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닷타 장자 조카…기원정사 보시 계기로 출가공 이치 깨닫고 실천…누구보다 많은 공양받아 ▲삽화=김재일 화백 “천신이여, 마음껏 비를 뿌리게나.” 수행을 완성해 이상적 경지에 도달한 불제자의 심경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한 마디이다. 이 말 속에는 깨달음을 획득해 완벽한 상태에 놓인 자의 자신감이 담겨 있다. 설사 천신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비를 쏟아 붓는다 한들 자신의 정사(精舍), 말하자면 깨달음으로 무장된 자신의 심신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을 만큼 안정되고 견고하다. 수행승으로서의 최고의 자신감이다. 초기경전에서 이 말은 주로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불제자들이 자신의 심경을 표현할 때 사용되곤 하는데, 특히 대표
이발사 출신의 하층민…석가족 귀족 쫓아 출가철저한 지계행…1차 결집서 율 송출 역할 맡아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 당시 인도 사회는 사성계급이라는 엄격한 신분제도 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바라문교의 사제계급 브라흐마나, 왕족 크샤트리야, 상업이나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 바이샤, 그리고 이들 세 계급을 섬기며 굳은 일을 도맡아 하는 노예 수드라, 이 4종의 신분 가운데 어느 신분에 속하는가에 따라 삶은 크게 달랐다. 특히 노예계급인 수드라 출신은 평생 가난하고 비참한 삶 속에서 차별받는 인생을 살아야 했다. 율 제정될 때마다 암송·실천 하지만 부처님은 세속에서의 신분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최상층인 브라흐마나 출신이든 최하
아만심으로 장로마저 무시…승단불화의 원인부처님 끝없는 자비에 잘못 깨닫고 용맹정진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의 10대 제자, 그 가운데서도 2대 제자로 꼽히며 부처님과 동료 수행자들로부터 깊은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던 것은 사리풋타와 목갈라나였다. 그 누구도 이 두 사람 앞에서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한 사람, 챤나는 달랐다. 챤나는 사리풋타와 목갈라나를 종종 비방했고 본인들을 앞에 두고 당돌한 충고까지 서슴지 않았다. “나는 부처님이 왕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셨을 때 함께 했던 사이요. 부처님과는 그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란 말이요. 아시겠소? 그런데도 당신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부처님의 최고의 제자인양 행세하
불의 신 숭배했던 마가다국 원로 바라문제사도구 버린 후 삭발하고 삼보에 귀의 ▲삽화=김재일 화백 사르나트에서의 초전법륜과 베나레스에서의 야사 및 그 친구들의 교화. 이들에게 전도선언을 하신 부처님은 그 길로 자신은 마가다국의 우루웰라 마을로 발걸음을 옮기셨다. 우루웰라는 깨달음을 얻기 전 부처님께서 6년간 머물며 고행을 했던 곳이자 깨달음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60여명의 제자를 거느리며 이제 막 승가의 기초를 형성한 시점에 부처님이 다시 이곳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구체적인 사정은 알 길 없지만, 이곳에서 이루어진 부처님과 캇사파 3형제의 만남을 통해 그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부처님, 3500가지 신통력 보여 당
아버지 파세나디왕 폐위하고 코살라국 찬탈어머니 고향 사캬국서 받은 멸시 피로 갚아 ▲삽화=김재일 화백 “왕이시여, 저쪽 히말라야 산기슭에는 한 정직한 민족이 있습니다. 예전부터 코살라국의 주민으로 부와 용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가계는 아딧차(Ādicca, 태양)이며, 태생은 사키야(Sākiyā)입니다. 저는 그런 가문에서 출가했습니다.” 이는 고타마 싯닷타가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기 전, 당시 최대강국인 마가다의 왕 빔비사라로부터 태생에 관한 질문을 받고 답한 말이다. 이 대답에서도 드러나듯이 사캬족은 자기 종족의 계보에 대해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사캬족의 시조는 아리아족의
