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성염불이 전부라 착각하면 안돼정토선염불을 통하여 자성염불에 도달하기까지 어떤 분은 의외로 쉽게 도달한 분이 있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참으로 애써 어렵게 도달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분들은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도 자성염불의 경계를 체험도 하지 못하신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우리가 자성염불의 경계가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자성염불은 이제 진짜 공부의 시작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새로운 각오로 공부에 임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자님들이 자성염불의 경계에서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방관하여 공부가 뒤로 물러나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그러므로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자성염불의 경계는 결코 불퇴전의 경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언제든 마음자리를 놓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중생들의 고통을 제거하고 생사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자 하는 간절한 자비심에서 비롯된 교화 방편 아님이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중생들의 기복적인 갈망 또한 무조건 외면 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경전 속에도 부처님께서 중생들에게 복을 짓는 법에 대한 가르침이나 복을 내려주는 축원을 해주는 내용도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차원에서 말씀드리자면 정토선은 실제로는 깨달음의 길, 성불의 길로 이끌어주는 고도의 선(禪) 수행법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중생들의 소소한 염원까지도 모두 섭수하는 최상의 기도법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아미타불이라는 부처님의 명호에 깃든 의미 자체가 한량없는 생명 즉, 영생불멸의 영원한 수명이라는 의미와 그리고 한
우리 한국불교 수행법에 있어서 절 수행은 이미 가장 널리 보편화 된 수행방편의 하나이며, 실제로 자신의 업장을 소멸하는 수행으로 많은 불자님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기에 정토선을 수행하면서 함께 ‘절’을 병행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절 수행에 관해서는 관정큰스님의 특별한 말씀은 없었지만 저 역시 정토선염불과 절을 함께 수행으로 삼아 가고 있습니다. 정토선 철야정진 모임에서는 절을 할 때 일반적인 절 방법과 달리 정토선염불을 A반과 B반이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교대로 염불하듯이 절을 할 때도 교대로 절을 하면서 아주 천천히 최대한 공손하게 절을 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절’하면 108배에서부터 3천배, 만 배 등 빠른 속도의 절 수행을 많이 떠올리지만 정토선에서 병행하는 절 수행은 정토선염불법
정토선 수행에 있어서도 신원행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원행은 바로 정토선 수행의 근본뿌리인 정토수행에 해당하므로, 만약 신원행이 갖춰지지 않고 단순히 정토선을 수행한다면 이는 일반적인 여타의 선수행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토선에 있어서 신원행은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으로 최상의 선수행에 완전한 해탈의 약속을 더해줌과 같아서 설사 선수행이 깊지 못하다고 할지라도 신원행을 통해 해탈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수행인 것입니다. 극락왕생의 삼대요건인 신원행은 비유하자면 가마솥의 삼발이와도 같아서 세 가지 요건 중 만약 어느 한 가지만 빠트려도 마치 가마솥의 한 쪽 발이 부러지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넘어지는 것과 같이 극락세계에 왕생하는데 커다란 차질을 가져오게 됩니다. 정토선수행법의
정토선 수행을 하시는 많은 불자님들이 의문을 갖고 자주하는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전혀 없는 고요하고 적적한 상황에서도 내면세계로 의식을 돌이키기만 하면 바로 자성의 염불소리가 울려 퍼지는 확고한 자성염불의 단계에 도달한 다음에 비로소 좌선으로 들어가야 공부가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확고한 자성염불을 이룬 뒤에는 이미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선정쌍수(禪淨雙修)의 선(禪)수행 단계이기 때문에 이 때부터는 단지 내면의 소리에 집중하면서 애써 소리를 내어 칭명염불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좌선을 할 때나 걷고, 서고, 눕고, 말하거나 침묵을 하거나 모든 동작을 행함에 있어서 항상 내면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나무아미타불)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일념삼매에 들어가도록 노력을 하여야
