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송의식 핵심은 보내는 게송일체 존재에 공양을 올릴테니다시 오라는 재회 서약 담겨 만해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는 다시 만날 것을 믿’는다고 하였다. 일체 존재들에게 두려움과 진리와 음식을 펴는 불교의 시식의식에도 떠나며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한다. 앞에서 일체 존재를 청해 법보시를 베풀고 극락왕생을 기원하며 장엄염불로 선근을 닦아 주었다. 이제는 떠날 시간이 되었다. 현교의 장엄염불과 밀교의 진언 염송 정토업으로 선근을 닦아 이제 극락에 왕생해야 한다. 봉송의식은 서두의 소청의식과 대를 이루는데 어디서부터 봉송의식으로 이해하느냐 하는 데는 인식의 차이가 있다. ‘관음시식’에서 시식을 본 의식으로 본다면, 이후의 장엄염불에 이어
부처님 명호 지극히 염송하며아미타 극락세계에 나기 발원진리 마음속에 새기려는 의식 장엄염불은 글자 그대로 염불을 장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염불을 장엄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왜 장엄하며, 어떻게 장엄할까. 염불에는 부처님의 실상을 마음속에 떠올리는 실상염불과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 내어 염송하는 칭명염불, 아미타 부처님의 상호를 관상하는 관상염불 등이 있다. 보통 시식의식에서 장엄염불은 법보시가 끝난 다음에 시설된다. 무외시, 재시, 법시가 끝나면 이제 초청한 이[영적 존재]들이 돌아갈 시간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디로 돌아갈까. 온 곳으로 돌아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곳이 있는가. 이에 대해 답해야 한다. 그러기에 앞서 지금 돌아가야 할 분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첫째 이분들은 온
법 요지 압축해 드러내는 의식제법 실상 깨닫게 하려는 목적종파 특성 넘는 한국불교 특색 ‘회삼의 발화’라니, ‘회삼귀일’은 들어 봤어도 이게 무슨 말이야 하고 의문이 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회삼은 셋을 모았다는 뜻이고 발화는 꽃을 피워냈다는 뜻으로, 이는 법의 요지를 드러내는 한국불교 시식의식의 ‘법보시 형식’의 특성을 압축해 표현하는 가운데 필자가 부득불 생성한 조어이다. 모든 법회는, 제행(諸行)의 요지를 드러내는 법보시가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의식이, 공양을 올리고 부처님께 수명장수와 복덕을 축원하는 생축불공이든, 아니면 일체의 영가나 선조상의 왕생을 기원하는 망축이든 마지막 순간에는 법의 요체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제법의 실상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법의 요지’에서 일
법의 요체 드러내는 것법회 가장 핵심적 요소12연기 순·역관이 중심 절에서 행하는 거의 모든 의식을 법회라고 한다. 법회를 할 때 하는 의식을 모은 책을 법요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법요집이 단순히 의식을 담은 책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할 것 같다. 이때 ‘법요’는 법의 요지라는 뜻이다. 해서 법의 요지, 요체라고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체라고 할 수 있다. 한국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 하면 팔만대장경인데 그 양이 방대해 진리의 요지만을 뽑아서 모아 놓은 것을 ‘법요’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법요를 드러내는 것을 ‘법보시’라고 한다. 법회는 먼저 법을 깨달은 이가 아직 법을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법을 알려주는 법보시 모임이다. 하여 법회의 가장 핵심적인 순간은 법의 요지를
삼보에 진언으로 권하는 의식현교 육법공양 형태가 특징事공양보다 理공양에 가까워 현재 대개의 의식을 편집한 ‘법요집’에는 ‘진언권공’하면 한결같이 ‘변식진언 감로수진언 수륜관진언 유해진언’의 네 진언이 등장한다. 앞 호에서 ‘공양물을 양적 질적으로 전화하는 데는 오직 변식진언이 그 역할을 수행했지만 차츰 변식진언에 감로수진언 수륜관진언 유해진언이 더해졌다고 말했었다. 그리고는 진언변공은 아귀에게 공양을 베풀 때 행하는 것이므로 상위의 부처님이나 보살님, 신중님에게 공양을 올릴 때 쓰이는 것은 문제가 좀 있다고도 했다. 그렇다면 상위의 불보살님께 공양을 올릴 때 행하는 변공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 한 예로 들었던 ‘진언권공’(1496)에 담긴 변공구조는 사다라니와 많이 다르다. 현재는 ‘
공양물 변하도록 하는 의식일체 영적 존재 위한 음식현행 의식은 옛 것과 달라 칭양성호를 통해 아귀 혹은 초청한 영적 존재의 물리적 심리적 변화를 성취하였으니, 이제는 영적 존재에게 음식을 베풀어야 한다. 음식을 베풀기 위해, 내가 올린 공양물을 변하게 하는 변공(變供)의식이 봉행된다. 왜 변공의식을 봉행하는가. 첫째는 내가 올린 공양물이 유한하므로 초청한 법계의 무한한 일체 영적 존재에게 베풀려면 그 양이 한량없이 늘어나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내가 올린 공양물이 비록 정성을 다한 공양일지라도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므로 이를 일체 영적 존재들이 받아먹을 수 있도록 하는 음식물의 질적 전화가 필요하다. 그래야 영적 존재들이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이런 까닭에 변공의식을 한다.
