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불교는 기독교처럼 신앙의 모양을 가르치지 않고, 다만 이 세상의 사실을 인식시키려는 노력일 뿐이다. 이 세상의 사실이 곧 이 세상의 필연성이다. 이 세상의 필연성은 인간의 뜻대로 이 세상이 움직여지지 않고 해와 달이 뜨고 지는 그대로 이 세상이 굴러가는 이치를 말하려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이 만약에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진다면, 이 세상은 큰 혼란으로 존립이 불가능해질 것이다. 각자가 다 자기 뜻대로 세상을 움직이려고 하기에 세상은 중구난방 뒤죽박죽이 되어서 종국에 세상을 파멸로 몰고 갈 경우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간의 마음이 간사하고 중구난방 제멋대로 날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존재방
상·하가 각각 분리되어 실존하지 않듯이 참과 망령도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아 “참됨도 구하지 않고 망령 됨도 끊지 않나니, 두 법이 공하여서 무상(無相)임을 분명히 알았도다.”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이 세상의 법은 외곬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다 이중적인 모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반드시 있고, 저것이 없으면, 이것도 또한 없다는 것이 부처님이 직접 가르쳐주신 연기법(緣起法)의 요체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상호간 서로 이중적인 구조로서 짜여져 있다는 것을 말한다. 불법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의 존재방식이 이중적인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상호 이중적이므로 어느 것도 외곬으로 홀로 존재하지 않다
“법의 재물을 덜고 공덕을 없앰은 심의식(心意識)으로 말미암지 않음이 없음이라. 이로서 선가에서 마음을 물리치고 태어남이 없는 지견력(知見力)에 단박에 들어감이로다.” 불교가 마음의 종교요 철학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므로 불교는 기독교처럼 믿음의 종교가 아니다. 불교는 엄밀한 의미에서 신앙이 아니다. 다만 불교는 한편으로 방편을 중시하는 가르침이므로 이해력과 근기가 낮은 사람들에게 알맞게끔 신앙의 형식을 빌려 주었다. 불교가 종교라는 것은 기독교가 종교라는 것과 다르다. 종교로서의 불교는 최고의 가르침이라는 의미를 뜻하지, 신앙의 대상을 열렬히 믿는다는 것을 말함이 아니다. 어디에도 부처님이 나를 열렬히 믿으라는 그런 말을 하지 않으셨다. 부처님이 가르치신 법은 우주만물의 사실이다. 우리가 흔
“배우는 사람이 잘 알지 못하고 수행하나니, 참으로 도적을 아들로 삼는 것이로다.” 도를 증득하는 마음은 지식을 배워서 아는 학의 길과는 다르다. 전자는 도를 객관적으로 대상화해서 지식으로 아는 길과는 달리, 내 마음이 도에 녹아서 도와 일체를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도와 마음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본디 도와 마음은 각각 따로 노니는 것이 아니라, 도는 마음 밖에 있어 본 적이 없는 마음의 자기 모습인데, 사람들이 도를 잘 알지 못해서 도가 마음 밖에 있는 어떤 손님인 양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 밖에 있는 손님이 바로 도적과 다른 것이 아니다. 마음 밖에 있는 손님을 내가 점잖게 부른 것이지만, 기실 그것은 내 안에 들어와서 내 마음을 해코지 하는 강도나 도적과
“망심을 버리고 진리를 취함이여, 취하고 버리는 마음이 교묘히 거짓을 이루는 도다.” 불교를 가장 낮은 단계의 차원에서 생각하면, 불교는 여타의 종교처럼 한갓 도덕적 교설로서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불교를 그렇게 말함은 틀린 것은 아니로되, 부처님의 깊은 생각을 우리가 잘 못 이해할 위험에 빠지는 것이리라. 부처님의 교설은 인간으로 하여금 소유론적 차원의 생각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전이하기를 종용하는 의미로 집약된다. 그러나 존재론적 차원의 일은 진리를 취하기 위하여 망심을 버려야 하는 그런 행위의 일로 여겨져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망심을 버리기 위하여 진리를 취해야 하는 정반대의 일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리는 것과 같은 소유론적 차원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영가대사에
“있음(존재)을 버리고 공에 집착함은 병이기는 같으니, 물을 피하다가 도리어 불로 뛰어듬과 같도다.” 있음의 존재가 있다는 것으로서의 존재자와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앞에서 여러번 반복적으로 지적하였다. 삼라만상으로서의 존재자는 구체적인 명사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존재자들은 그 존재자들의 존재방식과 다르다. 존재자들의 존재방식은 구체적인 지시사항이 아니라, 모든 존재자들이 일시에 존재하고 있는 방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존재자가 존재하는 상태를 언급한다는 것은 텅빈 허공에 어떤 것이 생겨나서 감각을 자극하기에 일어난 일이다. 감각에 와 닿는 그 어떤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의 정체인 본질을 묻는 것이지만, 그 어떤 것의 존재를 묻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것의 존재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그
