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인지 ‘성불하세요’를 법회의 종료를 알리는 인사말로 쓰고 있다. 이 말은 나무랄 데가 없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막연하고 막막한 느낌을 자아내는 아주 수동적인 뜻으로 들린다. 불교의 종착역이 성불이기에 성불은 신행의 완성이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성불의 길로 구체적으로 진입하는지 참으로 아득해 보인다. 그래서 저말은 그냥 내가 일반적 의식의 격식에 따라 남들처럼 읊조리는 구호에 불과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공허하게 말하는 인사말보다 더 구체적으로 내게 와닿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나는 성불하세요’라는 말보다 오히려 ‘부처님을 닮읍시다’라는 구절이 더 각자의 마음에 구체적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여겨본지 오래되었다. 사람은 먼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
한국불교사에서 고승이면서 그 행적에 속인들이 쉽게 잘 이해가 안되는 그런 분들이 계신다. 원효대사와 경허대사 등이 그런 범주에 속한다 하겠다. 원효대사는 미증유의 불교대학자이고, 이른바 요석공주와의 파계이후에 더욱 심산대천에서 수행정진을 가행하였고, 시중에서 생활불교를 가르쳤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에 의하면 파계이전에는 대단히 유식한 ‘아는 승려’의 화신이었으나, 파계이후에는 보살도를 실천하는 ‘보살승려의 화신’으로 일변했다고 한다. 그래서 거리의 갑남을녀를 만나면, 원효는 그들의 괴로움을 삼제(芟除)해주는 관세음보살로 살았고, 또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의 요청에 의하여 군사작전을 도와주는 군사가 되기도 했다. 한마디로 대사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잘 알 수 없는 다방면의 모습을 보
나는 서양의 기독교 신학사상이 역사적 구원을 강조한 종교로 그 동안 해석되어 왔다고 본다. 역사에서 선의 종국적 승리를 기약하는 의미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는 최후의 심판사상으로 집약된다. 기독교는 늘 선의지와 도덕의식을 철저히 강조하는 도덕주의로 무장되어 있다. 기독교의 구원은 도덕적 승리를 의미한다 하겠다. 그러나 불교는 죄를 처단하면서 선의 역사적 승리를 쟁취하거나 기약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불의와 싸우는 선의지는 또 다른 불의와 역시 다투는 다른 선의지와의 투쟁을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는 것을 불교는 가르쳐 왔다. 나는 불교적 구원관이 예술미학적 본질을 띈다고 여긴다. 불교는 죄악이 극성을 피우는 세상을 정복하여 죄가 없는 순수선의 왕국을 이루겠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 신념은 세상을 아집으
우리는 지금 본능이란 말을 왜곡되게 쓰고 있다. 본능은 인간에게 남아 있는 충동적인 육체적 경향을 지칭하는 것으로 읽고 있다. 성욕이 그것의 대표적 보기에 해당한다. 물론 성욕이 동물의 생물학적 욕망이긴 해도 인간의 성욕은 종족을 보전하려는 자연적 본능인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성욕은 인간의 사회적 욕망이라고 읽어야 한다. 성욕은 동물처럼 어떤 일정한 주기의 제약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수시적이다. 성교는 근친혼의 금지는 물론 결혼식의 제도를 통하여 사회적 인정의 절차를 밟아야 한다. 성욕은 자연적 본능의 기원을 갖고 있지만, 나머지는 모두 사회적 규범을 따른다. 성욕을 해결하려는 성교는 남들의 부러움과 인정을 받으려 하는 소유적 가치의 취득을 은연중에 노린다. 사회가 공인하는 성교가 아니라도, 모든 성욕은 자
교종시대의 불교사상이 이성의 철학은 아니지만, 인간의 사유를 통하여 이해케 하는 길을 가기에 교종은 철학적 방편을 쓰고 있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선종은 철저히 그런 방편을 무시한다. 그래서 반철학적이라고 부른다. ‘부처님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똥막대기’나 ‘뜰앞의 잣나무’라는 중국 대선사들의 응대는 철저히 철학적 사유를 우습게 여기는 발상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다. 선종은 의식과 이성의 영역에 와닿는 말과 심지어 사유 가능성을 철저히 부정한다. 선종은 의식의 언어를 지운다. 선종은 무의식의 영역으로 마음이 직입할 것을 도모한다. 진정한 마음의 무의식적 언어를 발견하기 위하여 오감의 의식과 오감의 데이터를 잠재우는 마음의 평정심을 얻어야 한다. 마음의 평정심은 요별경식(了別境識=오감과 의식)
인간의 의식은 감각의 매개를 통하여 분별함으로써 ‘나는 네가 아니다’는 자의식이 일어난다. 매개에 의한 분별을 통하여 나는 아무 것도 모르는 멍텅구리가 아니라 어떤 내용을 채워나간다. 의식의 분별화는 의식의 사회화와 같다.그러나 교종에서 언급된 ‘순수 존재=순수 무(공)’는 우주자연의 여실한 도(道)를 기술한 것이다. 이성철학이 의식의 사회화를 겨냥한다면, 교종은 인간과 우주자연의 공동 존재방식을 해명하고 있다. 이성철학은 결국 분별논리학이고, 분별은 주관인 자의식이 객관적 대상들에 대한 개념적 차이를 뚜렷이 정리한다. 그래서 분별심이 낳은 인간의 역사는 더 편리한 것을 추구하며, 이런 정의가 저런 정의와 늘 싸움을 벌리게 되어 있기에, 진리를 가리려는 의지가 세상을 지배하려는 의지와 뒤섞인다. 사회철학=