아귀 1차 고통 해소 넘어구원으로 이끌어주는 의식아미타 명호 빼 의미 퇴색 ‘불설구발염구아귀다라니경’에 다보여래, 묘색신여래, 광박신여래, 이포외여래의 4여래 명호를 염송하는 의식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각 여래의 명호를 칭명하여 아귀들로 하여금 재보를 얻게 하고, 상호가 좋아지게 하고, 목구멍이 넓어지게 하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4여래 명호의 칭양을 통해 아귀들은 배고픔과 누추한 몸을 벗고 목구멍이 넓어지고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이제 1차적 고통이 해소되었으니 2차적 구원의 세계로 이끌어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 4여래 외에 보승(寶勝)여래, 감로왕(甘露王)여래, 아미타여래가 새로 등장하게 된다. ‘시제아귀음식급수법’에는 ‘보승여래를 칭명하여 인색한 업을 없애고 복덕이 원만해지기를 발원하고’
부처님 거룩한 명호 들려주어영가들 고통 없애주는 의식다섯 여래 명호 3편 반복 부처님의 성스러운 명호를 고혼 영가에게 들려주어 영가로 하여금 부처님의 위력과 하나가 되게 하여, 고통을 벗어나게 하는 의식을 칭양성호라고 한다. 현재 관음시식 등에서 행하는 칭양성호는 5여래의 명호를 칭명하며 축원을 한다. “나모다보여래 원제고혼 파제간탐 법재구족/ 나모묘색식여래 원제고혼 이추루형 상호원만/ 나모광박신여래 원제고혼 사육범신 오호공신/ 나모이포외여래 원제고혼 이제포외 득열반락/ 나무감로왕여래 원아각각 열명영가 인후개통 획감로미” 다섯 여래의 명호를 들려줌으로써 고혼들이 인색한 마음을 깨 버리고 법의 재물이 구족하기를 발원하고/ 묘색신여래의 명호를 들려줌으로써 고혼들이 추한 몸을 벗고 상호가 원만
부처님 가피를 구하는 의식영가의 극락왕생 발원 목적부처님 깨침이 펼쳐지는 장 고혼 영가에 차를 한 잔 올리고 윤회를 벗어나기를 발원한 후 선밀가지(宣密加持)라는 의식을 행한다. 먼저 ‘이제 비밀스러운 가지를 펴니 몸은 윤택해지고 불같은 업은 맑고 시원하게 사라지는 해탈을 각자 구하소서’라는 게송을 읊고 변식진언 등 네 개의 다라니를 염송하여 공양물의 양적 질적 변화를 기원한다. 다섯 여래의 성스러운 이름을 염송하여 ‘칭양성호’ 영가들로 하여금 심적 질적 변화가 일어나게 한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는 신심과 불보살님의 위력이 유난히 강조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실천하는 자력적인 모습에서 나아가 절대적인 부처님의 위력을 입어 해탈을 이룬다고 신앙구조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부처님의 힘
마음 쉬는 순간이 곧 열반“차 드시고 윤회 벗어나라”맑은 차 올리며 해탈 기원 고혼을 맞이하며 청해 자리에 앉도록 하고 나면 차를 올리게 된다. 이 때 외는 게송을 고혼 다게라고 하는데 현재 ‘관음시식’에는 다음의 게송이 쓰이고 있다. ‘百草林中一味新(백초림중일미신)/ 趙州常勸幾千人(조주상권기천인)/ 烹將石鼎江心水(팽장석정강심수)/ 願使亡靈歇苦輪(원사망령헐고륜)’ 이에 대해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교상용의례집’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온갖 초목 한결같은 신선한 차 맛/ 조주 스님 몇 천 사람 권하였던가/ 돌솥에다 맑은 물을 다려 드리니/ 망령이여 드시고서 안락하소서.” 이어 제령과 고혼을 부르고 있다. 번역의 이해를 중심으로 두어 가지 미감을 짚어보자. 첫째로 ‘백초림중’은 ‘갖가
고혼 청할 때 맞이하는 게송집착 끊지 못하는 존재들에자성 공함 역설적으로 표현 고혼을 청할 때 맞이하는 게송을 고혼가영이라고 한다. 고혼을 청해 음식을 베푸는 의식에서는 불특정 영가를 청하는 것이 적합하지만 ‘상용영반’이나 ‘종사영반’처럼 순수한 제사의식으로 봉행할 때는 특정 영가를 청해 맞이하는 가영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현재 유통되고 있는 두 의식의 가영은 같은 것이 쓰이고 있다. 본문을 보고 의미를 톺아보자. ‘諸靈限盡致身亡(제령한신치신망)/ 石火光陰夢一場(석화광음몽일장)/ 三魂杳杳歸何處(삼혼묘묘귀하처)/ 七魄茫茫去遠鄕(칠백망망거원향)’ ‘여러 영가들이 기한이 다 돼 몸이 죽게 되었는데/ 마치 돌 불처럼 한 바탕의 꿈이어라/ 삼혼은 아득히 어디로 돌아갔으며/ 칠백은 멀리 멀리 고향으로 떠났느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