류가 의천의 문도들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의천이 세상을 떠난 뒤 70년만인 의종 24년(1170)의 무인들의 정변, 그리고 뒤이은 명종 26년(1196)의 최충헌의 집권을 계기로 하여 불교계는 또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중앙불교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선종 계
앞호에서 혁련정의 ‘균여전’에서 균여(923~973)는 해당비구(海幢比丘)나 선재동자의 화신, 그의 세 살 위의 누나 수명은 덕운비구(德雲比丘)의 화신이라는 설화를 언급하였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찾아간 52인의 선지식 가운데서 여섯 번째로 만난 인물이 해당비구였고, 첫 번째로 만난 인물이 덕운비구였음을 보아 이들 남매가 일찍이 선재동자의 구도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균여의 저술들 가운데 ‘입법계품초기’ 1권이 포함되었음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균여전’에는 균
고려초기 원통수좌 균여(923~973)가 광종(950~975)의 불교개혁정책 추진에 호응하여 화엄종 교단의 통일, 화엄교학체계의 재정리, 보현신앙의 대중화 등 3개 분야의 업적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앞 회에서 서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균여의 불교 업적 가운데서 특히 의상의 관음진신 친견의 구도적 신앙과 낙산사 창건에 얽힌 연기설화의 성립과정과 그의 역사적 배경을 추구하는 문제와 관련된 사실로서 균여의 보현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신앙은 다른 문제에 비하여 별로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균여가 중국 화엄종의 4조로 추앙되
앞서 의상의 낙산사 창건연기설화에서 보여준 관음진신 친견의 구도적 신앙의 경전적 근거는 ‘화엄경 입법계품’ 특히 796~98년에 한역된 ‘40권화엄경’이었는데, 이 경전은 화엄종 4조로 추앙된 징관이 주석한 ‘정원화엄경소’10권 ‘보현행원품별행소’1권과 함께 799년 범수에 의해 전래되어 신라 불교계에 유행하게 되었음을 추정하였다. 그리고 고려초기 균여가 징관의 ‘보현행원품별행소’에 의거하여 ‘보현행원가’11수를 지었고, 고려후기 체원이 ‘정원화엄경소’에 의거하여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2권 ‘화엄경관음지식품’1권을 저술한
3회에 걸쳐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와 익장(益莊)이 찬술한 ‘낙산사기문’(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조)의 내용을 분석한 결과 의상이 낙산사의 창건조사로 등장하는 연기설화는 역사적 사실성이 결여된 설화적 허구로 이해하지 않을 수 없음을 피력하였다. 그런데 이 설화의 내용은 사실성이 결여됐기 때문에 불교사 자료로서 폐기해버릴 무가치한 것이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비록 의상의 관음신앙 자체를 이해하는 자료로서는 당연히 제외되어야 하겠지만, 의상 이후 그의 불교가 전승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불교사 연구의 자료로서는 또 다른 의
의상의 관음신앙 자료로는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와 승 익장(益莊)이 찬술한 ‘낙산사기문’(신증동국여지승람 양양도호부조), 그리고 의상의 찬술로 전해져 온 ‘백화도량발원문’이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그런데 최근 기본적인 사료로 활용되어 온 이들 자료 가운데 ‘백화도량발원문’이 문헌학적인 검토를 통해 의상의 진찬일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됨으로써 의상의 관음신앙에 대한 이해는 원천적으로 재검토를 요구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백화도량발원문’은 고려 충숙~충혜왕대(1313~1344)에 활약한 체원(體元)이 충숙왕 15년(
