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란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빛이 가리면 곧 어둠이다. 밝은 대낮이라도 짙은 구름이 햇빛을 가리면 밤과 같은 어둠이 깔리는 것이고, 어두운 밤이라도 빛만 있으면 밝은 것이니, 어둠과 밝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한참 밝은 오후 2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 갑자기 짙은 먹구름이 덮이고 천둥 번개가 치면서 삽시간에 한밤중을 연상시키는 어둠이 되었다. 시계만 없다면 영락없는 밤중이다. 그러니 밝다거나 어둡다는 것이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장난에 지나지 않음을 실감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챙겨놓고 보면 모든 것이 마찬가지로, 본래부터 그 나름의 고유한 실체가 없이 생겼는가하면 변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내 16대조의 사당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사당 옆에
“한국, 국제사회에 더 많이 베풀수록 더 많이 얻을 것”이라는 말은 지난 11월 23일 한국에 온 헬렌 클라크 국제연합개발기구(UNDP) 총재가 신문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6·25전쟁으로 전국이 거의 폐허가 된 한국은 그 동안 국제연합을 비롯한 선진 여러 나라의 원조를 받으면서 경제발전을 위해 온 나라가 한 덩이가 돼 노력해 온 것은 우리 자신은 물론 세계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불과 반세기라는 그리 길지 않은 기간 동안에 경제개발과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아내는 기적을 이룬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공은 세계가 처음 경험하는 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1995년 세계은행의 원조대상국에서 제외됨으로써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는 나라에서 벗어났고, 지난 11월 25일을 기하여 선진
“너는 건강하게 자라서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대기업가가 되어 돈도 많이 벌고, 대통령도 되고.” “경쟁하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야. 그러려면 먼저 학교에서부터 일등을 해야 돼.” “너는 공부는 안하고 만날 TV나 보고 핸드폰으로 게임이나 하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부모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며 자란 아이들의 마음속에 우선순위 제일로 ‘나’라는 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사람은 태어나기가 바쁘게 오관(五官)을 통해 받아들인 갖가지 경험과 나름대로 익힌 지식이 쌓여 각자의 관념의 세계가 꾸며져 간다. 사람이라면 경험이 많거나 적거나 또 많이 배웠거나 적게 배웠거나 관계없이 나름대로의 관념의 세계를 가지고, 그것을 밑천삼아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삶을
사람들은 귀한 것일수록 소중하게 여기고 흔한 것은 별로로 아는 경향이 많다. 때문에 귀금속이라든가 명품이라고 하면 비싼 값을 치루고 라도 손에 넣으려 하고, 또 애써 손에 넣으면 이리 보고, 저리 보며 무척 만족해 한다. 반대로 우리의 주변에 흔하게 널려 있고 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은 별로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음은 물론,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돈을 함부로 쓰는 사람을 가리켜 “돈을 물 쓰듯 한다”고 하는 것도 물을 흔하고 하찮은 것으로 보는 데에서 비롯된 표현이다. 그런데, 30여 년 전만 해도 우리가 별로 관심도 갖지 않던 공기의 오염문제가 심각해져서 이제는 범세계적인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근년에 들어 물의 질과 양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이 또한 세계적인 관심의
노벨상의 계절인 탓이겠지만 요새 상(賞)에 관한 말이 많이 오간다. 우선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노벨 평화상 수상 결정을 둘러싸고 미국의 언론들은 “모두를 당황케 만든 이상한 노벨 평화상”이라는 등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가에서는 “오바마는 수상을 거부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필자 자신도 오바마 대통령에 대한 노벨 평화상 수상이 결정되었다는 보도를 처음 대했을 때 그 뉴스를 담은 텔레비전 자막을 본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바마 씨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것이 불과 9개월 전의 일일뿐만 아니라, 나의 과문의 소치인지는 몰라도 노벨 평화상에 걸 맞는 뚜렷한 업적이 있는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수상
