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가 없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소설을 버무려놓은 글이라 생각했다. 논픽션으로 생각하기에는 전설 따라 삼천리에서나 나올 법한 내용이 너무 많았다. 조선시대의 일이었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근대를 살았던 분의 얘기였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평전을 쓴 사람이 스님을 직접 모시거나 곁에서 지켜 본 사람들의 증언을 채록하여 글을 썼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물속을 걸어가는 달’(김진태 저)을 읽었을 때 느낌이 그랬다. 수월(水月,1855~1928) 스님의 삶을 기록한 책이다. 경허 스님의 제자 수월신분
3년 동안 지속해 온 불법승 연재를 끝마칠 때가 되었다. 그동안 인도에서 시작해 티베트, 중국, 한국, 일본까지 건너오면서 기라성 같은 고승대덕을 많이 만났다. 그분들은 때론 근접할 수 없는 천재성으로, 때론 탁월한 법문으로, 때론 목숨을 건 수행으로 불교사에 빛나는 별이 되었다. 물론 나에게도 북극성 같은 존재가 되었다. 지증보살(智增菩薩)의 화현인 듯한 그분들의 삶의 궤적을 지켜보면서 감탄했고 절망했고 자극받았다. 연재는 곧 마치지만 그분들의 가르침은 내가 이승을 떠나는 순간까지 계속될 것이다.닌쇼 스님, 민중구제 뜻 두고평생
대학원 다닐 때였다. 도서관에서 일본미술전집을 뒤적거리는데 독특한 조각상이 눈에 들어왔다. 세상에 이런 작품이 있다니. 놀라웠다. 인물상의 주인공은 스님이었다. 당시에 제작된 대부분의 초상조각이 좌상(坐像)인 데 반해 그 인물상은 입상(立像)이었다. 짚신을 신은 스님은 배꼽까지 늘어뜨린 징을 목에 걸고 오른손에는 징을 칠 방망이를, 왼손에는 사슴뿔로 만든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특이한 것은 입이었다. 스님은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힌 채 입을 벌리고 있었는데 입 앞에 6명의 작은 인물들이 조각되어 있었다. 이게 뭘까. 스님이 입김을 불
10여 년 전이었다. 한참 ‘육조단경’에 빠져 있을 때라 어디서 강의만 있다면 쫓아다녔다. 책으로 읽는 법문은 자칫 독단에 빠지기 쉽다. 강의로 듣는 법문은 독단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북한산 뒤쪽에 위치한 삼천사에 가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분당에서 삼천사까지의 거리가 만만치는 않았으나 일요법회에서 성운 스님이 ‘육조단경’을 강의한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다. 예불이 끝나고 스님의 법문이 시작됐다. 한참 강의를 듣는데 우연히 ‘뜰 앞의 잣나무’가 나왔다. 귀가 번쩍 트였다. ‘부처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조주(趙州)선사가
“옛사람들은 이르기를, 일대사인연을 밝게 알지 못하면 어버이를 잃은 듯이 하라고 했다. 석가노인네도 일대사인연을 위해 세상에 출현하셨다. 그렇다면 말해보라. 어찌하여야 일대사인연을 밝힐 수 있겠는가?”에이사이 스님, 임제종 수립해무사·대중들로부터 환영 받아선종 보급되고 200년 지난 뒤죠세츠가 수묵화 활짝 꽃피워에이사이(榮西,1141~1215) 스님의 목소리는 굵고 우렁찼다. 왜소한 체구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다부졌다. 좌중을 둘러보는 눈빛에서는 푸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스승의 강한 기운에 압도된 것일까.
사진을 정리하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았다. 여기저기서 찍은 사진을 보니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에서부터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일본까지 불교유적지가 있는 곳이면 거의 다 가보았다. 그런 나를 보고 누군가는 ‘그 작은 체구로 안 다닌 곳이 없군요’라며 놀렸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보폭이 짧아서 그렇지 걷는 데는 긴 다리와 별 차이가 없습니다.’ 4년 전에도 인도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인도여행은 어지간해서는 마음내기 힘든 여정이다. 거리도 멀고 기후도 다르고 잠자리도 불편하고 음식도 입에 맞지 않는다.
