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원칙이 분명하고, 그 원칙에 충실한 사람은 세상에 드물다. 설령 그 원칙이 다소 이기적이고 편향적이라 해도, 혹 그런 사람이 있다면 ‘대단하다’는 평을 들을 만하다. 하물며 그 원칙이 자타를 아우르는 공익을 목표로 삼고, 지극히 보편타당한 사유를 기반으로 한 경우라면 어떨까! 그런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 앞에서 목숨마저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실로 그가 성자라 하겠다.도교 숭상했던 당나라 고종거대한 노자상 망산에 설치“승려들 깃발 들고 앞장” 명령목숨건 반대로 사죄 받아내수나라 말엽 당나라 초기에 명도(明導) 스님이란
수나라 말엽 당나라 초기에 도흥 스님이란 분이 계셨다. 어려서부터 그는 남달랐다. 겨우 글을 익히고 생각할 나이인 여덟살 무렵, 흙장난이나 전쟁놀이로 여념 없는 또래와 달리 그는 늘 스님들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그에게는 스님들이 동무였고, 마을 인근의 대광사(大光寺)가 놀이터였다. 열아홉이 되던 해, 그는 결국 대광사로 출가하였다. 눈물 짓는 부모님께 도흥은 맹세하였다.나와 이웃 행복 발원하며열아홉 나이 대광사 출가살해 위협에도 계율 지켜만인 존경받는 스승되다“부처님 가르침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겠습니다.”그리고 얼마 후였다. 당
파미르 고원, 새하얀 준령이 끝없이 펼쳐진 그곳은 은세계(銀世界)였다. 그 언저리에서 감탄하고 돌아서는 사람에겐 일생에 다시 경험할 수 없는 장관이지만, 꼭 넘어야 할 이유가 있는 사람에겐 두려운 한빙지옥(寒氷地獄)이었다. 법현 일행은 변변한 준비도 없이 그 세계로 들어섰다. 알 수 없는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굉음이 울리고,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모래와 자갈들이 날렸다.한빙지옥과 같은 파미르고원도반들 넘지못하고 주검으로목숨걸고 30여국을 순방하며 불적 참배 후 삼장 모아 귀국그 눈보라의 장막을 뚫고 이어진 산길은 좁고 험준했다. 한참을
불법을 구하고, 불법을 체득하는 일은 심상한 자세와 행실로는 실로 난감하다. 선가(禪家)에서는 화두 참구를 두고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뚫고 지나가는 일에 비유하고는 한다. 강인한 의지와 부단한 노력 없이는 불가능함을 뜻하는 표현이다.전래 초기 불완전했던 불교완전한 경·율 만나겠다 발심스무살 되던 해 구족계 받고불법 구하고자 인도로 향해은빛으로 빛나는 산에 쇳덩어리처럼 단단한 벽! 그것을 통과하는 어려움은 어느 정도일까? ‘은빛으로 빛나는 산과 쇳덩어리처럼 단단한 벽’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지시하는지 알아야 그 어려움도 짐작이나마 할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리고 그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붓다의 가르침과 ‘나의 욕망’이 충돌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부처님 향한 ‘지심귀명례’목숨마저 바치겠다는 다짐칼날 앞에도 두려워 않자도둑들 위협 멈추고 떠나“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불제자들은 수많은 세월 동안 부처님께 예배하면서 항상 이렇게 다짐했다. 이는 “온 마음을 다 바치고, 저의 목숨마저 당신 손에 맡깁니다”라는 뜻이다. 혹자는 이런 언구를 존경심을 과장한 표현 정도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니다. 진정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는 것은 ‘나의 욕
나옹이 다시 회암사(檜巖寺) 주지가 되어 절을 중수하고 교화활동을 펴자 불교에 대한 민중들의 신망(信望)이 구름처럼 일어났다. 개경과 회암사를 오가는 거리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공양물이 전국에서 바큇살처럼 쏟아졌다. 고려 왕조와 함께 불교를 처단의 대상으로 삼았던 신진 유교세력에게 이는 위협거리였다. 하지만 그의 뒤에는 공민왕이 있었다. 공민왕은 나옹과 함께 고려의 부흥과 불교의 부흥을 꿈꾸면서 계획을 하나하나 현실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그랬던 공민왕이 죽자 유교세력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공민왕 죽자 유교세력 반격회암사 불사를
유교세력에 의한 불교탄압은 고려 말부터 시작됐다. 그리고 그 첫 번째 희생자는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선사였다. 사대(事大)와 자주(自主), 보수와 혁신, 유교와 불교 등 갖가지 이념이 충돌하며 국운이 흥망의 기로에 섰던 공민왕 시절, 그는 스승 지공(指空)과 함께 살아있는 부처님으로 존경받으며 온 백성에게 사랑받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비운의 삶을 마감한 공민왕과 함께 그 역시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배경엔 신진 유교세력의 모함과 결탁이 있었다.생불로 추앙받던 지공나옹을 법제자로 지목불교 지도자로 급부상