“삼라만상의 그림자 그 가운데 나타나고, 한 덩이 둥글게 밝음은 안과 밖이 아니로다. 활달히 공하다고 인과를 없다고 하면, 아득하고 끝없이 앙화를 부르리로다.” 불법은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므로 여여하게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법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은 해와 달, 그리고 하늘과 땅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약간의 차이를 갖는다. 왜냐하면 불법은 저들 명사들의 존재방식과 달리 지시 가능한 명사들의 방식처럼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들 명사들은 하나가 곧 일체를 이루는 그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 명사들은, 즉 개개명사들은 개별적으로 따로 따로 존재한다. 그러나 불법은 하나가 곧 전체를 이루는 일체의 방식을 띠면서 존재한다. 그래서 불법은 일즉일체 되는 그런 존재방식을 갖는
“모양도 없고, 공도 없고, 공 아님도 없음이여. 이것이 곧 여래의 진실한 모습이로다. 마음의 거울 밝아서 아무 것도 걸림이 없으니, 확연히 비치어 사바세계에 두루 사무치도다.” 여기서 잠깐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철학을 말하련다. 하이데거는 서양철학사가 존재를 망각하고 존재자만을 사유한 역사라고 하여 서양철학을 비판하였다. 흔히 이 말을 철학교수들은 자주 말하나, 이 말의 진의가 무엇인지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것 같다. 동양철학도 기실 하이데거의 풍자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동서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다 존재를 쉽게 말하나, 기실 존재가 무엇인지 말하기 쉽지 않아서 존재 앞에서 망연자실하게 된다. 모든 철학은 다 존재 대신에 존재자를 언급하기에 하이데거의 말처럼 동서철학이 거의 다 존재의 사유 대신에
“용을 항복받은 발우와 범 싸움을 말린 석장이여, 양쪽 쇠고리는 역력히 울리는 도다. 이는 모양을 내려고 허사로 지음이 아니요, 부처님 보배 지팡이를 몸소 본받음이로다.” 이 구절의 해설은 전적으로 성철 큰스님의 설명을 따른다. 용을 항복받은 발우의 뜻은 육조 혜능 스님이 보림사에 계실 때에 절 앞 큰 연못에 심술궂은 큰 용이 휘젓고 나타나므로 스님이 일갈하여 그 용을 작게 만들고 다시 발우 속에 담아 다시 상당 법문을 통하여 제도하셨다는 이야기를 영가대사가 읊은 것이다. 범 싸움을 말린 석장의 뜻은 승조(僧租) 스님이 길을 가다가 범 두 마리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것을 보고 육환장을 가지고 두 마리를 떼어내어 말렸다는 고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육환장은 나무 지팡이를 말하는데, 그 지팡이에 두개의 둥근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강엔 달 비치고 소나무엔 바람부니, 긴 밤 맑은 하늘 무슨 할일 있을 손가? 불성계의 구슬은 마음의 인(印)이요, 안개, 이슬, 구름, 노을은 몸에 있는 옷이로다.” 화엄사상에 의하면, 이 우주의 모든 것은 법성의 나툼이다. 부처님의 법이 아닌 것은 이 우주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삼라만상의 모든 것은 모두 부처님 법성의 몸이기 때문에 우주 자연계의 일체가 다 법당이다. 물질의 색과 달리, 눈에 안 보이는 마음은 부처님의 마음으로서 여의주와 같고, 그 마음은 자리이타하는 마음의 작용으로서 이익의 보배를 온 세상에 뿌리는 비와 같고, 그런 점에서 이 세상의 자연계가 다 이익의 법칙을 나누어주려고 한다. 그러한 것은 모두 부처님의 법력 때문
“근본을 얻을 뿐 끝을 근심치 말지니, 마치 깨끗한 우리가 보배스런 달을 머금은 것과 같도다. 이미 이 여의주를 알았으니 나와 남을 이롭게 하여 다함이 없도다.” 여기서는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마지막 진리인 자리이타(自利利他)가 여실히 드러난다. 화엄경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하였으니, 해와 달 등을 비롯하여 모든 삼라만상이 생겨난 까닭은 다 마음의 작용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하겠다. 해와 달도 다 마음이다. 그냥 무의미한 물질의 작용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이 있어서 그런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런 우주론적 마음의 철학은 부처님이 계시기 전까지 우리는 상상도 못했다. 여기서 나는 서양 근대의 합리주의철학자의 두 사람인 스피노자(Spinoza)와 라이브니츠(Leibniz)를 들려
“(허공에 화살을 쏘는 것과 그런 유위(有爲)의 노력은) 어찌 무위(無爲)의 실상문(實相門)에 일초직입(一初直入)하여 여래지(如來地)에 단박에 뛰어 들어감과 같으리오.” 여기서 영가대사는 교종의 가르침과 달리 참선에 의한 선종은 지름길로 여래의 땅에 빨리 들어간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무엇 때문에 쉬운 길인 이행(易行)을 버리고 어려운 길인 난행(難行)을 택할 것인가를 되묻는다. 난행은 여래의 땅이 바깥에 있는 줄 알고 하염없이 그곳을 찾아 정처 없이 헤매는 것을 말함이다. 여래의 땅은 내안에 여기 있는 것을 모르고 자꾸 바깥을 두리번거리면서 헤매는 것을 영가대사는 꾸짖는다. 이것을 영가대사는 도가의 용어를 빌려서 ‘무위법을 버리고 유위법을 쓴다’고 꾸짖는다. 보통 이 용어를 그냥 함이 없는 무위법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