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불자들은 그 누구보다도 궁극적으로 바른 깨달음을 얻어 다함께 성불하고자 하는 원을 갖고 있다. 그것은 늘 ‘성불하세요’ ‘성불합시다’라고 합장하고 다짐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 언제나 즐겁고 행복합시다’라는 뜻을 담은 인사말이자 덕담이라고도 하겠다. 언제나 즐거운 행복은 조건을 따라 변해 달라지는 그런 무상한 행복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이 반복되거나 타인과 상대적으로 비교해서 행복하다고 느끼는 그런 유한하고 차별적인 행복이 아니다. 참 행복은 항상 즐거운 열반락이고 해탈락이다. 그래서 참으로 행복을 원한
의상 스님이 설하신 십불중 무착불, 원불, 업보불에 이어서 넷째는 지불(持佛)이다. ‘지불이니 따라주기 때문이다[隨順故]’란 다음과 같다. 법계의 모든 법을 비록 다함없다고 해도 만약 해인삼매로써 도장 찍어 정하면 오직 하나의 해인삼매의 법일 뿐이니, 저가 나를 지니고 내가 저를 지니기 때문에 ‘따라준다’고 한다. 그러므로 세계로 부처님을 지니고 부처님으로 세계를 지니니, 이 이름이 ‘지불’이다.(고기)지불은 모든 존재가 해인삼매의 법으로서 서로 지녀 따라주므로 부처님이다. 해인은 부처님의 정각보리심해인이니 바닷물이 온갖 물상을 지
의상 스님은 ‘법성게’에서 수행의 극과를 “구래부동명위불”로 총결하고, 구래부동의 부처님을 법성신이 출현하는 십불(十佛)로 말씀하고 있다. 열이라는 수는 완전수이니 십불은 모든 부처님을 포섭한 열 부처님이다. ‘일승법계도’에서 소개한 ‘이세간품’의 십불에 대하여 의상 스님이 직접 설명을 더한 것이 ‘총수록’의 고기에 전한다. 십불에 대한 설명은 ‘법융기’에서도 자세하며, ‘화엄경문답’에서는 이 십불을 모두 공덕불로 포섭한다. 공덕자재가 부처님이니 모든 보살행도 공덕행임을 알 수 있다. 이제 ‘고기’에 보이는 의상 스님의 십불 법문을
화엄법계는 어찌 보면 우리들의 이상세계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법계는 우리가 미래에 이루어 갈 세계라기보다 이미 이루어져 있는 세계이다. 눈만 바로 뜨면 보이는 세계이다. 일부러 만들려고 애쓸 필요조차 없다. 눈뜸의 자각만 있으면 스스로 법계의 존재로서 그 공덕을 그대로 누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단지 법계에 있으면서 법계인 줄 몰라 헤매고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법계에 들어가는 방편이 필요하다. 그 인연 방편이 보살도이다. 인연 따라 보살의 길을 가면 도달된 그곳이 바로 자기가 출발한 본래자리인 것이다. ‘화엄경’의 구성을 보면
‘법성게’의 마지막 제30구는 “예부터 움직이지 아니함을 부처라 한다”라는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이다.이 마지막 구절은 처음의 “법성원융무이상 제법부동본래적”과 대응되고 있다. 법성이 원융하고 본래 적정한 경계를 ‘구래부동명위불’로 다시 한 번 일깨워주는 것이다. 이것은 수행을 통해 도달한 불세계가 바로 증분의 법성성기임을 뜻한다고 하겠다.이 “구래부동명위불”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 몇 가지로 나누어 점차로 다가가 보자.①예부터(舊來)는 언제 부터인가? ②움직이지 아니함(不動)은 어떤 상태인가? ③구래부동의 부처님(佛)은
의상 스님은 수행을 통해 얻는 이익 가운데 “마침내 실제의 중도 자리에 앉는다”는 것을 들고 있다. ‘법성게’ 제29구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이다.중도는 석가모니 부처님 재세 당시부터 양극단을 여읜 일관된 수행방편으로 중요시되어 왔다. ‘일승법계도’에서는 중도자리가 수행방편에서 더 나아가 수행의 결과, 법성을 증득한 실제의 열반 자리임을 천명하고 있다. 이 “궁좌실제중도상”에 대한 의상 스님의 법문을 보자.‘실제(實際)’란 법성을 끝까지 다하기 때문이다. ‘중도(中道)’란 두 변을 원융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는다
‘법성게’ 제28구는 “장엄법계실보전(莊嚴法界實寶殿)”이다. 무진보배 다라니로 “법계의 진실한 보배궁전을 장엄한다”는 것이다. 의상 스님은 일승경전인 ‘화엄경’의 세계를 그림으로 그려 보였는데, 그 그림을 ‘법계’라 이름붙이고 법성을 통해서 일승법계를 드러내고 있다. 법계는 일심(一心)을 그 체(體)로 하니 ‘화엄경’의 대의도 ‘만법을 통틀어 거두어서 일심을 밝힌다(統萬法明一心)’(화엄품목)라고 전해져 왔다. 그러면 ‘법계’란 구체적으로 어디이며 법계를 ‘실보전(實寶殿)’이라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또 ‘장엄’은 어떻게 한다는 것인