쾌락의 본질 꿰뚫어보고 자유를 찾아 방황친구 54명 잇따라 귀의…불교 확산 계기돼 ▲삽화=김재일 화백 5명의 비구에게 초전법륜을 하신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새벽이었다. 좌선을 즐기시던 부처님은 피로를 느껴 잠시 쉬고자 경행을 하고 계셨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절규하듯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아, 싫다, 괴롭다, 너무나도 고통스럽다.”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본 부처님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한 젊은이였다. 무엇이 그리도 힘겨운지 그는 괴롭다는 말을 연발하며 주위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정처 없이 새벽녘의 산야를 헤매고 있었다. 잠시 그를 관찰하던 부처님은 경행처로부터 내려가 준비된 자리에 앉으셨다. 부처님이 바라보고 있는
불교 비난 일삼으며 불자인 아내 살해위협까지출가 사문으로서 수행에만 전념 아라한과 증득 ▲삽화=김재일 화백 불교가 발생한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의 종교계는 기존의 바라문교와 이에 대항하는 사문이라 불리는 다양한 사상가들의 등장으로 복잡한 상황이었다. 부처님 역시 사문종교가의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당시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던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했다. 그런데 배화교도였던 캇사파 3형제 그리고 회의론자 산자야벨라티풋타의 제자였던 사리풋타와 목갈라나 등의 대규모 귀의로부터 알 수 있듯이 불교는 등장 초기부터 다른 종교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불교교단의 급속한 발전은 타종교인들에 의한 불교 폄
불법에 심취한 남편 원망하며 오히려 출가부처님 가르침에 단박 깨달아 성자로 추앙 ▲삽화=김재일 화백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온 남편은 여느 때와 달랐다. 항상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며 다정하게 아내를 대하던 남편이었건만 그 날은 마중 나온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말없이 오랜 시간 사색에 잠겨 있었다. 저녁 밥상을 앞에 두고도 묵묵히 먹기만 할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 날 이후로 남편은 더 이상 아내에게 다정한 눈길을 보내지 않았다. 부부생활은 물론이거니와 만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건조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나에 대한 애정이 식은 것일까, 아니면 밖에서 무슨 안 좋은
친형 권유로 출가했으나 우둔함에 절에서 쫓겨나불법에 대한 굳은 믿음·정진으로 아라한과 증득 ▲삽화=김재일 화백 어느 날 부처님은 정사 앞에서 우왕좌왕 방황하고 있는 한 수행승을 발견하셨다. 얼마 전에 형 마하판타카(Mahāpanthaka)를 따라 출가했던 출라판타카라는 자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는 몹시 당황한 모습으로 안절부절 못하며 정사 주변을 헤매고 있었다. “출라판타카야, 왜 그러고 있느냐?”걱정이 되신 부처님은 다가가 자상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갑작스런 부처님의 출현에 그는 애써 억누르고 있던 감정이 폭발한 듯 울먹이며 대답했다. “형에게 쫓겨났습니다. 저보고 정사를 떠나 환속해버리라고 합니