주변을 돌아보면 한심스런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사람은 편리함을 위해 과학기술을 동원해 가전제품을 비롯한 갖가지 기기를 만들어 쓰고 있고, 또 새로운 기기를 많이 쓰는 것을 마치 현대생활의 상징처럼 생각하는 경향조차 없지 않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은 행여 뒤질세라 앞을 다투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기업들은 이에 편승해 몇 달이 멀다하고 새 제품을 쏟아낸다. 편리한 기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제 그것이 없으면 살아가기 어려울 만큼 기기에 중독돼 거꾸로 기기에 매어살다시피 된 것 같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60년대 초만 해도 몇 집에 한 대 정도 있던 TV가 언제부턴가 각 집에 한두 대 정도는 갖추는 필수품처럼 되었고, 그에 발맞추어 유선 무선 할 것 없이 TV 채널도 꽤 많아졌다. 그렇게
처서가 지나고 나니 아침저녁으로는 완연한 가을이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새벽녘부터 옥타브를 올리던 매미 소리가 뜸해지고, 가을을 알리는 풀벌레 소리가 그 자리를 메운다. 계절의 순환이란 무서울 만큼 정확한 것 같다. 이 뻔한 계절의 순환 속에서 사람들은 덥다거나 춥다거나 하고 가진 안달을 다 부리는가 하면, 봄가을의 짧음을 안타까워한다. 더워봤자 한 두 달의 일이요, 추위를 몰아오는 겨울도 지내고나면 아쉬운 것을, 막상 여름이나 겨울을 당하면 추위를 탓하고 더위가 싫어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계절이 더디게 간다고 불평이다. 아무튼 사람의 요사 방정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요새는 기상청의 일기예보가 제법 맞는 것 같다. 며칠 전의 예보에서 오늘은 약간의 비가 내릴 것이라고 하더니 용케도 맞았다. 이른 아침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져 간다. 그대로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직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진다는 진리뿐이다. 형체가 있는 물질에서부터 형체가 없는 명예나 권력에 이르기까지 예외 없이 모두 변하고 언젠가는 사라져 없어진다. 흔히 입에 오르내리는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는 말도 같은 뜻을 나타내는 말이다. 구태여 폴 케네디(Paul Kennedy)의 명저인 『강대국의 성쇠(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를 들출 것도 없이 결코 쇠망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었던 로마제국이라든가 오토만제국도 흔적 없이 사라져 이제는 옛 이야기의 한 토막으로 남아있을 뿐이고, 유니온 잭(Union Jack)이 나부끼는 곳에서는 해가지지 않는
중복이 지난지도 벌써 열흘 정도 되고나니 매미소리가 한결 구성지다. 여느 해 이맘때와 마찬가지로 어김없이 매미며 잠자리 그리고 하루살이 등 여름 곤충들이 제철을 맞아 모습을 드러내고 활개를 친다. 너울어진 녹음아래 이들 곤충들이 소리하고 춤추면 여름은 바야흐로 복판에 온 셈이다. 녹음은 이제 짙푸르다 못해 오히려 검정색을 연상시킬 정도로 농익었고, 매미소리는 구성지다 못해 애절하게 들리기까지 한다. 잠자리나 하루살이들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이 공중을 날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시간은 절로 간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힐 정도로 더운 기운이 밀려와도 이들 여름의 풍경을 보고 있노라면 더위조차 잊는 수가 많다. 거기에 미풍(微風)이라도 곁들여주면 바로 상팔자가 된다. 그런데 생각하면 이들의 활
계율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일뿐, 거창한 이름이나 말이 필요 없는 일이다. 특히 오계(五戒)는 불교의 계율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모든 사람들이 지켜야 할 사회규범과도 통하는 내용이다. 결국, 오계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규범이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다. 오직 불교에서 말하는 오계는 그 관념적 바탕과 기술적 내용에 있어 단순한 오계적인 내용을 훌쩍 뛰어넘은 것이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원래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계가 있고 법이 필요한 것이지만, 근년에 들어 우리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두드러지게 많아진 것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않는 일이 늘었을 뿐 아니라, 죽이거나 빼앗고 훔치는 일 따위를 천연스럽