불성은 평등하므로 자성염불 또한 남녀노소 그리고 스님과 재가불자를 막론하고 누가, 얼마나 열심히 정진 하느냐에 따라서 어른보다 어린아이가 먼저 자성염불을 이루기도 하고 스님보다 재가 불자가 먼저 이룬 사례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정진에 임할 때 첫째는 절대적인 믿음을 갖고 “하면 된다. 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공부에 임해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공부를 지어 나감에 있어서 꾸준하고 일여하게 공부를 지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어쩌다 한 번이라도 공부를 빼먹으면 왠지 서운하고 개운치 않는, 무언가 목마르는 듯한 갈증이 느껴지듯이 그렇게 정진을 해 나가야 합니다. 일순간 열심히 정진 하다가 때론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식의 공부는 마치 배고플 때엔 밥을 한번에 몇 그릇씩 먹다가도 배부를
자성염불이란 우리의 내면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오는 경계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보통 염불하는 분들이 속으로 염불을 놓치지 않고 생각을 지속시키는 의념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의념은 정말로 내면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의지력으로 스스로 만들어서 염불을 지어가는 경계에 불과한데 반하여 자성염불은 우리의 자성(自性;자신의 성품)이 염불을 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이 자성염불의 경계는 의념으로 조작하는 염불과는 달리 실제로 오디오를 틀어 놓은 것처럼 우리의 내면에서 염불소리가 들려오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자성염불을 이루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오디오를 틀어놓았는가 두리번거리며 찾게 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자성염불을 이루는 사례를 보면 어떤 사람은 3일만에도 자성염불을 이루는 경우도 있
정토선염불을 수행하면 가장 처음 자성염불의 경계가 찾아옵니다. 자성염불이란 우리 내면에서 마치 녹음기나 오디오를 틀어놓은 것처럼 실제로 염불소리가 울려 퍼지기 때문에 이 단계에서는 굳이 소리 내어 염불할 필요 없이 내면에서 들려오는 염불소리에 주의를 집중하면 됩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일념에서 무념의 경지를 닦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경계가 나타나는데, 일반적으로 우리의 심령이 맑아지고 정화되면 현상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물질로 된 사물을 보는 육안(肉眼)의 경계를 뛰어넘어 신질(神質)로 이루어진 세계를 볼 수 있는 천안(天眼: 하늘의 눈)이 열리게 됩니다. 보통사람들은 잠이 들면 꿈속의 현상들에 속아서 이리저리 끌려 다니다가 꿈을 깨고 나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육안의 경계에서는 자신의
정토선염불과 일반염불의 가장 큰 차이점은 첫째 일정한 운율을 가지고 염불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기존의 전통적인 일반 염불은 일정한 곡을 가지고 하는 것이 아니라 염불하는 사람의 호흡과 정서에 따라서 염불 가락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하여서 많은 사람들이 염불을 할 때 모두가 각자의 호흡에 따라 각자의 가락에 천차만별로 다른 리듬을 내면서 염불을 하여 정토선염불의 두 마디로 이루어진 일정한 리듬과는 대조적인 면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토선 염불은 일정한 두 마디의 리듬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똑 같은 리듬으로 염불을 하기 때문에 굉장한 시너지효과(상승작용)를 가져오며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것처럼 남성의 저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여성의 고음에 이르기까
정토선 수행법은 단계적인 수행과정이 있는데, 첫 번째 단계는 정토선 염불법으로 자성염불(自性念佛: 자신의 성품이 염불을 하는 단계로서 우리의 의식으로 조작을 하여 염불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실제로 오디오를 틀어 놓은 것처럼 염불소리가 들려오는 경계)을 이루기 위한 염불수행 단계이며 두 번째는 자성염불을 이룬 뒤에 선정삼매를 닦아가는 좌선 위주의 수행 단계 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여기서는 생략하고 첫 번째 단계인 자성염불을 이루는 정토선 염불법의 수행방법에 대해서만 우선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자성염불을 이루기 위한 정토선 염불수행법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두 마디의 염불을 가지고 일정한 박자와 일정한 운율에 맞춰서 A반과 B반 양쪽으로 나누어서 염불을 하는데, A반이 먼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정토선 수행법은 화두선처럼 우리 사바세계의 선사나 큰 