싯다르타와 함께 고행한 다섯 수행자 중 한명승단 발전위해 사리풋타 등 후배에 자리 양보 ▲삽화=김재일 화백 “콘단냐야, 마침내 네가 깨달음을 얻었구나.” 깨달음을 얻은 첫 제자의 탄생에 부처님은 크게 기뻐하셨다. 자신의 가르침을 듣고 자신과 똑같이 깨달음의 문을 연 사람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 부처님에게 그 모습을 드러냈던 진리가 콘단냐에게로 이어졌다. 이제 그 진리의 빛은 세상 곳곳을 비추며 퍼져갈 것이다. 콘단냐의 깨달음은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스스로 깨달음의 경지를 체득했다는 것과 이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분명 또 다른 문제였다. 네란자라강변의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처
아난다·우파리와 출가…신통력으로 혹세무민 명예·재산 등 세속적 욕심 버리지 못하고 자멸 ▲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 만년,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사캬족의 멸망, 그리고 데와닷타의 반역이다. 친척과 관련된 이 두 가지 사건은 연로한 부처님의 마음을 더할 나위 없이 쓸쓸하게 만들었음에 틀림없다. 특히 데와닷타의 반역은 승가의 분열뿐 아니라, 당시 승가 최고의 외호자였던 빔비사라왕까지 죽음으로 몰고 갔던 불행한 사건이었다.데와닷타의 출신에 관해서는 전승마다 다르다. 남전에 의하면 부처님이 출가하시기 전 부부의 연을 맺었던 야소다라의 남동생이라고 하며, 북전에 의하면 부처님의 사촌동생인 아난다의 동생 혹은
싯닷타의 아내…아들 라후라 출가 후 자신도 귀의스스로에 엄격·참회하며 살아 구참괴제일로 불려 ▲ 삽화=김재일 화백 창문 밖으로 카필라왓투 거리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거리에서 탁발을 하고 있는 한 수행승을 향하고 있었다. 제대로 된 이별인사 한 마디 없이 자신과 자식을 남겨두고 떠나버렸던 남편의 등장에 그녀의 마음은 회오리치고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이 출가하기 전 부부의 인연을 맺었던 아내 야소다라이다. 일설에는 그녀의 이름을 밧다캇챠나(Bhaddakaccānaā), 혹은 라후라의 어머니라는 의미에서 라후라마따라고 부른다. 그녀는 사캬족 인근에 있던 콜리야족 숫파붓다왕의 딸이었다
산자야 제자서 앗사지 비구 만난 후 출가사리풋타와 더불어 부처님 2대 제자 칭송 ▲ 삽화=김재일 화백 지혜제일 사리풋타와 더불어 부처님의 2대 제자로 꼽히는 목갈라나. 목갈라나는 라자가하의 북쪽에 위치한 코리타 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코리타(Kolita). 인근 마을에 사는 사리풋타와는 어릴 적부터 함께 뛰놀며 자란 죽마고우였다. 부유한 바라문 가문에서 태어난 목갈라나는 유복한 청년기를 보내며 멋진 청년으로 성장해 가고 있었다. 그러던 16세의 어느 날 친구 사리풋타와 함께 산정제(山頂祭)를 구경하러 가게 되었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일까. 넘쳐나는 인파로 축제의 흥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그런
라지가하서 활동하던 거리의 유녀웃타라와의 인연으로 불법에 귀의 ▲삽화=김재일 화백 풍요롭고 활기찬 기운이 넘치는 도시 라자가하. 이곳에서 활동하던 유녀들 가운데 시리마라 불리는 매력적인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부처님의 시의(侍醫)로 유명한 지와카의 여동생이자, 역시 라자가하에서 이름을 떨쳤던 아름다운 유녀 사라와티의 딸이었다. 어머니의 미모를 쏙 빼닮은 시리마는 남자들의 마음을 뒤흔들며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랬듯이 그녀의 몸값 또한 하룻밤에 천금을 부를 정도로 치솟으며 사그라질 줄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그런 시리마에게 어느 날 흥미로운 제안이 들어온다. “보름 동안 제 남편의 시중을 들어준다면 1만5000금을 드
부처님의 법제자이자 외호자로 일생 보내승단에 죽림정사 보시…왕비 출가 허락도 ▲삽화=김재일 화백 다섯 개의 산이 주변을 둘러싼 아늑한 땅. 적절한 기후와 비옥한 토양으로 기근이 발생하지 않는 곳. 넘쳐나는 사람들과 물품으로 항상 활기가 넘치는 도시. 바로 부처님 당시 최대 강국이었던 마가다국의 수도 라자가하를 형용하는 말들이다. 전륜성왕의 땅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이 성의 왕은 빔비사라였다. 빔비사라왕은 어느 날 라자가하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누각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저곳을 살피며 거리를 내려다보던 왕의 눈길이 한 수행자에게서 멈추었다. 북적거리는 인파 사이를 뚫고 라자가하의 거
