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봉 김기추(1908~1985) 거사는 20세기 한국의 유마거사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50세를 훌쩍 넘어 불교에 입문했지만 용맹정진으로 큰 깨달음을 얻었고, 이후 20여 년간을 후학지도와 중생교화에 힘쓴 탁월한 선지식이다. 일제치하와 6.25 등 격동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한국 사람치고 파란만장하지 않은 삶이 있을까만 백봉 거사만큼 고단했던 삶도 극히 드물 듯싶다. 1908년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1923년 부산 제2상업학교에 입학, 뒤늦게 설립한 일본계 학교를 ‘부산 제1상업학교’라고 부르는데 반발해 동맹휴학을 주도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본격적인 수난의 세월이 시작된다. 20세 때 부산청년동맹 3대 위원장직을 맡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1년 형무소에 수감되고, 만기출소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수덕사의 여승’ 일엽(一葉, 1896∼1971) 스님은 신학문을 섭렵한 문인이자 선각자로, 출가 후에는 만공 선사의 법맥을 이은 선승으로 칭송 받았던 인물이다. 1896년 평남 용강군 삼화면 덕동리에서 5남매 중 맏딸로 태어난 스님은 부친이 목사인 까닭에 어려서부터 기독교계 학교를 다니며 자연스럽게 신학문을 접했다. 그러나 1907년 갑작스런 어린 동생의 죽음은 이후 스님의 파란만장한 삶을 예고했다. 12세의 어린 나이에 동생의 죽음을 접한 스님은 그 통탄의 심정을 글로 옮겼고, 이것이 한국문학상 신시의 효시로 불리는 ‘동생의 죽음’이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14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고, 남은 동생들도 차례로 단명(短命)하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어린 나이에
“세상에서는 그의 일생이 성실하였기에 그를 신뢰했고, 유능했기에 그를 기대했으며, 몸 바쳐 겨레를 사랑하였기에 그를 존경한다.” 범산 김법린(1899~1964) 선생. 그의 한 제자가 범산의 삶을 이렇게 정의했듯 그는 스님으로서는 선지식이었고, 독립운동가로서는 끝까지 불의와 맞섰던 투쟁가였으며, 학자로서는 동서고금의 깊은 이치를 꿰뚫은 석학으로 평가받고 있다.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했다. 그곳 범어사에서 강원교육을 수료하고, 20세 때 불교중앙학림에서 공부하던 중 3·1운동에 참여했고 곧바로 부산으로 내려가 1만여 명이 동참한 불교계 만세운동을 지도했다.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급히 국경을 넘은 선생은 중국 상해에서 군자금을
‘풍란화(風蘭花) 매운 향내 당신에야 견줄 손가/ 이 날에 님 계시면 별도 아니 더 빛날까/ 불토(佛土)가 이외 없으니 혼(魂)하 돌아오소서.’ 1944년 6월 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남겨두고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은 파란만장한 삶을 접어야 했다. 구국의 기도로 인한 과로, 갑자기 발병한 중풍, 영양실조 등이 그 원인이었다. 위당 정인보(1892~?) 선생이 애도사에서 묘사했듯 만해는 끝이 보이지 않는 역사의 내리막길에서 홀로 매운 향내 뿜어내던 고고한 풍란이었다. 1879년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한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다가 27세 때인 1905년 연곡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임제종 운동을 전개해 전통불교를 지키려 노력했으며, 중국과 시베리아 등을
수월(水月音觀, 1855~1928)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사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던 경허 스님의 제자로 평생을 고통 받는 중생 곁에 머물며 아픔을 나눈 자비의 보살이다. 일제치하에 조선유민들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간 스님은 밤에는 짚신을 삼고 낮에는 소를 치며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짚신과 주먹밥을 공양하는 등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았다. 스님의 한 없이 맑은 삶은 텅 빈 허공처럼 자취 또한 남기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스님의 삶은 친분이 있거나 스님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의 구전(口傳)에 의해 전해질 뿐이다. 수월 스님과 인연이 닿았던 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1855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어린나이에 부모님을 여의고 머슴살이로 살아야 했다. 스물아홉살 되던 해 스님은 우연히 만난 한 탁발승과
구한말 조선의 불교는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오랜 세월 유교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밀릴 대로 밀린 불교는 대중과 격리된 채 떠돌았고, 출가자는 천민취급을 받아야 했다. 이런 탓에 스님들은 수행과 교학에 대한 탐구보다는 기복과 왕권의 안전, 세간적인 복을 비는 신도들의 입맛을 맞추기에 급급한 나머지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승가의 본분사는 찾기 힘들었다. 이때 사바에 홀연히 나타난 불세출의 선지식이 바로 경허성우(鏡虛惺牛, 1846~1912) 스님이다. 그는 정법의 기치를 높이 들고 선(禪)을 향한 각고의 정진과 깨달음으로 꺼져가는 한국불교의 심지에 불을 붙였다. 이는 곧 칠흑 같던 한국불교에 여명을 알리는 신호탄이자 기복에 찌든 조선불교의 구습을 깨부수는 거대한 축제이기도 했다. 1846년 8월 전주 자동