‘법성게’ 의 마지막 네 구절은 수행자의 이익얻음[得利益]을 밝힌 부분이다. 그 처음은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이니 ‘법성게’ 제27구 “다라니의 다함없는 보배로써”로 시작되고 있다. 다함없는 보배[無盡寶]로 표현된 다라니(dharani)는 총지(總持), 능지(能持), 능차(能遮) 등으로 번역된다. 다라니는 한량없는 의미를 다 지니고 있어서, 모든 선법을 능히 지니고 악법을 능히 막아준다는 뜻이다. 또 이 다라니는 진실한 말이라는 의미에서 진언(眞言)으로 통용된다. 그런데 진언은 보통 다라니보다 좀 짧은 구절이며 신비스런
‘수행자의 방편’에 해당하는 끝 구절이 ‘법성게’ 제25구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이다. 행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 분수따라 자량을 얻는다”라는 이 구절에 대한 ‘일승법계도’의 풀이 가운데, 집으로 돌아간다는 ‘귀가(歸家)’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집으로 돌아간다[歸家]’란 본성(本性)을 증득한 까닭이다. ‘집(家)은 무슨 뜻인가? 그늘지게 덮는다[陰覆]는 뜻이며 머무르는 곳[住處]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법성의 참된 공[法性真空]은 깨달은 이가 머무르는 곳이므로 ‘집(宅)’이라 이름하고, 대비(
화엄행자가 본제에 돌아가 망상을 쉬어서, “무연의 선교로 여의를 잡는다”고 한다. ‘법성게’ 제25구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이다. 의상 스님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분별을 반대로 되돌려 무분별을 얻는 것을 ‘연이 없다(無緣)’라고 이름한다. 이법을 따라서 머무르지 아니하므로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善巧]’이라고 이름한다. 말씀대로 수행하여 성자의 뜻을 얻으므로 ‘잡는다(捉)’라고 이름한다. ‘여의’는 앞과 같다.(일승법계도)‘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 붙인 것이다. 여의보왕(如意寶王)이 무심히 보배
“만약 부처님 경계를 알고자 한다면, 마땅히 그 뜻을 허공처럼 맑혀라. 망상과 모든 집착을 멀리 여의어, 마음이 향하는 바가 다 걸림 없도록 하라.(若有欲知佛境界 當淨其意如虛空 遠離妄想及諸取 令心所向皆無礙)”(화엄경)모든 중생에게 부처님과 똑같은 지혜가 구족해 있는데 망상과 집착 때문에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해서 괴로움을 받고 있다. 망상과 집착만 여의면 본래 구족한 부처님 지혜를 얻어서 안락하게 된다.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부처님 경계를 알 수 있으니, 다시 말해서 여래로 출현하게 된다는 ‘여래출현품’ 법문이다.‘법성게’ 제24구
의상 스님은 ‘화엄경’의 세계를 증분·연기분의 자리행과 이타행으로 파악하고, 다시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修行者方便及得利益]에 초점을 맞추어 자리이타행을 밝히고 있다. 수행자의 방편에 해당하는 네 구절 가운데 첫구가 “그러므로 행자는 본제에 돌아가”라는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이다. 이 ‘법성게’ 제23구의 의미를 ‘그러므로[是故]’ ‘행자(行者)’ ‘본제에 돌아가다[還本際]’라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먼저 ‘그러므로[是故]’란 무엇을 받은 말인가? 바로 위의 이타행 4구인가? 아니면 자리행과 이타행에 다
‘법성게’ 제22구는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다. “중생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라는 이 구절은 이타행 4구중 마지막 구이다. 해인삼매의 힘으로 내리는 가르침의 법비가 삼세간을 두루 이익 되게 하는데, 중생들이 근기 따라 이익을 얻는다는 것이다. 근기란 예를 들면 허공에서 가득 비가 내리나 그릇마다 그 크기에 따라 받아들이는 빗물의 양은 다르니, 그 그릇이 근기인 셈이다. 중생의 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반시’를 다시 한 번 살펴보자. ‘반시’의 그림에서 일도는 일승이고 54각은 삼승을 의미하며, 글자의 굴곡 차별은
