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재배에서 해외 수출까지 언뜻 보기에 세상은 멋대로 인듯하다. 불합리하고 불평등하며 도통 정의하고는 거리가 먼 일들이 우리 곁에 상존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고, 어떤 이는 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기아와 전쟁에 시달리며 아귀다툼을 벌이다 결국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같은 나라에 태어나 살더라도 교묘한 술수와 이기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정직하고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부지런히 사는 데도 실패하는 이들이 허다하다. 일체가 멋대로 인듯 보이기는 하나 세상사에는 모든 것이 상의상존의 법칙에 따라 연을 맺고 있으며 인연법에 따라 과가 오는 법. 부처님은 그것을 연기라 설하셨다. 30대 중반부터 장애우와 생활 1995년 11월, 함평 연꽃나
월정사에서 단기출가를 마친 김영숙 보살은 여생을 장애인 제자들과 수행 토굴에서 조용히 살길 바랬다. 70년 각심원서정신지체아들과 인연대소변 받아내며24시간 함께 생활재활원 법우회장으로부처님 말씀 전해지난 6월 정년 퇴임장애제자들과 수행 발원 “이 세상에서 어린 시절이란 얼마나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시절인가. 그런데도 어른들의 어긋나버린 희망과 영원한 새 시작의 짐을 지워놓는 곳은 바로 연약한 어깨 위라는 걸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절감하게 된다.”(가브리엘 루아, ‘내 생애의 아이들’) “엄마, 가지마! 가지마, 엄마!!”바다를 사이에 두고 정신지체아들이 절규했다. 뱃머리를 돌리던 선박 갑판 위에 한 여인의 가슴은 문드러졌다. 1983년 4월 국가 정책으
“입시 대신 불교 말하니 아이들 얼굴에 박꽃 피네요” 요즘 사찰에서는 청소년들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입시 위주로만 몰아가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어려서부터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우다보니 청소년들에게 종교는 관심 밖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어느 사찰을 가나 따사로운 봄볕 같은 중고등학생들의 웃음소리를 듣기가 힘들어졌다. 학교에 법당 ‘파라미타실’ 개설 그러나 서울디자인고등학교 내에 마련된 법당은 입구부터 시끌벅적하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부터 수업이 끝나고 땅거미가 지는 시간까지 “깔깔”대는 소리가 이어진다. 그런데 이 법당에는 스님도 법사도 없다. 교사들과 학생들만이 오가는 공간일 뿐. 이곳은 서울디자인고등학교 김화연 선생님이 개인 원력으로 만든 법당이기 때문이다. “
“이 녹음도서는 은석초등학교 불교연화어린이가 시각장애인과 환자 등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낭독 봉사를 한 것입니다.” 장난기 가득한 동자승들이 복숭아를 먹고 있는 그림이 눈에 확 들어오는 CD위에 새겨진 문구다. 무슨 CD일까. 제목은 ‘녹음도서 어린이 불교성전’. 오디오에 CD를 넣으면 통통 튀는 찬불가를 배경으로 법구경의 ‘비둘기 부부’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구연동화 같다. 비록 전문가와 같은 능숙함은 없지만 또박또박 읽어 내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이 밴 목소리는 귀에 쏙쏙 들어온다. 때 묻지 않은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미소가 절로 배어난다.CD의 목소리 주인공들은 서울 은석 초등학교 불교반 연화어린이회 어린이들. 지난 11월 7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전문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CD는
포교의 길은 참 험하다. 마치 가시밭을 눈으로 보면서도 걸어가야 하는 길과 같다. 내 모든 것을 바쳐야 조그만 결실을 맺을 수 있는 길이 포교의 길이라 할 수 있으리라. 특히 재가자들의 포교는 더욱 어렵다. 생업과 포교의 사이에서 늘 고민하고 갈등하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알리겠다는 원력 하나로 버텨야 하기 때문이다. 순복음 주보 인쇄하며 문서포교 결심 그 순수한 원력으로 ‘모범사례’라 손꼽히는 재가자들도 적지 않다. 서울 장충동에 손수 선원을 열고 ‘문서포교’와 ‘어린이포교’를 실천하며 사는 유혜림 법사도 그런 모범사례다. 유혜림 법사는 본래 인쇄업자였다. 1984년 ‘광진문화사’라는 인쇄업소를 설립하고 중노동에 가깝다는 인쇄업계에 뛰어들었다. 당시만 해도 인쇄업은 대부분 남자들의 일이라는 인식