조선후기의 대선사이자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스님. 헌종으로부터 ‘대각등계보제존자초의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을 정도로 폭넓은 사상과 삶의 모습을 보였던 스님은 정조 10년인 1786년 4월 5일에 전남 무안군 삼향면에서 태어났다. 당시 병조판서 신헌의 ‘초의선사탑비명’에 따르면 어머니가 큰 별이 품에 들어오는 꿈을 꾸고 스님을 잉태했다. 또 다섯 살 때 강가에서 놀다가 급류에 떨어져 죽게 되었을 때 마침 부근을 지나던 사람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고, 15세 되던 해 나주군 운흥사에서 대덕 벽봉 스님을 은사로 삭발 출가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후 대흥사에서 완호대사를 계사로 구족계를 받고 초의라는 법호를 받았으며, 이후 쌍봉사로 옮겨 선을 배우며 참선에 전
전쟁만큼 인간을 황폐화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공포, 굶주림, 생이별, 그리고 죽음…. 특히 임진왜란은 수백만 명의 민중이 무참히 죽었고, 약 10만여 명이 일본으로 끌려가는 생이별을 강요당해야 했던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참혹한 전란이다. 대응 일연(大應日延, 1589~1665) 스님은 시대의 비극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살았던 인물이다. 선조의 장남 임해군의 아들로 태어난 스님은 4세 때 임진왜란을 당해 함경도로 피난하던 도중 회령에서 아버지 임해군이 적진의 포로가 되면서 스님과 두 살 위의 누나도 함께 포로가 됐다. 비록 얼마 후 명과 왜군 사이에 강화가 이뤄지면서 임해군은 풀려났지만 이들 오누이는 일본으로 끌려갔다. 고국 조선으로의 귀환을 기다리던 스님은 결국 13세 때인 1601년 법성사에서 머리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한 전기든 누군가에 대한 설화든 그 이야기 속에는 기록하고 말하는 이들의 ‘관점’이 깊게 깔려있다. 또 그 ‘관점’은 곧 쓰고 말하려는 ‘의도’와 만나 사건에 대한 나열과 함께 다양한 해석으로 나타나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옥 진묵(一玉 震默, 1562~1633) 대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관점’과 ‘얘깃거리’를 제공하는 독특한 인물이다. 지난 수백 년간 전설이 전설을 낳고 얘기가 얘기를 낳으면서 심지어 실존 인물이 맞느냐 하는 의문까지 제기될 정도다. 초의 스님의 『진묵조사유적고』와 『동사열전』에 따르면 진묵대사는 1562년 전북 만경의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대사의 가족은 어머니와 누이가 있었으며, 7세에 전주 봉서사로 출가했다. 천성이 슬기롭고 자비로운 대사가 태어나자 주위
지정학적으로 요충지에 위치한 한국은 오랜 세월 수많은 외침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전란을 꼽는다면 단연 임진왜란이다. 일본 열도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만의 정예병을 앞세워 침범한 이 전쟁으로 조선은 초토화되고 수백만 명이 죽는 대참사를 초래한 까닭이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나듯 임진왜란은 수많은 영웅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이순신과 더불어 임진왜란의 양대 산맥이라 일컬어지는 이가 바로 사명당 유정(惟政, 1544~1610) 스님이다. 유정 스님은 서산대사의 법통을 이은 선사이자 용맹과 지혜를 겸비한 승군의 지휘자, 전략과 외교에 있어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했던 외교관이기도 했다. 살아서는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입적 후에는 전설인 된 다면불(多面佛) 유정 스님. 그
고려불교의 찬란함을 뒤로 한 채 탄압과 굴욕으로 점철된 조선불교 500년. 서산대사로 더 유명한 청허당 휴정(1520~1604) 스님은 칠흑 같은 밤을 환히 밝힌 횃불이었다. 조선불교는 서산의 바다에 모였다가 다시 서산으로 퍼져나갔다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당시 조선의 스님 중 그의 제자 아닌 이가 없고 서산의 법손이 아닌 이가 없었던 까닭이다. 서산대사로 하여 조선의 불교는 숨통이 트였으며 그의 선사상은 지금까지도 간화선수행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한국불교사의 거대한 산맥 휴정 스님. 평안남도 안주의 한 산골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아홉 살에 어머니를 잃고 다음 해에 아버지를 잃는 등 불운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열두 살 되던 해 안주 목사 이사증이 어린 그의 시 짓는 탁월한 능력을 아껴 양자로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은 욕망의 충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때로는 무소유나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형태로 나타날 수도 있다. 허응당 보우(虛應 普雨, 1507?~1509) 스님은 맨발로 가시밭길을 걸어야 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했다. 보우 스님은 어느 원로학자의 말처럼 ‘몰상식하고 문화의식이 결여된 유신(儒臣)과 유생(儒生)의 만행과 역사적인 범죄가 극에 달했던’ 비운의 시기를 살아야 했다. 유생들은 사찰을 불태웠고 사찰의 재물과 보물을 약탈해 갔다. 스님들은 사대부들의 가마꾼 노릇을 해야 했고 사찰에서 내쫓기기도 했다. 예의가 없다는 구실로 구타하거나 심지어 살해를 해도 큰 죄가 되지 않았다. 여기에 국가권력은 한 술 더 떴다. 똑같은 하늘 아래 백성이건만 도첩이 없다는 이유로 스님들을 환속시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