용수의 공-세친의 유식, 교종 두 갈래佛法의 대의는 ‘공=무의식’임을 강조 교종시대를 연 인도-남방 불교는 철학적으로 두가지 큰 갈래를 갖고 있다. 그 하나는 용수(龍樹=나가르주나)계열의 반야공(般若空=中觀學)이고, 또 다른 하나는 세친(世親=와수반두)계열의 유식(唯識)이다. 흔히 용수의 중관학은 공론을 대변하고, 세친의 유식학은 존재론을 알려준다고 일반화하지만, 사실상 저 두 사상은 다 불법의 대의가 공과 무의식을 떠나서 성립하지 않음을 세상에 천명한 것이다. 공과 무의식의 도는 각각 다른 도리를 선언한 것 같지만, 기실 그것은 ‘공=무의식’의 도리를 터득해야 불법이 증오된다는 것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용수의 중론적(中論的=반야공적) 사유와 세친의 유식적 사유는 흔히 세간에서 말하는 분별적(의식적) 지성
모든 존재, 다양한 욕망이 나툰 현상존재자만을 강조한 형이상학과 달라 불교의 제1기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친(親)철학적 교종(敎宗)의 시대고, 제2기는 중국과 동북아를 중심으로 한 반(反)철학적 선종(禪宗)의 시대고, 제3기는 21세기 이후의 미래적 불교의 시대로 대중적 실천불교의 시대겠다. 나는 앞으로 3기에 걸친 불교사의 사상사적 특성을 하나씩 약술하려는데, 이번에는 총론적 입장에서 말하련다. 교종의 철학적 사유와 선종의 반철학적 사유는 다 공통적으로 인류가 습관적으로 익혀온 것과 전혀 다른 길이다. 그 다른 길을 나는 교종의 존재론적 사유, 그리고 선종의 자연적 사유라고 명명하련다. 교종의 존재론과 선종의 자연론은 명명은 다르지만, 실로 같은 차원의 도를 언명한 것이다. 인간은 ‘도대체 존재한다는
기독교는 세상사를 인격중심으로 생각하니, 자연재해마저 신의 인격적 분노로 여긴다. 왜 신이 자기에게 절대복종하는 자기 신도와 교회를 지진으로 일시에 떼죽음과 폐허로 만들어 버리는가? 오늘날 서구에 기독교 교회가 텅텅 비고 신자가 사라진 까닭은 저런 유치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사를 주재한다는 소위 하나님이 현대인에게 너무 우습고 황당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염불 기도하는 것은 절대 인격체에 비는 것이 아니다. 중생이 처음으로 부처님을 찾는 까닭은 부처님을 의지해서 괴로움의 위안을 얻고자 함이다. 이 점에서 기독교와 불교의 신앙동기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점차로 불교는 부처님과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부처님은 절대적인 인격자가 아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영생하는 실체로서 최고통치자인 아버지와
기도는 한계상황 속에 있는 인간이 종교적 믿음을 갖게 하는 가장 쉬운 방편이다. 그 기도가 님을 부르게 한다. 간절히 님을 찾는 인간은 중생(불교)이고 죄인(기독교)이다. 한국 선불교에서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을 너무 쉽게 설파한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것은 본질적인 차원의 이야기지, 실존적 차원의 말은 아니다. 우리는 보통 실존적 중생의 수준에서 종교를 믿는다. 박세일 교수는 불교가 중생수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옳은 말이겠다. 그의 주장은 한국불교가 공급자 중심의 과거식 불교가 아니라, 소비자 중심의 미래적 대중불교로 체질개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에 나는 이 칼럼을 통하여 한국불교가 너무 선근본주의(선원리주의)에 젖어 일시에 확철대오하려는 일에 매달려 어려운 득도의 그날을 겨냥하다가 한계
정치와 종교는 대중적 기반을 상실해서는 안된다. 대중적 지지도를 상실한 종교는 철학일지언정 종교로서 생명을 잃는다. 유교가 결코 종교일 수 없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한국의 선사들과 불교학자들은 대체로 불교가 타력종교가 아니고, 자력수행이라고 너무 강조한다. 그런 경우에 불교의 대중적 지지도가 내려간다. 기독교에 비해 한국불교의 취약점이 여기에 있다. 모든 종교적 믿음은 타력에서 출발한다. 종교적 믿음의 동기는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 숨 막히는 질곡과 같다고 여겨 거기서 탈출하고픈 욕망에서 비롯한다. 누구나 인간은 한계상황의 포로로서 그 상황의 틀에 갇혀 사는 신세를 면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종교는 바로 그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가장 절실한 요구의 응답과 같다. 이것이 해탈 또는 초월로서 다가온다.
팔정도는 마음이 사실 인식하고 일치하여心物이 합일되는 경지에 이르는 길 가르쳐 기독교와 불교가 다 같이 믿음(信)에서 출발하는데 믿음의 성질이 아주 다르다. 기독교는 슈퍼맨과 같은 인격적 신(神)이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능을 행사하는 것을 먼저 믿으라는 신앙을 강조하는데 비하여, 그런 신은 사실상 인간의 주관적 공상이 만든 허구고, 불교는 이 우주에 펼쳐지고 있는 필연적 사실에 대하여 먼저 신뢰를 보내라는 의미에서 믿음을 먼저 주장한다. 신앙은 자연적 사실과는 무관하더라도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신앙제일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그러나 불교는 그런 신앙제일주의는 맹목적이기에 아주 유치하다고 여긴다. 불교가 말하는 믿음은 무조건 믿으라는 신앙의 요구가 아니라, 우주적 자연의 사실을 제대로 보고 그 사실의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