30여 명 회원모아제니스불교문화원 창립 국제 콩쿨 성인부문 대상 성공가도 버리고 불교 선택 매달 50여 차례 공연바쁜 삶이 곧 수행 끝없는 목마름이 이어지는 사막, 그러나 선인장은 기어이 한 떨기 꽃을 피워낸다. 사막에 핀 한 떨기 선인장 꽃은 생명의 경이로움마저 느끼게 한다. 일체의 생명을 허락하지 않을 것 같은 사막의 척박함은 선인장에게 작은 걸림돌일 뿐 꽃을 피우는 것을 막지 못한다. 제니스불교문화원의 활동을 보노라면 사막의 선인장을 대하는 듯하다. 아마도 제니스가 활동하는 불교 문화마당이 사막과도 같이 척박하기 때문이리라. 제니스는 선을 뜻하는 ‘Zen’과 동사 ‘is’의 합성어로, 禪으로서 불교문화를 이끌어 나간다는 의미이다. 제니스불교문화원은 2005년 6월 첫 발을 내디뎠다. 기실 불교
“너는 인간에 있을 때에 아이들이 살생하고 고기 먹는 것을 돕거나 기뻐하였으니, 살생한 까닭에 목숨이 짧고, 기뻐한 까닭에 괴로우리라. 그리하여 똑같은 과보를 받고 지옥에 들리라.” “그들을 내 몸과 바꾸어 비교해 보라. 남을 시켜 죽이게 해서도, 스스로 죽여서도 안 된다.” 천축사서 법문 듣고 불문에 입문 천축사 법당 한 쪽에 앉아 있던 중년의 한 남자가 움찔거렸다.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한 눈빛에는 긴장감마저 서렸다. 떨리는 두 손은 연신 식은땀을 훔쳤다. 이대로는 안 된다. 중년의 한 남자는 그 길로 산신각에 올랐다. 참회하고 또 참회했다. 다신 살생하지 않겠노라고. 당시 마흔 아홉이었던 중앙신도회 구자선(72·덕암) 고문은 그렇게 불제자의 삶을 서원했다. 1937년 전북 부안에서
힘겹거나 포기하고 싶을 땐 ‘은지(銀地)’라는 법명을 생각한다는 위정희 보살은 “이 세상이 부처님 나라에 조금 더 닮아가도록 사회의 천수천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순박한 시골 소녀가 있었다. 읽을만한 책도, 즐거운 볼거리도 부족했던 1970년대, 이 시골 소녀의 유일한 재밋거리는 엄마가 들려주는 옛날 얘기뿐이었다. “옛날, 옛날 부처님 살던 시절 어느 나라 왕의 딸에 관한 얘기란다. 지체 높은 공주님은 부처님께 이런 맹세를 하면서 살아갔다는구나. 자신을 위해 재물을 모으지 않고 고통스러운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한시라도 잊지 않겠다고.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살아가게 되었다지….” 엄마는 절에 불공을 드리고 온 날이면
이문희 보살은 “아만심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참회하기 위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줄 뿐 아직은 참회하고 정진할 것이 많은 범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극심한 고통에 한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 살아 쉼 쉬고 있다는 사실에 짧은 안도의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이내 한숨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몸서리치는 긴 신음으로 바뀌었다. 숨을 쉰다는 것, 심장이 멈추지 않고 뛰고 있다는 것이 증오스러울 만큼 고통은 온몸 구석구석을 엄습했다. 이문희(55·금강심) 보살이 사고를 당한 것은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둔 1996년 5월 23일. 법당을 장식할 꽃을 마련해 집으로 향하는 길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일어났다. 버스에 올라 요금을 지불하려는
1998년 시드니 대회서5대 WFB 세계본부 회장 당선 태국 외교부 출신 엘리트20년 전 처음 한국 방문 기상이변 따른 환경파괴불법에서 해법 찾아야 판 와나메티 회장은 이날 참석한 각 국 불교도들의 대표로서 세계 곳곳에 불교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10월 9일 WFB(World Fellowship of Buddhist, 세계불교도우의회) 국제 컨퍼런스가 열리던 날. 경주 조선호텔 대연회장에 200여 명의 청중이 모여 앉았다. 곳곳에서 황갈색의 상좌부 불교권 가사를 입은 스님들이 눈에 띄었고, 또 한편에는 흰색 정장을 맞춰 입은 인도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하나 같이 얼굴과 피부색이 틀렸지만, 어느 순간 이들은 하나같이 두 손을 모으고 합장