보우 스님이 가고 100년 후 쇠락일로를 걷던 조선 불교계에 중흥의 싹을 다시 틔운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으니, 그분이 환성지안(1664~1729)스님이다. 그는 춘천에서 태어나 15세에 출가하여 상봉정원(霜峯淨源)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17살에 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구한다. 월담은 한눈에 지안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의발을 전한다. 이후 지안은 청평사(淸平寺)에서 선과 교를 겸비해 수학하다가 크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무너진 청평사를 재건하다가 절 아래쪽 연못에서 오래된 비석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
1550년(명종5) 12월5일, 문정왕후는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라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린다. 유생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비망기가 내려진 뒤 6개월 사이에 상소문이 무려 423건이나 되었고, 역적 보우를 죽이라는 것이 75계(啓)나 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은 선비들의 나라이고, 불교는 혹세무민의 사교라는 것이다. 유생들의 눈에는 불교중흥을 꾀한다는 자체만으로 보우가 ‘요승’이었다.유생·선비들 극한 저항에도선교양종·도첩제·승과 부활인재 대거 양성…불교중흥유생들 광기에 끝내 살해하지만 문정왕후와 보우는 물러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종교가 박해의 시련을 뚫고 자라난 꽃임을 자랑스러워하며 순교자들을 성인(聖人)으로 받든다. 돌아보면 한국불교가 겪은 시련의 역사가 그들 못지않고, 신념을 지키다 억울하게 사라진 불교도들 역시 그들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쓰러져간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노고에 감사하는 불교인은 현재 그리 많지 않다.조선개국 후 쇠락한 불교문정왕후, 보우 스님에게불교 부흥의 역할 맡기자유생들 ‘요승’이라며 공격왜일까? 삶을 한바탕 허수아비 놀이마당쯤으로 여기는 불교도들의 시각 때문일까? 지배자들의 역사관에 침묵으로 동조하
여행경비를 대주겠다는 친구의 호의를 덥석 받아들여 베트남을 다녀왔다. 하노이에 도착한 첫날, 불미의 사건을 염려하며 가이드가 잔뜩 겁을 주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민낯이 너무 궁금해 몰래 밤거리로 나섰다. 경계심을 품고 이 거리 저 거리를 헤매다 길가 허름한 가게로 들어섰다. 가게에 외국인이 찾아온 적이 없었던지 주인도 손님도 놀라는 눈치였다. 당황스럽긴 피차일반이다. 그들의 말은 ‘꽁깡꽁깡~’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고, 우리 역시 짧은 영어 밖에는 할 수 없었다.정권의 종교·약자탄압에소신공양으로 폭압 항거반정부시위·투쟁 기폭제베트남에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너새니얼 호손의 단편소설 ‘큰 바위 얼굴’을 읽은 적이 있다. 다짐하지 않아도 자주 생각하면 저절로 닮아가는 게 세상 이치이다. 수많은 대승경전에서 불보살을 찬탄하며 그들의 삶을 되새기고 있는 것도 그래서이다. 꿈에서도 잊지 못하는 그가 삶을 불안하게 하고, 조급하게 하고, 안달복달하게 한다면 잊지 못할 그 사람은 삶을 옥죄는 번뇌의 사슬이 되고, 그를 놓지 못하는 건 욕망이 될 것이다. 하지만 심장에 새겨진 그가 삶을 평안하게 하고, 맘을 숙연하고 부드럽고 가볍게 한다면 각인된 그 사람은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잣나무나 소나무처럼 의지(意志)가 곧고 굳센 사람은 드물다. 왜일까? 뜻[志]은 세우기도 어렵고 지키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삶의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매진하지만 그것을 ‘뜻’이라 칭하기엔 많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일신의 안녕과 영달을 궁극의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나름 자신을 다그치고 채찍질하며 고군분투한다지만 그건 욕망의 다른 형태이지 만인의 표상이 될 ‘뜻’은 아니다.미련없는 인생 찾아 여행불법 만나 ‘보살 삶’ 발원예배·참회로 게으름 경책신분 차별없이 진리 전해자타에 유익하고 고금에 수긍되
개과천선(改過遷善)이란 쉽지 않다. ‘이건 아닌데’ 하면서도 어쩌지 못하고 그냥저냥 살아가는 게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삶이다. 하지만 크게 실망할 것도 없다. 이보다 못한 부류도 수두룩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드물긴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당장 고치는 이들도 있다. 이런 부류는 불법을 배우기가 매우 용이하다. 그래서 상근기라 칭한다. 누가 상근기일까? 자신의 전부를 던질 용기가 없다면 감히 상근기라 자부할 수 없을 것이다.20년 세월 전장서 보내다보월선사 만나 자신 돌아봐백성들 도륙한 과거 참회지위·명예 버리고 출가발심수나라 말