의상의 관음신앙 이해에서는 ‘삼국유사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가 일찍부터 기본사료로 활용되었다. ‘낙산이성 관음정취조신’조는 조목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낙산사 창건과정에서 의상뿐 아니라 원효와 범일 등 다양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으며, 관음보살과 함께 정취보살이 같이 봉안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또한 고려 후기 몽골 침략 과정에서 관음신앙이 새롭게 주목받게 된 사실도 전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의상의 관음 진신 친견 설화의 부분만 발취해 해석하는 종래의 편의적 접근방법으로는 의상의 관음신앙 진실과 이후의 변화 과정, 낙산사 연혁의
의상은 당의 지엄으로부터 전수해 온 화엄학의 연구와 홍포에 일생을 바친 인물이었다. 670년 귀국 초에는 왕경의 황복사, 그리고 676년 부석사를 창건한 이후에는 태백산과 소백산 지역을 무대로 화엄학 전교와 제자 양성에 주력함으로써 교학불교의 주류인 화엄종 개조로서 길이 추앙받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부석사를 창건하면서 아미타신앙을 구현하는 가람구조로 설계함으로써 아미타신앙의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전승되었고, 동해 낙산에 관음 진신이 상주한다는 신앙을 정착시킴으로써 관음신앙의 확산에도 기여한 인물로 신봉되어 낙산에서의
지난 호에서는 의천의 ‘신편제종교장총록’에 의상의 저술로 수록된 ‘일승법계도1권’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1권’ ‘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1권’ 등 4종 가운데서 특히 ‘입법계품초기’와 ‘소아미타경의기’에 대하여 약간의 의문을 제기하고 재검토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입법계품초기’는 스승 지엄의 ‘입법계품초’에 대한 주석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지엄의 저술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또한 균여의 저술 목록 가운데서도 같은 이름과 권수의 ‘입법계품초기’ 1권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후반 의상이 당의 지엄으로부터 화엄학을 전래하고, 원효가 ‘화엄경’을 본격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화엄학은 신라 통일기의 새 불교를 대표하는 교학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에는 왕경과 지방에 다수의 화엄학승들이 등장하여 서로 다른 연구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제자 양성과 화엄학 전도에 주력하였던 의상의 법손들이 번성하게 됨으로써 이후 화엄학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법손들에 의해 의상의 화엄학을 조술하는 전통이 확립되었는데, 특히 의상의 주저인 ‘일승법계도’에 대한 주석이
문무왕 16년(676) 의상이 화엄종을 창립한 후 100여 년 지난 8세기 중엽 그의 법손들이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고, 중심인물이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불려진 신림이었다. 그런데 신림이 북악인 태백산 부석사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었을 때 남악인 지리산 화엄사에서는 연기가 ‘화엄경’을 사경하는 등의 활약을 전개하였다. 이즈음 화엄사에서는 ‘화엄경’ 석경판을 조성했는데, 오늘날까지 잔편이 전래되고 있다. 연기는 왕경의 황룡사 승적을 가졌다는 사실이 주목되는데, 황룡사에는 연기 이외에도 다수의 화엄학승들이 활동하고 있었음이
신라 불교사의 전성기인 중대(654~780)에는 다양한 불교학파들이 발전하는 가운데 새로운 불교인 화엄종의 학승들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특히 후반기인 750년을 전후하여 황룡사의 승적을 가졌거나, 황룡사를 무대로 활동하던 화엄학승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음을 앞에서 지적하였다. 이러한 학승들 가운데 특히 부석사를 중심으로 활약한 의상 계통의 법손들과 별개로, 화엄사를 중심으로 호남에서 화엄종의 발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학승으로 연기(緣起)가 있었다. 종래 화엄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구구한 설이 있었고, 화엄사의 창건주로