‘법성게’ 제21구는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이다.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도와 허공을 채우니”라는 이 구절은 이타행에 해당하는 4구 가운데 세 번째 구절이다.“‘번출(繁出)’이란 치성하게 솟아나오는 것이 다함없기 때문이다. ‘여의(如意)’란 비유를 따라 이름붙인 것이니 여의보왕이 무심히 보배를 비 내려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데 연을 따라 끝이 없기 때문이다. 석가여래의 훌륭하고 교묘한 방편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일음(一音)으로 펼친 것이 중생계를 따라 악을 없애고 선을 일으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데, 어디든 필요한 곳에
‘법성게’ 제20구인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는 두 가지 번역이 가능하다. 하나는 “번출의 여의함이 불가사의하다”이고, 다른 하나는 “여의를 번출함이 불가사의하다”이다. ‘번출’이란 ‘번다하게 나타낸다’ ‘번다하게 나타냄’ 이라는 의미이다. ‘여의’란 ‘뜻과 같이 자재하다’ ‘뜻과 같이 자재함’이다. 즉 “번출의 여의함이 불가사의하다”란 “번다하게 나타내는 것의 자재함이 헤아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의를 번출함이 불가사의하다”란 “여의를 번다하게 나타냄이 헤아리기 어렵다” 또는 “여의를 다양하게 나타냄이 헤아리기
‘법성게’ 제19구인 “능입해인삼매중(能入海印三昧中)”은 그 다음 세 구절을 포함하여 이타행을 밝힌 것이다. 능입(能入)은 능인(能仁 또는 能人)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능인(能仁)은 석가모니불의 의미이고, 능인(能人)은 ‘교화하시는 분(能化之人)’으로서 부처님을 뜻하니, 이 두 가지 경우는 다 “부처님의 해인삼매 가운데서”로 번역된다. 여기서는 능입을 택하여 “능히 해인삼매에 들어가서”로 번역한다. 해인삼매는 물론 부처님의 삼매이다. 의상 스님은 이 해인삼매를 읊은 구절을 포함하여 ‘법성게’ 전체와 ‘법계도인’을 합한 ‘반시’ 자체
현실대긍정의 세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이사명연무분별”은 바로 열 부처님[十佛]과 보현보살의 대인 경계이다. 법성게 제18구인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도 앞 구절과 함께 연기분의 총론에 해당한다. ‘화엄경’ 교설을 경 제목에 주목하여 크게 둘로 나누어 볼 때, 불세계[대방광불]가 증분이라면 보살세계[화엄]는 연기분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불·보살의 인과 관계도 연기분에 속한다. 십불(十佛)은 일체 부처님이고, 보현보살은 불과와 다르지 않은 인행의 보살로서 모든 보살을 거두어 대표하는 보살이다. ‘법성게’의 “십불보현대인경”이
‘법성게’ 제17구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은 다음 구절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과 함께 진성수연의 경계를 총체적으로 결론 지어 말씀한 연기분의 총론(總論)이다. 의상 스님이 스스로 ‘법성게’ 30구를 분과한 내용을 인용하여, 나누어진 자리행의 상호 관련성을 다시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글(법성게)에 7언 30구가 있다. 이 중에 크게 나누어 셋이 있으니, 처음 18구는 자리행에 근거한 것이고, 다음 4구는 이타행이며, 다음 8구는 수행자의 방편과 이익 얻음을 변별한 것이다.” 초문(자리행)에 둘이 있으니, 첫4
의상 스님이 연기분의 진성으로 증분의 법성을 거듭 보여 수행인으로 하여금 법성을 증득하도록 방편을 시설하고 있는 가운데, 계위에 의거하여 다시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常共和)”를 설하고 있다.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라는 ‘법성게’ 제16구이다. ‘초발심시변정각’은 발심이 곧 불과를 원만히 한 것이다. 따라서 열반에 머무는 때에 항상 생사에 떠돌고 생사에 떠도는 때에 항상 열반에 머무르므로, 생사와 열반이 항상 함께이다.(‘법기’)유전즉생사(流轉則生死) 비전시열반(非轉是涅槃) 생사급열반(生死及涅槃) 이개불가득(二皆不可得).
십세(十世)가 상즉하여 하나이나 또한 각기 상입하는 십세가 있듯이, 십세의 삼세간법 또한 원융하나 지정각세간·중생세간·기세간 등의 삼종세간이 각기 다르기도 하다. 화엄법계는 융삼세간불(融三世間佛)로서 전체가 법성신(法性身)인데 이를 바로 알지 못하는 미혹 중생을 위하여, 의상 스님이 진성(眞性)으로 마음을 삼아 법성을 증득하도록 수행 방편문을 시설한 것이 진성수연의 연기문(緣起門)이다. 이 연기문의 다섯째는 연기제법을 계위[位]에 근거하여 밝힌 것이다. ‘법성게’ 제15구인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과 그 다음 구절이 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