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교학 개론 우리들 마음 가운데 부처님 계시다는 얘기를 수시로 하고 또 듣는다. 그 같은 얘기를 하거나 듣는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얼마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는가. 부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다면 우리의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항상 지켜보고 계실 텐데. 포교사들의 삶은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부처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 포교의 길, 중생제도의 길은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지만 항상 부처님께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계시기에 경건하게 살아야한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평생을 몸과 마음을 바쳐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연마하며 살아온 지난날의 체험을 통해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
▲포교학 개론 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빠르게 변해간다. 변해가는 사회의 분위기와 함께 사람들의 삶의 자세도 변해간다. 갖가지 사회 제반 양상은 생물처럼 변해가고 있고 그들 중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종교도 피할 수 없이 변해가야만 한다. IT산업의 등장과 더불어 변해가는 사회현상에 보조를 맞춰가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얘기들을 한다. 매스컴의 홍수에 불교의 세계는 얼마나 그 같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여타종교에 비교하더라도 불교의 변화는 그리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닌듯하다. 종교도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듯하다. 30년 세월 포교
▲포교학 개론 전법사들이 따라야할 모범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부처님의 일생이 그러하지만 그에 앞서 부처님의 제자들의 구법 구도의 길, 포교의 길을 따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우리들은 부처님 제자들의 수행자상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항상 불교를 공부하고 연마하면서도 정작 부처님 당시 제자들의 수행자세와 구도행각, 포교를 위한 열정 등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흔히 나한들로 일컬어지는 부처님 제자들의 수행자상, 포교에 대한 원력 등은 우리가 따라 배워야만 할 규범중의 으뜸일 것이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 상수제자였던 사리불의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을 따라 걸식을 한 뒤 포교를 마치고 기원정사로 돌아왔을 때 6군 비구들이 서로가 편하고 아늑한 침상
▲포교학 개론 ‘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또는 ‘아는 것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다’라는 말들을 한다. 포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말하기는 쉽고 듣기는 쉽지만 실제 얼마나 실적을 올릴 수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교의 중요성을 얘기하지만 실제 얼마나 실속들이 있는지, 얼마나 실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포교 관계부서들과 각종 단체들이 열심히 노력들을 한다지만 불교인구가 늘고 있는가. 각종보고를 보면 생각해볼 점이 한둘이 아니다. 여타 종교들은 교육시스템 자체가 수용자 즉 일반신도라거나 대중들을 사목할 수 있는 포교위주의 교육으로 짜여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대중들을 상대로 목회내지는 강론을 해야만 하는 의무적인 존재를 키워낸다.
▲포교학 개론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불교를 우리나라에 전한 이는 중국이나 인도승려다. 그들의 치열한 포교정신이 불교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이처럼 불교가 전파된 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포교정신에 기반을 둔다. “떠나라, 만중생의 이익을 위해.” 이 한마디는 불교의 포교정신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웅변해준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후 열반에 드실 때까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와 코살라국의 사바티를 중심으로 전 인도를 향해 가르침을 펼쳤다. 입멸 후 십대제자 등에 의해 전교되던 불교는 아쇼카왕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이집트 등 외국에까지 전파됐다. 이때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 온 불교는 일본에 전달돼 나라 헤이안 카마쿠라를
▲포교학 개론 종교는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사회 속에서 성장한다. 중생이 없는 부처가 무슨 소용인가라는 얘기가 이를 대변한다. 부처님께서도 “떠나라. 만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사회 속에서 태어난 종교는 당연히 사회를 잘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 포교를 마케팅에 비유하는 학자들이 있다. 종교마케팅이란 말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상품 중심의 사회이다 보니 그렇게 말한다 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대중들의 욕구(Needs)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마케팅이란 용어도 수용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라는 세계가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고 특히
▲'포교학 개론' 포교를 하려면 무엇보다 자기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얘기대로 우선 스스로를 알아야하고 상대방을 알아야하고 사회를 알아야한다. 스스로를 안다는 것, 자기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끊임없이 강조하신 이유 역시 스스로를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분명히 알게 되면 상대방을 알게 되고 사회를, 우주를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나이기에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가 하나 속에 들어있다” 하신 말씀 또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대는 정녕 그대를 잘 알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아는 것만큼 세상을 위해 의무
▲포교학 개론 ‘십주비바사론’을 보면 설법자의 네 가지 덕이 나온다. 첫째 널리 보고 많이 배워 일체 언어장구에 걸림이 없어야한다. 박학다식을 말한 것이다. 둘째 세간과 출세간의 생멸상을 잘 알아야한다. 섯째 선정과 지혜를 얻어 경법에 대한 의심이 없어야한다. 넷째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오직 말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잘 지키라는 말이다. 이 같은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포교사가 얼마나 될까. 문자를 버리라는 얘기를 거듭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포교에 어찌 문자가 필요치 않겠는가. 문자를 알면서도 문자에 걸림이 없어야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 출가한 사람이 세속의 것들을 알아 무엇하겠느냐하며 세상사를 도외시하는 풍조가
▲포교학 개론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어리석은 이들은 부처나 신을 위해 중생이 존재하는 줄로 오판을 한다. 또 종단을 위해 교단을 위해 신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하기도 한다. 부처가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승려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한나라의 대통령 역시 국민이 뽑은 지도자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존재는 아니다. 생사 속에서 열반을 증득한 부처도 선각자로서 중생을 건질 의무가 있는 존재다.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부처님을 받들면서 그 뜻을 펼치는 승가는 마땅히 중생의 의지처로서, 진리의 포교사로서의 책무를 수행할 뿐 어떤 권리를 행사할 특권적 존재가 아니다. 승단의
▲포교학 개론 세간에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남아일구일언 중천금”이라고도 한다.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르침이다. 여타종교에서는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법음이라는 말을 쓴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백만억 아승지겁에 받을 생사중죄가 소멸되고, 법사의 설법 한마디에 80만억 나유타겁동안 바라밀을 닦은 공덕의 천배 만배의 헤아릴 수 없는 뛰어난 공덕을 얻게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포교사들은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법문을 전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야한다. 법사의 법문 한마디에 법회는 격을 달리한다. 또 포교당이 일어나기도하고 쓰러지기도 한다. 말
▲포교학 개론 만유가 설법을 하고 있으나 사람의 설법은 말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없이 하는 설법도 있다. ‘백의관음무설설’이라 하는 가르침대로 말없는 가운데 무한의 법을 설하시는 불보살의 경우다. 그러나 포교사의 법문은 대체로 말로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설법을 잘 하는 것인가. 나름대로의 연구를 해야 한다. 설법에 자신이 붙어야 포교가 제대로 된다. 미국에서 조사한 연구결과를 하나 예로 들어 보자. 미국인들이 두려워하는 100가지 가운데 1위가 무엇인지 아는가. 죽음, 소송 등이 아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별반 다름이 없을 것으로 믿어진다. 사람들은
▲포교학 개론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시작할 때 마음같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우는 많이 없다. 포교의 길도 예외가 아니다. 부처님을 만들어나가는 중대한 작업이라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쉽사리 시작했을지라도 가는 길은 대단히 험난하다. 끝없이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지할 분은 부처님 밖에 아니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할수록, 정진하면 할수록 강해지지 않은가. 나아갈 방향을 몰라 안타깝기만 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본 사람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안다. 포교의 길, 인생의 길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내 경우 빌딩 한 귀퉁이를 얻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는데, 이는 대단히 희소한 경우에 속한다.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