부처님 초청위해 아반티국서 파견돼 귀의출가의식 간소화 요청으로 불교확산 기여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께서 주로 활동하시던 갠지스강의 중류 지역. 이곳으로부터 저 멀리 서남쪽에는 아반티라는 나라가 있었다. 부처님이 생전에 이곳을 방문하셨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지만, 경전의 기술을 통해 부처님 생존 당시에 이미 이곳에 불법이 널리 퍼져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마하캇차야나, 즉 대가전연(大迦旃延)이라 불리는 훌륭한 제자의 활동 덕분이었다. 캇차야나는 원래 아반티국의 수도인 웃제니 출신이었다. 당시 웃제니는 팟죠타라는 왕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포악해서일까 아니면 용맹스러워서일까. 팟죠타왕은 이 두 가지
수닷타 장자 집에서 일하던 노예 출신어깨너머 듣게 된 법문에 진리 깨달아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 당시 인도 종교계는 바라문과 사문의 대립 구도였다. 바라문이란 베다를 중심으로 제식위주의 종교 활동을 하고 있던 기존세력이었으며, 사문이란 반(反)바라문이라는 공통된 입장 하에 유물론, 회의론, 숙명론, 요소설 등 제각기 다양한 설을 주장하는 자유사상가들이었다. 부처님 역시 사문 종교가 가운데 한 명이었다. 사람들은 바라문교의 전통적인 가르침 그리고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롭게 등장하는 수많은 주장을 앞에 두고 어떤 것이 진정 자신에게 평안을 안겨줄 수 있는 가르침인가 고민하며 방황했다. 부처
석가족 왕족으로 태어나 데와닷타 등과 출가50여년간 앉지도 눕지도 않고 수행에만 전념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의 명성이 고향 카필라왓투까지 전해지자, 부처님과 같은 종족인 석가족 젊은이들의 가슴은 두근거렸다.“우리 종족으로부터 부처님이 나타나셨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 무렵, 부처님의 사촌 동생인 마하나마·아누룻다 형제도 이 소식을 전해 들으며 출가의 뜻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처님이 석가족의 영역 근처에 있던 아누피야라는 마을에 머물고 계신다는 소식을 접한 두 사람은 흥분하여 진지하게 의논했다. “석가족으로부터 그렇게 훌륭한 분이 나오셨는데 우리 가문에서도 누군가 출가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
아내와 승단 귀의…출가 8일만에 아라한과 증득걸식·분소의·수하좌·진기약 등 사의〈四依〉 평생 실천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은 제자 가운데 누구를 가장 신뢰하셨을까? 오랜 세월 자신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시중을 들어주었던 아난다였을까, 아니면 법의 상속자라 칭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사리풋타였을까? 혹은 자신의 핏줄을 이어받은 아들 라후라였을까? 십대제자라 꼽히는 훌륭한 제자들을 중심으로 몇몇 이름을 떠올리다 보니, 유독 마음이 가는 이름 하나가 있다. 바로 마하캇사파, 즉, 대가섭(大迦葉)이다. 부처님의 10대 제자 가운데 한 명이자 두타제일(頭陀第一)이라 평가되는 마하캇사파야말로 그 누구보다 부처님으로부터 깊은 신뢰를
자신의 미모에 취해 부처님 가르침 비하욕망에 사로잡혀 음해 일삼다 죽임 당해 ▲삽화=김재일 화백 부처님과의 만남은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평안과 삶의 위안을 안겨 주었지만, 때로는 그 소중한 만남 속에서도 미처 진리를 발견하지 못한 채 탐진치의 우리 속에 자신을 가두고 고통의 시간을 보낸 안타까운 사례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간디야이다. 마간디야는 쿠루국의 한 바라문의 딸이었다. 빛나는 외모로 인해 어릴 적부터 사람들의 찬사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란 탓일까. 오만방자한 성품이 이를 데 없었다. 결혼 적령기에 이른 아름다운 그녀를 차지하기 위해 인도 곳곳에서 내로라 하는 집안의 청년들이 몰려들었지만, 그 누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