사람들은 인간이 만물의 영장(靈長)이고 사람들만으로 풍요를 누리며 잘 살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다른 것은 마치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취급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사람의 편익을 위해서 산과 들을 마구 파헤치고 깎아내는가 하면, 강을 막고 물길을 마음대로 돌려놓으며, 보다 풍요롭게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뭇 생명의 씨를 말릴 정도로 잡아 죽이고 있는 것도 바로 인간우월의 생각에서 비롯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과학기술의 발달과 경제성장을 계기로 사람들은 그의 편익을 위해서 마련된 기계에 길들여져 이제는 오히려 기계에 매어 사는 꼴이 되었다. 오늘날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된 지구온난
‘무한경쟁’이라는 말이 상식처럼 되고, 경쟁에서 이기는 것만이 살길인 것처럼 인식되고 있는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매사(每事)에 경쟁이고, 경쟁에서는 이겨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한다. 백인들이 미 대륙에 발을 들여놓고 원주민을 정복한 다음, 학교를 세워 원주민의 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한 때의 이야기이다. 한 학기가 거의 다 되어 기말시험을 치르면서 담임선생이 학생들에게 이르기를 “옆 학생의 답안을 보거나 보여주면 그 시험은 영점으로 처리된다.”고 엄히 경고를 했다. 그러자, 학생들 사이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이 의아해서 물은 즉, 학생들로부터 의외의 답이 나왔다. 즉, “문제가 어려워 풀기 어려우면 서로 협력하며 도와야 하는 것으로 집에서 배웠는데, 그것이 친구로서의 옳은 처사 아니냐?”는
세계적인 금융위기와 경제 불황 때문에 마음 편한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직장을 가진 사람은 혹시라도 해고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이고, 취업하려는 사람은 직장을 구할 수 없어 걱정이며, 사업하는 사람은 일거리가 제대로 돌지 않아 걱정이다. 거기에 기름이라도 끼얹듯 노인인구는 급증하여 비생산적인 소비층이 많아지다보니 우선 당자들의 불안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닌 듯하다. 노후생활을 은행의 이자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사람은 은행의 예금이자율이 ‘0’에 가까우니 생활방도가 막막하고, 그렇다고 마땅한 수입을 챙길 길이 없으니 매일 매일이 우울할 수밖에 없다. 상황이 이러하니 사람이 모이는 곳이면 의례히 불안과 한탄이 줄을 잇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일은 불안해하거나 한탄한다고 해서
요즈음 각종 언론보도를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한숨이 쉬어지고 측은한 생각을 금할 수 없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우선 사업하는 사람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명색이 전직 대통령이니 고위공직에 있었다는 사람들이 재직기간 중에 저지른 파렴치한 일들이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보도에 오르내리고 있으니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다. 특히 대표적인 명예와 영광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 대통령을 지낸 분의 재직 중 비리가 연일 언론의 보도대상이 되고, 온 집안이 차례로 검찰의 조사를 받는가 하면, 본인마저 피의자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기까지 하였으니 측은하다 못해 고소(苦笑)를 금할 수 없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전에 청와대 홍보비서관을 지냈다는 조모 교수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계형 범죄’에 불과한 것
요새처럼 다다익선(多多益善)이 통하는 때도 없을 것 같다. 무조건 큰 것이 좋고 많은 것을 추구하는 풍조이다. 기업도 클수록 경쟁력이 있어 좋다하고, 심지어 법을 다룬다는 이른바 로펌(law-firm)조차 규모로 대결한다. 세기적이고 세계적인 금융위기에 대처한답시고 각국 정부가 앞을 다투기라도 하듯이 쏟아 붇는 돈도 일찍이 들어보지도 못한 천문학적 금액에 이른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다보니 ‘하나’ 쯤은 눈에 띄지도 않고 관심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적은 것은 숫제 거들떠보거나 상종조차 하지 않으려 한다. 일이 이지경이니 모두가 앞을 다투어 큰 것을 추구하고 많은 것만 챙기려 한다. 큰 것과 많은 것에 취하니 갈수록 탐욕이 커지고, 탐욕이 커지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지에 관계없이
