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는 땀을 먹는다. 장인 땀 먹지 않은 기와는 지붕을 만들 수 없다. 씨줄날줄 얽듯 촘촘하고 아름답게 선을 잡아 내려오는 기와로 얹은 지붕은 그네들 땀이 빚은 결정이다. 번와와공들 땀으로 뜨거운 태양, 모진 비바람을 버틴다. 문화재수리기능 자격 2개 인정번와와공·드잡이공 잇달아 취득절서 유년시절…전통기와 관심지붕일하는 장인들에 매력 느껴1981년 입문 36년째 외길 고집한국인물대상 문화재보존 대상개인사비 털어 문화재학교 설립대목·단청·와공 전문가 양성복지만두레로 보시바라밀 실천‘번와와공(翻瓦瓦工)’은 기와
‘모셔놓고 예배 올리면 해갈되려나….’1979년 단청·도금 분야에 입문화공·옻칠 섭렵하며 전문성 키워생활이 신앙된 부처님 개금불사예배 대상 성상에 심혈 기울여최소 9번 옻칠한 뒤 금박 입혀전통식 옷칠개금불사 보존 고집“자네는 부처님을 빛내는 사람”법장 스님 말씀 되새기며 불사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우전왕은 제석천 청으로 도리천에 오른 부처님이 그리웠다. 감로법문을 향한 갈증으로 마음은 메말라갔다. 매일 마른 목 치켜 올려 하늘을 우러러봤다. 볼 수 없었다. 나라 안 훌륭한 장인을 수소문했다. 법비[法雨] 가뭄으로 쩍쩍
76년 서울 인사동서 배첩 입문풀 쑤고 틀 나르며 가게서 숙식차가방 운영하며 본격적인 작업90년 문화재수리기능 자격 취득2015년 장황문화재연구소 개설보물 등 문화재 수리복원 전념과학적 접근이 신뢰 얻고 있어매번 보고서 남겨 후대에 전승성장 멈춘 소년이 있었다.공부가 싫었다. 돈을 벌고 싶었다. 먹고 살길이 급했다. 8살 터울 형에게 졸라 서울 인사동 표구사에 발을 들였다. 못 배운 점이 늘 아쉬웠던 형은 공부를 권했다. 소년은 돈을 벌겠다고 맞섰다. 겨우 열일곱이었다.1970년대, 서울 인사동은 시서화로 넘쳐났다. 고미술과 현대적
관세음보살은 눈이 없다. 신비로운 이야기는 여기서 깨어났다.강진 무위사 주지스님은 곤혹스러웠다. 완공된 극락보전에 벽화가 없어 못내 아쉬웠다. 마침 사찰을 찾았다가 자초지종을 알게 된 노스님이 일렀다. “그 벽화 내가 그릴 테니 49일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게나.” 노스님은 한 달이 지나도 법당 밖으로 나올 기미가 없었다. 궁금했던 주지스님은 48일째 일을 그르쳤다. 문틈으로 몰래 안을 엿봤다. 노스님은 온데간데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세필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인기척에 파랑새는 사라졌다. 점안만 남겨두고&hellip
“기가 막히네.”흔해 빠졌다. 지천에 널린 게 돌이다. 돌 다듬고 올려 탑을 조성하고 성곽을 쌓았다. 지혜는 모진 비바람 따가운 햇살 견디며 천년을 영글었다. 오랜 담장이나 성곽, 축대를 손바닥으로 쓸어보는 이의상(75) 석장의 감탄사는 매번 같다.중요무형문화재 제120호 지정석구조물 분야 국내 1호 장인대장간에서 석공 연장 벼리다17세에 스승 이재만 인연 닿아3년 무보수 숙식하며 일 배워연장 한 벌 받고 만 50년 외길 돈화문 시작으로 문화재 복원문화재 생명 잇는 숨은 노력탑 그림자처럼 함께해온 역사전수관 조성해 기능 명맥 계승
첫 탑 기둥 세우던 날, 백제는 망했다.그날 밤, 장인 아비지(阿非知) 꿈에는 고국 백제가 망하는 모습이 아른거렸다. 의심스러웠던 아비지는 일손을 놨다. 그러자 홀연 땅이 진동하고 볕이 사라졌다. 한 노승과 장사가 금당(金堂) 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자취를 감췄다. 백제의 운이 다함을 깨달은 아비지는 탑을 완성했다. 경주 황룡사 9층 목탑이다.중요무형문화재 제74호 대목장유네스코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20대조 할아버지 국보 1호 건립가난한 형편서 태어나 17살 때61년 사찰 짓는 목수 기문 입문김덕희·김중희 도편수 스승 삼아달빛
차라리 숙명이었다.그는 1943년에 태어났다. 사람들은 옹기골 혹은 기왓골이라고 했다. 신라시대 때부터 그랬다.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는 그릇 가마터와 옹기점이 있던 마을이었다. 그래서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기 서라벌에는 17만8936만호 기와집서 숯불을 피워 밥을 해먹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서라벌 도성에는 기와집이 겹겹이 펼쳐져 비가 와도 어깨가 젖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고도 한다.문화재수리기능보유는 670호제작와공 분야에선 국내 1호경주 기왓골서 태어나고 자라어깨너머 배움서 17세 때 입문노당기와 설립
춤이었다.1963년 국보 1호 숭례문 중건 공사 책임을 맡았던 신영훈 선생이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었다. 40대 새끼목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전북 임실 대도대한 천지원 팔각원당을 짓고 나니 벌어진 일이었다. 사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팔각원당은 현존 목조건축물 가운데 유일하게 귀접이 법식을 사용해 축조했기 때문이다. 신영훈 선생의 아이디어를 눈앞에 실물로 만들어내서다. 새끼목수는 팔각원당 기둥을 없앴다. 원당 한가운데 기둥을 세워야 추녀도 늘이고 지붕 하중을 견딜 수 있다는 주변 우려를 귀접이 법식으로 단박에 불식시켰다. 귀접이
불타고 있었다.2008년 2월10일, 50대 중년남성 마음이 새카맣게 타들어 갔다. 국보 1호 숭례문, 아니 자신의 피와 땀이 스민 ‘숭례문’이 스러지고 있었다. 그도 무너져 내렸다. 서늘한 한기 한 줄기가 등골을 스쳤다. 무작정 택시를 타고 숭례문으로 향했다. 1997년 숭례문 지붕을 보수하던 기억이 흑백영화 필름처럼 지나갔다.중요무형문화재 제121호‘지붕 기와 잇는 장인’ 뜻2008년 지정 뒤 국내 유일전통건축 곡선미 번와가 좌우단열·제습·건축수명도 늘려“잘 이은 기와가 천년 버팀목”혼자 집 짓던 부친 곁에서어깨너머로 건축 배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