11월 21일 회갑기념 출판법회학창시절 처음 카메라에 매료불교근현대사 사진 기록 염원 사진작가 선암 스님. 그는 ‘출가자가 수행은 않고 사진이라니…’라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평생 사진에 취해, 때론 사진을 수행삼아 묵묵히 한 길만을 고집해 왔다. 도반들이 걸망을 메고 세상 이곳저곳으로 만행을 떠날 때, 카메라를 메고 산천 곳곳을 헤맸다. 도반들이 화두를 붙잡고 삼매에 들 때 그는 사각 앵글이 빚어낸 화엄만다라를 담기 위해 혼신에 힘을 다해 셔터를 눌렀다. 그렇게 40여년. 어느 덧 회갑을 맞은 선암 스님이 11월 21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사진집 『출가』출판기념회를 겸해 전시회를 갖는다. 사진에 빠져 때로는 세상을 등지고 오직 카메라를 앞세워 전국 곳곳을 누볐던 만행의 결과물들을 한꺼번에
암으로 남편 먼저 보내고아들까지 병고로 고통 신묘장구대다라니에 의지죽음보다 더한 고통 견뎌 하루 넘던 다라니 1000독이제는 4시간 만에 마쳐 “위암 말기입니다. 수술을 하면 1년을 살 수 있고 수술을 하지 않으면 그것도 못삽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의사는 길게 말하지 않았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당연히 수술해서 어떻게든지 남편을 살리겠다고 말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머리가 ‘핑’ 돌았다. 온 몸에 힘이 쭉 빠졌나갔다. 이를 꽉 깨물고 떨리는 다리를 두 손으로 꼭 잡았지만 뛰는 가슴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다시 일어서는데 그제서야 그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양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느 날부터인가 유난히 몸이 부쩍 마르고 먹는 음식마다 소화를 시키지 못하는
계절은 시나브로 가을인데 날은 아직도 30도를 오르내리던 지난 9월 10일. 인천공항 입국장 문이 열리자 백발이 성성한 여인이 성큼 걸음을 내딛었다. 쏟아지는 카메라 세례.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손들어 미소 짓던 여인은 멀리서 기다리고 있던 외국인이 다가오자 서로를 끌어안았다. 그 외국인은 남편의 절친한 친구이자 남편이 고국에서 구금되자 유럽에서 석방운동에 앞장섰던 세계적인 작곡가 프란시스 트래비스. 둘 사이에 짧은 대화가 오고 갔지만, 말보다도 무거운 벅찬 소회가 둘을 휘감았다. 故 윤이상 선생의 무인 이수자(80) 여사가 고국 땅을 밟던 날 하늘은 그렇게도 파랬다. 9월 10일 남편 영가와 함께 귀국 40년만이다. 세상이 바뀌어도 4번이나 바뀌었을 동안 이 나라는 얼마나 많은 변화를 이뤘
준·부사관은 준위와 부사관을 합친 단어로 이들은 부대 내에서 ‘병사들의 어머니’라 불린다. 부대 내 수많은 궂은일을 마다않고 도맡아 하는 살림꾼이자 늘 병사들과 함께 뛰고 구르며 생활하는 간부들이다. 그래서 사병들은 군생활 2년을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어머니처럼, 때로는 친형처럼 그들을 의지하며 보낸다.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 백담사 만해마을 대강당에 ‘아미타불 송’이 울려 퍼졌다. 200여 명이 입 모아 외치는 장엄한 소리. 어디를 가면 이런 절절함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마치 그동안 살며 겪어온 애환들이 맑디맑은 신심과 함께 ‘나무 아미타불’ 짧은 단어에 담겨 소리의 바다를 이룬 듯 하다. 소리의 바다가 밀물처럼 가슴을 때린다. 9월 4~6일 열린 준·부사관 불자 수련회는 전국 육·
“처음부터 수행하겠다고 결심하고 오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대부분 우리 빌라에 이런 모임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호기심 반, 궁금증 반으로 찾아오지요. 서로 음식도 조금씩 싸와서 나눠먹고 이야기도 하면서 불교에 대해서도 알아가고 수행에 대해서도 조금씩 배우는 것이지요.” “떡 좀 가져왔어요. 배고프면 같이 먹어요.”“아래층 거사님이 아드님도 데리고 오셨네요.” 삼삼오오 모여드는 모양새가 동네 반상회 날이라도 된 듯 했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각자 좌복 하나씩 펼치더니 턱하니 가부좌부터 틀고 앉는다. 정해진 자리도 없고 거추장스런 인사도 없다. 그냥 오는 순서대로, 각자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아들을 데리고 온 거사님, 6살짜리 딸아이 손을 잡고 함께 온 젊은 주부, 남편과