모든 것은 ‘다워야’ 한다. 사람은 사람답고, 스님은 스님답고, 학교는 학교답고, 기업은 기업다워야 한다. 만일 ‘답지 않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났다는 이야기다. 요새 ‘답지 않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이마를 찌푸리게 하는 것은 이른바 성직자라는 사람의 탈선이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자청하고 나선 정치인들의 부패상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불교계의 한 종립대학의 법인이사회 임원의 지위를 놓고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한다. 학교법인의 이사장인 스님 한 분이 형사사건으로 기소가 되었고 유죄가 인정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의 형을 선고한 고등법원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었다고 한다. 학교법인 임원의 결격사유(缺格事由)를 규정한 사랍학교법 제22조는 제1호에서
무문관(無門關)에서 2년이나 3년도 아니고 자그마치 6년이라는 긴 기간을 오롯이 앉아 보내고 나오면서 적어도 30년간은 차를 타지 않겠다고 스스로와 다짐한 다음, 매년 적게는 100일에서 길게는 반년 이상을, 그리고 좁게는 휴전선 순례로부터 넓게는 한국에서 일본 북해도까지를 오로지 두 발에 의지해서 섭력(涉歷)하여 마쳤는데, 그 긴 30년의 원을 온전히 마치고도 금년 들어 또 100일을 기약하고 그 길을 나섰다. 내가 존경하는 어느 스님의 이야기이다. 그 일을 누가 시킨다고 하겠으며 그냥 취미삼아 할 만한 일인가? 요새 흔히 볼 수 있는 이른바 과시용으로 할 만한 일은 더욱이 못된다. 오로지 수행 일념으로 묵묵히 길을 따라 걷고 또 걷는 것이다. 가다가 날이 저물면 적당한 처소를 찾아 하루 밤을 쉰 다음,
지난해, 미국의 리먼 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불붙은 세계적인 금융위기는 좀처럼 호전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더욱이 금융위기는 경제 전반의 불황을 불러와 그 골이 점점 깊어지는 것 같다. 각국의 경제상태가 좋지 않다보니 수출길이 막히고, 수출이 잘 되지 않으니 수출품의 제조가 위축되며, 제조물량을 줄이려니 고용 상태가 악화돼 대량실업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에 기름을 끼얹듯 금융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니 경제활동의 혈액순환이 경색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일이 이처럼 한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우니 사업하는 사람은 그들대로, 일반시민은 그들대로 입만 열면 경제 걱정이요, 살기 어렵다는 푸념들이다.각국 정부는 정부대로 경제의 파국을 막고 빈사상태의 경제를 살려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근년에 들어 문상(問喪)을 가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것도 전에는 친구의 아버지라든가 할아버지의 문상이 대부분이었는데, 근래에는 친구의 문상을 가는 예가 부쩍 늘었다. 의약의 발달과 생활 여건이 나아진 탓도 있겠지만 옛날과는 달리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평균수명이 한참 길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고희(古稀)를 넘기고 나면 초가을 낙엽 지듯이 하나 둘씩 세상 떠나는 소식이 늘어간다. 오랫동안 흉허물 없이 지나던 친구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일이어서, 특히 오랜 친구를 문상하는 경우의 감회를 글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근래에 와서 웰빙(well-being)과 함께 웰다잉(well-dying)이 심심치 않게 입에 오르내리고, 심지어 활자화되는 예조차 많아진 실정이다.
설날이 지나고 입춘까지 지났으니 ‘소’의 해도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다. 썰렁한 세기적인 경제 한파 속에서 시작된 새해라서 그런지 여느 때와는 달리 거리에서 예년 같은 활기를 느낄 수 없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수심(愁心)이 서려 보인다. 경제계를 주름잡던 거대 기업들조차 살아남기 위한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고, 정부는 정부대로 경제회생을 위한 처방을 서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경제가 나아질 조짐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의 수는 더해만 가는 모습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두가 조급해지고, 남에게 조금이라도 뒤질세라 안간 힘을 다 쓴다. 사람들이 여유로운 삶을 잊은 지가 꽤 오래 되었지만, 날이 갈수록 사람의 삶은 더욱 각박해지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때만해도 물질적으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