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융합정책 적극 실시유민들에 신라 관계 수여 전국을 9주 체제로 개편온 나라 평정했다는 의미 ▲경주시 남산동에 위치한 통일전(統一殿). 신라가 이룩한 일통삼한의 위업을 기리고 한반도 평화통일 의지와 염원을 밝히기 위한 것으로 1977년 건립됐다. 강한 적대의식으로 대립하고 있던 삼국민은 통일을 계기로 하나의 민족 구성원으로 융합되기 시작, 한민족 형성의 토대를 이룩했다. 이것은 신라의 고구려·백제 유민에 대한 일련의 융합책의 결과이지만, 또한 삼국 공동의 적인 당과의 투쟁이 더욱 이를 가속화시켰다. 660년 무열왕은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백제인도 그 재능을 헤아려 임용했다. 고구려 또한 나당연합군에 의해 망했지만 신라
문무왕·김유신 명령으로용이 임금에게 직접 전달 지배층에 의해 널리 유포정치적 목적과 깊은 관련 ▲ 신문왕은 용으로부터 세상을 구하고 평화롭게 할 수 있는 만파식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사진은 만파식적 설화의 무대인 경주 이견대(利見臺, 사적 제159호). 문화재청 제공 문무왕 16년(676) 11월 신라는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를 기벌포에서 격파하고 승리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 이남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이룩했다. 오랜 전쟁은 마침내 끝났다. 그래도 문무왕은 왜병을 대비하여 감은사(感恩寺)를 짓기 시작했지만 마치지 못하고 681년 7월1일에 돌아갔다. 문무왕은 평소에 죽은 뒤에 한
신문왕의 장인이자 공신문무왕 죽자마자 곧 반란 혼란스런 왕실 허점 공격일부 고위관리·귀족 동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한 신문왕은 정치적인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성골왕족에서 진골왕족으로 바뀐 무열왕권에 대한 정당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사진은 경주시 배반동의 신문왕 능. 문화재청 제공 7세기 신라에는 세 차례의 반란이 있었다. 631년에 일어난 칠숙의 반란과 647년의 비담의 난, 그리고 681년의 김흠돌(金欽突)의 난이 그것이다. 진평왕은 재위 54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를 지켰던 왕이다. 왕 53년(631) 5월에 이찬 칠숙(柒宿)과 아찬 석품(石
강수, 불교 아닌 유교 선택스승 찾아다니며 한학 공부왕도 폭넓은 학문세계 찬사신라의 외교 성공에 큰 기여 ▲비록 7세기가 전쟁의 시대였음에도 무(武)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신라의 학문이 발전한 배경에는 뛰어난 문사였던 강수와 설총의 노력이 무엇보다 컸다. 왼쪽부터 강수와 설총의 영정. 7세기 후반 신라왕의 시호(諡號)에는 문(文)과 무(武)가 강조되었다. 즉 무열왕(武烈王), 문무왕(文武王), 신문왕(神文王) 등이 그 경우다. 백제를 공격하여 무너트리고 삼국통일의 단초를 열었던 무열왕의 경우는 무가 강조되었음에 비해 통일 직후의 신문왕은 문이 강조되었고, 통일을 왕성했던 문무왕은 문과 무가 동시에 강조되어 있어서
형제 얘기 다룬 설화 등신라의 설화문학 본격화 법화경 신앙·영험담 모은다양한 설화들도 선보여 ▲신라의 불교수용과 더불어 업보윤회사상은 설화를 매개로 일반 민중에게 폭넓게 확산됐다. 사진은 신라 ‘법화경’ 설화의 무대로 등장하고 있는 문경 사불산 대승사 전경. 신라의 제일귀족 김(金)씨의 먼 조상 방이에게는 한 동생이 있었는데, 재산이 매우 많았다. 형 방이는 동생과 분가해서 살았기에 의식을 구걸했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빈터 1묘를 주자 방이는 동생에게 누에알과 곡식의 씨앗을 달라고 했다. 동생은 누에알과 씨앗을 쪄서 주었지만 방이는 이를 몰랐다. 누에알이 부화했을 때 단 하나만 살아 있었는데, 그것은 날마다 1촌(寸) 정도
경율론 삼장에 걸쳐 47종의 저서 남겨 원효 다음 많은 저술7세기 대표적 고승 ▲백제 출신 경흥 스님은 경·율·론 삼장에 통달한 당대 최고의 고승이었다. 사진은 경흥 스님이 국로(國老)가 되어 머물렀던 경주 삼랑사 절터의 당간지주. 문화재청 제공 경흥(憬興)은 7세기 후반의 대표적 고승이다. 그의 아름다운 덕행과 남긴 사적이 석현본(釋玄本)이 지은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자세하다고 했지만, 지금은 단편적인 기록만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경흥의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문왕(681~692) 때의 경흥 대덕(大德)은 성이 수(水)씨며 웅천주(熊川州) 사람으로 18세에 출가하여 삼장(