스님들이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정토선 수행법은 극락세계를 다녀오신 관정 큰스님께서 불보살님의 부촉을 받아 극락세계에서 배워온 것이므로 굳이 누가 만들었는가를 얘기하자면 불보살님의 지혜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정토선 수행법은 중국 근대의 고승이신 허운(虛雲)대선사의 제자 관정(寬淨:1924~2007)큰스님께서 1967년 복건성의 ‘맥사암사:麥斜岩寺’라는 절의 뒤편 동굴에서 7일간 선정에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선정도중에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밖으로 나가서 비몽사몽간에 약 100키로 정도를 걷다가 관세음보살께서 화신으로 나투신 원관(圓寬)노스님이란 분을 만나게 되었으며 관세음보살님의 화신이신 원관노스님의 이끌림을 받아
정토선 수행법이란 한마디로 말하자면 정토종과 선종의 핵심적인 수행법을 하나로 결합시킨 수행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정토종의 정토수행에 대해서는 불자님들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 됩니다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극락세계에 대한 확고한 믿음(信)과 시방세계의 불국토중에 가장 훌륭한 불국토인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나고자 하는 간절한 발원(願)과 그리고 선업을 닦으면서 염불수행(行)을 놓치지 않는 것을 정토수행이라고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종에서의 핵심적인 수행에 대해서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하나의 공안을 들고서 온갖 망상을 바로 일념으로 만들어 나가고 더 나아가서 그 일념을 무념의 경지로 이끌어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토선이란 바로 이러한 정토수행과 선수행의 핵
사경수행은 불교의 가장 오래된 수행법의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깊이 있는 연구와 조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경수행이 여타의 수행과 독립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병행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불교계를 벗어나 세상을 크게 보면, 이제는 타 종교에서까지 사경이 간경을 심화시키는 한 방법이자 탁월한 기도와 명상법의 하나로 널리 행해지고 있습니다. 즉 사경수행이 모든 종교에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정작 발전시켜 타 종교인들까지 진리를 깨우치는 길을 제시해주어야 할 불교계에서조차 아직도 사경수행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와 방법이 제대로 정립이 되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 모든 일에 전문가가 있듯이 사경수행 역시 전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사경수행의 지도자는 여러 과정을 습득하는
다음은 수행 중에 나타나는 경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경계는 매우 다양하지만 종합하면 다음의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몸에 이상이 오는 경계와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든 초능력과 같은 착각으로 오는 경계입니다. 이러한 모든 경계 또한 원인에 따른 결과물입니다. 이에 대한 굳은 믿음이 정법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네 관점의 통합체입니다. 첫째는 근본 불성(본래면목)이요, 둘째는 그 본래면목을 보고자 하는 거짓 마음이요, 셋째는 다른 사물과 대상을 인식하는 순간 작용이요, 넷째는 다른 사물이나 대상을 통해 투영되는 외부 형상입니다. 이 넷이 마음 작용을 일으키는데 근본 불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상한 것임을 깊이 인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이 넷을 바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가지고
모든 수행의 경계는 크게 마음으로부터 오는 경계와 현실로 오는 경계, 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번에는 마음으로부터 오는 경계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마음으로부터 오는 경계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꿈입니다. 꿈을 통해 여러 가지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꿈은 어디까지나 꿈일 뿐이라는 사실을 수행자들은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꿈을 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마도 사실일 것입니다. 