“엄마, 엄마는 금방 건강해질거야. 엄마 빨리 집으로 돌아와. 사랑해.” 초등학교에 다니던 큰 딸아이의 편지. 신장(콩팥) 이상으로 병상에 누워 편지를 읽던 한 어머니의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 가슴을 적셨다. 이만하면 오래 살았구나 싶었다. 계속된 투병 생활이 지겹기도 했다. 하지만 남아있는 가족들 걱정은 그의 삶을 부여잡고 놓아 주질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딸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살아야했다. 10여 년 간 신장이식만 두 차례 하루에 다섯 시간 씩 일주일에 세 번, 그는 고통스러운 혈액투석을 견뎠다. 몸 속 노폐물을 걸러주는 신장이 제 기능을 못하는 이유로 팔에 고무호스를 연결해 노폐물을 걸렀다. 물 한 컵조차 시원하게 마실 수 없었다. 다량의 요소와 노폐물이 혈액에 쌓이기 때문
제11회 만해대상을 수상한 영광의 얼굴들. 왼쪽부터 봉고 온딤바 대통령, 김남조 시인, 유종호 교수, 랭카스터 교수, 니스투리론 회장, 서인혁 총재.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의 자유·민족사상과 문학의 향기가 2007년 또 다시 설악의 골짜기를 흔들었다. 만해사상실천선양회(회주 오현)가 주최하는 2007만해축전이 8월 11일부터 13일까지 설악산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화려하게 펼쳐졌다. 올해는 만해축전의 주요행사 가운데 하나인 만해대상 시상식에 가봉공화국의 엘 하지 오마르 봉고 온딤바 대통령, 루이스 랭카스터 전 버클리대 교수 등을 비롯, 국내외 수상자들이 빠짐없이 참석해 만해대상의 높아진 국제적 위상을 반영했다. 특히 육당 최남선이
일본을 대표하는 계율학자 마츠오 겐지 야마가타(山形)대학 교수가 7월 30일부터 8월 3일까지 4박 5일간의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청정계율이 살아있는 한국불교의 현장을 직접 보고 싶어서 왔다는 그는 짧은 방문 기간 동안 동국대 김호성 교수와 동행하며 해인사 율원, 불국사 석굴암, 분황사, 황룡사지, 조계사, 선학원 등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들을 둘러보았다. 또 해인사 율원장 무관 스님, 민족사 윤창화 사장, 정우서적 이성운 사장, 부천대 김광식 교수 등을 만나 한국불교와 일본불교의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을 가졌다. “한국의 스님들은 결혼을 하지 않잖아요. 그렇다면 군대 역시 가지 않습니까?” “성행위를 하는 것만이 파계가 아니라 군대를 가는 것 또한 파계행위가 아닙니까?” “군대를
“난행능행(難行能行)하면 존중여불(尊重如佛)이라.”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에 있는 경구다. 지난 10여년 간 우리 경제를 휘청거리게 할 정도로 부담을 주었던 간판급 보험, 금융회사들을 살리는 데에 진력해 왔던 박해춘(59·사진) 우리은행장, 그가 삶의 나침반으로 여겨 온 가르침이다. 풀어쓰자면 어려운 일을 기꺼이 행하면 부처님과 같이 존중받게 된다는 뜻이다. 유력 포털사이트는 물론 언론매체의 인물 사이트에 늘 불자라고 밝혀 온 그에게 꼭 들어맞고, 그의 삶을 잘 대변해 주는 문구이다. 대대손손 독실한 불자 가정 박 행장은 경제계에선 ‘기업재생 전문가’로 통한다. 부실기업을 재생하는 작업은 어려운 일을 기꺼이 행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쓰러져 가는 기업
“부채가 모자라다구요? 몇 개 더 필요하십니까? 곧 보내겠습니다.” “어린이 티셔츠는 두 벌을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땀이 많이 나는 여름에는 필수입니다.” “물놀이 하는 계곡에 깊은 곳은 없나요? 늘 가던 곳이어도 법회 전날 한 번 더 점검해야 됩니다.” 여기저기서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문의는 모두 어린이법회나 어린이 불교학교관련 내용. 수화기를 놓을 새가 없이 업무 삼매에 빠져 밥 때를 놓친 사단법인 동련 최미선(40·대지혜) 사무국장. 직원들의 아우성에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식은 밥을 먹는 그녀이지만 꼬마부처들에 대한 잦은 문의가 즐거운지 연신 싱글벙글이다. 20년째 휴가 대신 어린이 법회 “주말부터 어린이들을 위한 여름불교학교 원정대를 떠납니다. 한 달간 전국을 누비는 대장정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