울고 또 울었다. 나는 영 가망이 없는 걸까. 자꾸 체념하는 마음이 생겼다. 울음은 느닷없이 터졌고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렀다. 내가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싶은 생각에 급기야는 밥도 넘어가지 않았고 삶에 대한 의욕도 사라졌다. 사소한 외부경계를 만나도 마음은 풍랑을 만난 배처럼 흔들렸다. 내 뜻에 어긋나는 사람이 있으면 새벽기도 때의 축복의 진언이 삽시간에 저주의 진언으로 바뀌었다. 그런 나를 보면서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절망스러웠다. 평생 노력해도 나는 내 안에 도사린 업력의 작용을 거스를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의 말과 행동을 대상으로 한다. 말과 행동은 마음에 따른다. 그러나 마음이 항상 말과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몸이 생각대로 따라주지 않을 때 우리는 ‘마음 같지 않다’라고 표현한다. 마음은 생각으로 끝나서는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많은 이론을 마음속에 담고 있어도 말과 행동으로 전환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이론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우리 삶이다. 다겁생에 걸쳐 익혀 온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말과 행동이 마음에 따르게 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평생 수행하는 사람이
“질문 있습니까?”일본 천태종조 사이초 스님기존 불교세력의 반발에도불굴의 의지로 어려움 타파구카이 스님과 교류했으나신념의 차이로 끝내 결별어제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서 ‘아름다운 불교미술’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마쳤다. 별 문제없이 끝마쳤다.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특강이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는 ‘고대불교조각대전’에 다녀오라는 숙제까지 내줄 정도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질문 있느냐는 질문은 특별히 질문을 기대하고 한 질문이 아니었다. 어디서 강의하더라도 마지막에 으레 하는 인사말이었다. 질문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긴 슬럼프에 빠졌다. 부처님 법을 공부한 지 벌써 20여년. 최근 3년 동안 불법승 삼보에 대해 연재하면서는 온통 불교에 젖어 살았다. 새벽 4시면 일어나 경전을 읽고 예불을 드리고 참선을 한다. 새벽은 감히 어떤 사악한 기운도 범접할 수 없을 만큼 신령스럽다. 우주가 선물한 새벽기운을 받고 고요히 앉아 내면을 들여다본다. 사람으로 태어날 만큼 공덕을 쌓은 내 자신이 고맙고 감사하다. 넘칠 만큼 행복하다보니 세상 한편에서 울고 있을 누군가에게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그때쯤 가만히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다.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고통에
출판사 편집자를 만났다. 통일신라 탑에 대해 얘기를 하다 석가탑과 다보탑 사진을 보여주었는데 자꾸 두 탑을 혼동했다. 나한테는 너무나 분명하게 구분되는 두 탑이 그 사람에게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아니 두 탑이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헷갈릴 수가 있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문화재에 대한 애정이 부족한 것 같아 살짝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불법승 삼보에 대해 연재하면서 언제나 어려운 것이 띄어쓰기다. 특히 ‘~지’는 거의 매번 틀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령 ‘만난 지’와 ‘만났는지’는
팔자다. 말려도 소용없다. 고생해도 상관없으니 그 길을 꼭 가겠다는 사람을 보면 흔히 하는 소리다. 나의 경우만 봐도 그렇다. 나 또한 평생 글만 생각하고 살았다. 시인을 보면 두근거렸고 시집을 펼치면 설레었다. 글이 되겠다 싶으면 밥을 먹다가도 메모를 했고 만질수록 반질반질해지는 문장을 보면 정신 줄을 놓은 듯 히죽거렸다. 이런 자신을 보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팔자다. 정말 못 말리는 팔자다. 이름을 얻고 얻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내가 만족할만한 글을 쓰면 충분하다. 글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지독했는지는 죽음을 경험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