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사찰 학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조명하는 의미 있는 논문들이 발표될 예정이어서 주목된다. 특히 만세운동이 서울에서 지방으로 확산되는 연결고리로써 사찰 학림과 스님들의 역할이 조명된다는 점에서 불교계 항일운동사에서 중요한 자료가 될 가능성이 크다.조계종 백년대계본부 불교사회연구소(소장 원철 스님)는 2월27일 오후 1시 서울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불교계의 3·1운동과 항일운동’을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7개 논문 발표와 토론, 질의응답이 이어질 이번 세미나의
2019년 기해(己亥)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3·1운동은 일제가 문화민족이었던 우리 민족의 자주권을 박탈하고 잔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였던 만행(蠻行)에 항거하여 온 국민들이 맨 몸으로 저항하였던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은 천도교·불교·기독교 등 종교계 대표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함으로써 운동을 촉발시켰다. 뿐만 아니라 경향 각지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의 확산과정에서 종교 조직이 크게 활용되었기 때문에 3·1운동에서 종교계의 비중은 매우 크다.3·1운동은 제헌헌법기초위원회가 작성한 헌법 초안에 ‘3·1
김연일의 제주 법정사 봉기가 불교계 첫 무력항쟁비구니 상근은 자금조달 … 신상완은 日 회담 동행 왼쪽부터 불교계 독립운동의 핵심 만해 스님, 민족대표로 3·1운동 참여한 용성 스님, 한성임시정부 불교대표 한영 스님, 의병활동 후 출가해 독립투신한 운허 스님. “아등은 기(起) 하였노라. 대한의 국민으로서 대한국가의 자유와 독립을 완성하기 위하여 2천년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진 대한불교를 일본화와 절멸(絶滅)에서 구하기 위해 아 7천의 대한 승니(僧尼)는 결속하고 기(起)하였노니 시사보국(矢死報國)의 발원과 중의경생(重義輕生)의 이 의기(義氣)를 뉘 막으며 무엇이 막으리오. 한번 결속하여 분기(奮起)한 아등은 대원(大願)을 성취하기까지 오직 전진하고 혈전(血戰)할 뿐인저.”
1954년 8월 24일∼25일 선학원에서 개최된 비구승 대표자 대회. 이날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정화운동에 들어갔다. 사진제공=민족사 한국 현대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큰 사건은 비구 승단인 조계종 측에서 이른바 ‘정화운동’ 또는 ‘정화불사’라 부르는 비구·대처승의 갈등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사건은 대처 승단인 태고종에서는 ‘법난’·‘승단 분규’·‘정화라는 이름의 폭력’ 등으로 규정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 이렇게 다른 까닭은 진행과정에서 숱한 폭력과 법정 소송이 발생하여 양측 모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일이 지난 지금 상황에서도 조계종과 태고종은 이 사건을 표현하면서 양측 모두 공감하는 용어를 찾지 못했다. 이 운동의 직접적인 발단은 195
1919년 중국 상해에서 12명 승려 이름으로 발표“7000명 승려 피로써 독립투쟁하겠다” 내용 담겨 선언서 작성자 놓고 백초월·신상원 등 의견‘분분’ 1919년 11월 15일 중국 상해에서 발표된 대한승려연합회의 독립선언서. (사진제공=민족사)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는 1919년 11월 15일자 중국 상해에서 12명의 승려 이름으로 발표된 독립선언서이다. 이 선언서는 1969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굴했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 있었지만 후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던 임영정은 1970년 3월 15일자 현재 「불교신문」의 전신인「대한불교」 신문에 이 선언서의 입수 경위와 발견의 의의를 소개하였다. 그가 소개한 내용은 이러하다. 이 선언서는 1
독립기념관 ‘불교와 민족운동’ 기획전 근·현대 한국사 속 불교 역할 알려 '만해 한용운 수형 기록표'. 1919년 3·1운동의 민족대표로 참여한 만해 한용운 스님이 마포 형무소에 수감돼 있을 때 촬영한 수형기록표. ‘만해 한용운 스님 외에 일제시대 독립운동을 했던 스님은 누가 있나’라는 질문에 바로 이렇다할 답을 낼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불교 신자건 그렇지 않은 사람이건 우리나라 근현대사에서 특히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에 불교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역사 교과서에서는 만해 스님 밖에 만 날 수 없을 뿐더러 불교 근현대사는 손쉽게 책을 사볼 수 있을 만큼 자료가 풍부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물관 등 공적(公的) 전시장에서 근현대사에서 불교의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