신라의 역사에서 ‘중대(中代, 654∼780)’ 126년간은 전성기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문화의 황금기였다. 정치·경제·사회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하였고, 종교·학술·예술 등 문화의 각 분야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성취한 시기였다. 3국 가운데 가장 약소했던 신라가 통일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됨으로써 한반도 주민들의 에너지가 일시에 응축하여 폭발한 결과였다. 이 시기 중국 대륙에서도 이른바 성당(盛唐)의 문화를 구가하던 때로 신라는 동아시아에서 당에 버금하는 문화국가로서의 위상을 자랑하기에 이르렀다. 고대문화 건설
앞에서 의상(625~702)의 10대 제자와 화엄 10찰의 문제를 중심으로 의상 법손들이 번성하였고, 화엄종이 신라 불교계의 주류로 등장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당시 불교계에서 화엄학을 연구하고 대승보살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의상의 법손들 이외에도 상당수 발견된다. 이른바 ‘비의상계’ 인물들은 의상계 법손들과 달리 종파를 형성하고 조직적인 교단 활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화엄학 연구가 후계자들에게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의상계 화엄종에 흡수되면서 점차 잊혀 갔다. 그런데 ‘비의상계’라는 표현은 의상계를 주류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교단 조직에 전념하였다. 그 결과 의상의 화엄교학은 10대 제자를 비롯해 많은 제자들과 법손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어 9세기 이후에는 주류 종파로 대두하게 되었다. 의상의 문도가 번성하고 화엄종이 융성했음을 나타내는 것이 ‘십대제자(十大弟子)’와 함께 거론되는 화엄대학의 ‘10산(十山)’, 또는 화엄종의 ‘10찰(十刹)’이라는 표현이다. 화엄의 ‘10산’, 또는 ‘10찰’에 대해 언급한 자료로는 다음 두 기록을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교단 조직에 전념하였다. 귀국 초기에는 출가본사인 왕경의 황복사(皇福寺)에서 소수 제자들을 대상으로 ‘일승법계도’를 중심으로 화엄교학을 강의했다. ‘일승법계도’에 대한 의상 법손들의 주석을 집성한 ‘법계도총수록’(권상1)에 의하면, 문무왕 14년(674) 표훈과 진정 등 10여 인에게 ‘일승법계도’를 강의했다는 기록에서 제자 양성에 대한 열의와 사제 사이의 진지한 면학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한 이후 효소왕 원년(702) 입적할 때까지 32년 동안 제자 양성과 화엄종 교단의 조직에 전념하였다. 의상의 교화 활동은 근엄 성실한 출가 수행자로 일관하면서 저술이나 개인적 수행에 머물지 않고 제자 양성을 통한 교단 조직을 중심으로 하였다. 이러한 교화 활동은 평생 도반이었던 원효(617~686)와 비교할 때 특히 두드러진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원효는 환속한 거사의 신분으로서 저술과 개인적 교화 활동에 전념하고 제자의 양성이나 교단의 조직적 활동을 전개하지 않았다.
의상(625~702)은 문무왕 10년(670) 당에서 귀국하였는데, 마침 신라와 당 사이의 갈등이 전면적인 전쟁으로 폭발하는 위기 상황이 발생, 당군의 해상 침공 계획을 본국에 전해주기 위하여 급히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당군 침입의 대처 방안을 강구하는 가운데 불교적인 면에서는 밀교계통인 신인종 승려인 명랑의 문두루법(文豆婁法)으로 당군의 격퇴를 기원하였고, 다음 해에도 역시 같은 방법으로 기원하였다. 처음 당군의 침공 사실을 전해왔던 의상은 그 기원 법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의상에게 당의 침공 계획 정보
의상(625~702)은 668년 7월15일 화엄교학의 요체를 담은 ‘일승법계도’를 찬술, 스승 지엄에게 인가를 받고, 마침내 당 유학의 소기 목적을 달성하였다. 661년 당으로 출발하여 다음 해부터 7년 동안 지엄의 문하에서 수학한 결과였다. 그동안 지엄은 종남산의 지상사(至相寺)에서 장안의 운화사(雲華寺)와 청정사(淸淨寺)로 옮겨 머물기도 하였는데, 의상도 충실한 제자로서 그를 따라 옮기면서 수학하였다. 의상이 ‘일승법계도’를 지어 스승의 인가를 받은 지 약3개월 뒤인 10월29일 지엄은 67세를 일기로 하여 청정사의 반야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