현장법사 문하에서 공부법상·인명·유식에 통달 인명 이해는 당대 최고귀국 후 현장 유식 소개 ▲ 순경법사는 이곳 시안 자은사에서 현장법사에게 유식과 인명학 등을 배웠으며, 규기와 학문적인 교류를 나누기도 했다. 사진은 자은사 내에 있는 대안탑 7층에서 내려다 본 자은사 풍경. 7세기 신라의 순경법사(順憬法師)는 당나라 현장(玄) 문하에서 수학하고 귀국하여 활동한 고승으로 유명하다.신라 순경은 당나라로 가서 현장삼장(玄三藏)에게 몸을 던져 현장이 번역한 법상종(法相宗) 등을 배웠다. 순경법사는 법상(法相), 인명(因明), 구사(俱舍)에 크게 통달하여 심오한 뜻을 깊이 이해했다. 특히 인명학(因明學)의
전쟁 중에도 구법은 여전유학승 대부분 삼한 승려 신라 승현·신방·지인 등현장법사 문하에서 활약 ▲17년간의 구법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현장법사는 650년 이곳 서안 대자은사에서 대대적인 역경불사에 착수했다. 황실의 지원 아래 현장법사가 주도한 역경작업에는 많은 신라 스님들이 참여하기도 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국가에는 국경이 있어도 문화에는 국경이 없기에 전쟁의 와중에도 승려들은 국경을 넘어 구법했고 불교문화는 널리 전해졌다. 해동 삼국의 많은 구법승들은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갔다. 수나라 양제 시대에는 홍로시(鴻寺) 사방관(四方館)에서 외국 학승의 교육을 실시했다. 60
법왕, 불교 통치이념 정립왕흥사 창건 등 불사 시행 강한 국가불교 성격 특징왕실에선 사리신앙 유행 ▲왕흥사는 백제 왕실의 흥융을 기원하는 왕실의 중요한 원찰로 사비시대 백제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실마리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지난 2007년 이곳에서는 사리기를 비롯해 백제인들의 찬란한 예술혼이 담긴 8000여점의 유물들이 쏟아져 큰 관심을 모았다. 사진은 왕흥사 목탑지 전경. “백제에는 승려와 사탑(寺塔)이 매우 많다.” 이것은 ‘주서(周書)’의 기록이다. 이 기록과 같이, 백제에는 불교가 성했고, 당시 백제인의 생활은 불교신앙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다. 그러나 남아 있는 백제 불교사 기록은 너무 적다.
지엄 문하에서 동문수학의상은 실천수행이 강점 법장은 화엄교학 집대성18세 차이에도 절차탁마 ▲1300년 전 중국 화엄종 제3조 법장 스님이 해동화엄초조 의상 스님에게 보낸 편지는 신라와 중국을 거쳐 지금은 일본 천리대학에 보관돼 있다. 천삼백 년을 전해오는 편지 한 통이 있다. 험한 바다 건너 당나라에서 신라로 전해졌던, 지금까지도 원본이 전하는 이 편지는 법장이 의상에게 보냈던 것으로 유명하지만, 우정 어린 내용은 더욱 향기롭다. 당나라 수도 장안 가까이에 종남산(終南山)이 있고, 이 산의 지상사(至相寺)에는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智儼, 602~668)이 여러 제자들에게 화엄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의
군 복역 중에도 품 팔아홀어머니 봉양하며 생활 훗날 출가하려 했으나어머니 권유로 곧 삭발 ▲의상 스님의 4대 제자 중 한 분인 진정 스님은 어머니의 거듭된 권고로 출가를 결심한 후 이곳 부석사에서 의상법사의 제자로 화엄을 공부했다. 부석사 제공 의상(義相)이 부석사에서 화엄대교(華嚴大敎)를 강의하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이 신라 사회에 두루 퍼지자, 진정(眞定)도 군대에 있으면서 이 소문을 들었다. 진정의 마음은 이미 화엄도량 부석사로 달려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어머니를 봉양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다리
의상이 676년 태백산에 창건선묘, 석룡으로 변해 도량수호 정토신앙 배경으로 가람배치국왕의 토지·노비 시납 거절 ▲해동화엄초조인 의상대사는 미타정토신앙에도 깊이 매료돼 평생 서방의 극락세계를 향해 앉았다고 전해진다. 의상대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무량수전 본존불을 서쪽에 배치하는 등 전체적인 가람구조가 미타신앙과 깊이 관련돼 있다. 부석사 제공 의상은 화엄을 전할 좋은 터전을 찾아 전국의 산천을 두루 편력했다. 고구려의 먼지와 백제의 바람, 그리고 마소의 접근도 어려운 태백산의 한 궁벽한 곳에 이르러 말했다. “땅이 신령스럽고 산이 수려한 이곳은 참으로 법륜을 굴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