부처님은 꿈을 꿀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매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 하여 그 순간이 되어 버린다면 그림자가 남지 않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는 그림자가 없었다고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그림자는 육신에 따르는 그림자가 아닌 마음의 그림자를 말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매 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는 법사리 신앙과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법사리 신앙은 부처님의 진리에 대한 신앙으로 불교의 근본신앙에 다름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사경을 통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전은 신심을 배가시키고 정법을 확인하는 기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사경은 승속을 망라한 모든 불자(佛子)들의 가장 중요한 수행덕목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법사리도 여법하게 보존이 되지 않는다면 그 가치가 반감될 수밖에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법사리를 여법하게 장엄하지 않고 소홀히 하는 일이 죄가 된다고 분명하게 설하고 있습니다. 법사리의 여법한 장엄은 수지(受持)와 관련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경하고 수지하며 독송하고 널리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사경을 소
모든 일은 형식과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는 우리의 몸과 마음으로도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형식과 내용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사경수행은 다른 여타의 수행법과는 달리 내적인 경계와 외적인 사경을 함께 추구하는 수행법입니다. 이러한 점은 사불수행과 맥을 같이 합니다. 내용은 마음의 변화요, 형식은 사경입니다. 사경수행은 이 둘의 관계를 조화롭게 추구하는 수행법입니다. 기본적으로 사경수행에서 오자와 탈자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자와 탈자는 수행이 치밀하지 못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사경수행 중에 마음이 현재성을 벗어나 앞서간다든지 할 때에는 틀림없이 오자와 탈자가 생깁니다. 가급적이면 없으면 좋겠지요. 특히 저본 경전을 옆에 두고 옮겨 쓸 때 오자와 탈자가 많이 발생합니다. 마음
모든 수행법은 호흡을 기본으로 합니다. 그 까닭은 삶이 호흡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몸과 마음이라는 두 요소에 의해 지탱이 되는 삶이 있어야만 마음을 닦는 수행도 이루어지므로 호흡은 수행의 첫 번째 관문입니다. 음식은 하루 이틀 먹지 않아도 생명에 큰 지장이 없으나 호흡은 단 몇 분만 중단되어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개 호흡의 중요성을 간과합니다. 호흡의 인식은 생명의 존엄성을 인식하는 일입니다. 무심코 마시는 공기, 맑은 산소를 제공하는 식물, 내리 쬐는 햇살 한 줌, 살랑대는 바람 한 점 등 세상 만유가 더없이 소중한 관계 속의 존재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는 다름 아닌 천지여아동근(天地與我同根)과 만물여아일체(萬物與我一體)의 증득입니다. 이와 같이 호흡을 바로 관(觀)하는 것
처음 사경은 불경(佛經)의 보급과 독송, 연구를 위한 목적으로 묵서로 사성되었습니다. 그런데 사경의 기능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목판 인쇄술이 개발되었고, 이로 인하여 경전의 광선유포라는 사경의 기능은 축소됩니다. 이후 사경은 공덕과 수행의 한 방편으로서 널리 행해집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최상의 재료로 장엄하게 사성하는 방법이 모색됩니다. 그 결과 개발된 서사 재료가 금니와 은니입니다. 가장 귀한 재료로써 최상의 기법으로 정성을 다 하여 사경을 제작하여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는 마음가짐이 신앙심의 척도로 여겨졌을 것임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금니와 은니를 사용하여 서사한 사경을 흔히 장엄경(莊嚴經)이라고 합니다. 이들 장엄경은 법신사리의 의미와 함께 예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불상(佛像)을 황금
사경의 방법 중의 하나로 일자일배(一字一拜)는 한 글자를 쓰고 한 번 절을 하는 방법을 뜻하고 일자삼배(一字三拜)는 한 글자를 쓰고 세 번 절을 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일자삼례(一字三禮)라고도 합니다. 이밖에도 한 획을 긋고 삼배를 올리는 일획삼배, 한 행을 사경하고 삼배를 올리는 일행삼배 등 여러 가지 사경의 방법이 있습니다. 이는 사경수행을 숭고한 신앙의 차원에서 한 글자 한 글자 예배를 올리면서 정성을 다 하여 사성하는 구체적인 사경수행의 방법으로 널리 회자되곤 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사경수행에 임할 때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했을 것임은 자명합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방법으로 사성을 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경의 방법이 결코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