사람 목숨보다 돈이 귀한 시대다. 돈에 얽힌 치정과 폭력을 아침저녁 뉴스를 통해 목격하고는 “돈 몇 푼에 저럴 수 있냐”며 다들 분노한다. 하지만 정도에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돈에 목을 매고 살기는 피차일반이다.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사람들처럼 눈과 귀가 온통 돈에만 쏠려있다. 친척이 모여도 친구를 만나도 돈 번 이야기, 돈 잃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내고, 누군가를 평가할 때도 그가 가진 재산정도가 기준의 첫째를 차지한다. 통제되지 않는 인간의 탐욕, 우르르 몰려가는 모양새가 가히 불길로 뛰어드는 불나방을 방불케
얼마 전 서울에서 식자재 유통업을 하는 거사님이 내려와 잠시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이 고기를 먹는지 물어보며 이렇게 이야기를 꺼냈다.생명 귀히 여기는 게불제자로서 도리라며실 한 올, 쌀 한 톨도허투루 받지않은 선현“제가 유명 닭고기 생산업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암놈이 알도 낳고 육질도 좋기에 암놈만 키운다더군요. 병아리가 부화하자마자 감별사들의 손을 거쳐 수놈들은 폐기처분됩니다. 그 장면이 가히 충격이었습니다. 감별사들마다 커다란 쓰레기통을 옆에 두고 있더군요. 그게 뭐냐면 수놈 버리는 통이었습니다. 그 통에서 수놈들은 차곡차
운문사를 방문할 때마다 문선제는 절문 앞에 내려 군사와 무기를 물리고 직접 걸어서 들어갔다. 그렇게 전각을 일일이 돌며 예배를 마친 뒤, 승조선사의 작은 방으로 찾아가 황제가 아닌 한 사람의 제자로서 예를 올렸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신하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들의 불만이 운문사 스님들의 귀에 전해졌다. 어느 날 저녁, 조바심이 난 제자들이 스승을 찾아갔다.황제를 일반 불자로 대하자신하들, 벌 줘야한다 이간질살기어린 황제 마음 알고도의연하게 황제 꾸짖은 스님“스님, 황제께서는 수레에서 내려 직접 스님을 찾아뵙고 있습니다. 하지
승조의 가르침에 감동한 문선제(文宣帝)는 승조로부터 보살계를 받고 그 발아래 절하였다.가르침에 감동한 황제승조에게 보살계 받아황제의 존경 깊어지자주변 시샘·폄훼 심해져“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라 하더니, 그 말씀이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이 제자가 오늘부터 평생 스님을 외호하는 시주가 되겠습니다. 저의 청을 허락해 주십시오.”승조가 가만히 웃으며 대답하였다.“폐하는 황제이십니다. 폐하께서 보살의 서원을 세우셨다면 온 백성을 보호하고 온 백성을 교화하는 데 힘쓰셔야 합니다. 저는 이제 떠날 때가 되었습니
불법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전해지는 것이기에 교화에는 상대방의 성향과 성숙도를 살핀 적절한 방편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방편은 공히 열반과 해탈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고,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고 지혜를 계발해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소멸시킨다는 대강을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고금의 일들을 살펴보면 소위 방편이란 이름으로 법답지 못한 일들이 행해진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속내를 들춰보면 결국 탐욕과의 타협을 방편이란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위장했음을 확인하게 된다. 부처님께서 전하신 진실한 방편에 탐욕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온갖 다툼과 고통, 번민과 혼란의 근원은 탐욕이다. 부처님을 비롯한 수많은 성자들께서 예외 없이 다들 그렇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에 진심으로 동의하기란 사실 쉽지 않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가 ‘그래, 바로 저거야. 저것을 가지면 넌 행복할거야’라고 늘 속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들 사람을, 재산을, 권력을, 명예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 치다 생을 마감하는 것이 대개의 인간사다. 그래서 불교도들은 오욕의 대상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갈증을 멈추고, 나의 것이라며 움켜쥐었던 손아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