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2월 27일 입적 광덕 스님은 근현대를 거치는 동안 용성, 동산, 소천 스님의 뒤를 이어 부처님의 대각 사상을 현실적으로 대중화 시켜낸 선지식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그는 스스로 철저한 지계를 바탕으로 평생을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갈구했으며 반야바라밀 실천운동을 전개해 생활불교 운동을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1927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스님은 한국대학 재학시절 한관섭 선생을 만나면서 일생 일대의 전환점을 맞이했다. 건강이 악화돼 더 이상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한관섭 선생의 소개를 받아 금정산 범어사 선방에서 처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그는 처음으로 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처사의 신분으로 범어사 선방에서 정진을 하던 광덕 스님은 1952년 당대 최고의
1948년 2월 29일 입적 석전 박한영 스님은 선암사 금봉 스님, 화엄사 진응 스님과 함께 태고 보우 국사의 선맥을 잇는 태고 선종의 3대 강백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삼장 강설을 주로 하면서 경사사집과 노장학설을 모두 섭렵하고 일제 강점기 만해 스님과 함께 불교 유신운동을 펼쳤는가 하면 올바르게 시대를 이끌 수 있는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평생을 헌신한 근현대 대표적인 선지식이었다. 1870년 8월 전북 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석전 스님은 17세 되던 해 스님의 어머니가 전주 위봉사 금산 스님에게 들은 삶과 죽음에 관한 생사법문을 전해주자 크게 발심해 출가를 결심했다. 19세 되던 해 금산 스님에게서 계를 받고 정호라는 법명을 받은 스님은 이후 백양사 운문암에서 본격적인 수도 생활을
64년 3월 14일 사망 “대한독립만세” 1919년 3월 1일. 범어사에 모인 1만여 불자들은 참고 참았던 울분을 이 한마디로 토해냈다. 그리고 이들의 행렬 선두에 그가 있었다. 억눌려 있던 그의 가슴은 결의에 찬 용기로 뜨겁게 차올랐다. 일평생을 불교와 나라, 후학양성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김법린 선생은 승려일 때는 선지식, 이후 학자로는 동서양의 깊은 천리를 꿰뚫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899년 음력 8월 23일 경북 영천군에서 태어난 그는 13세에 영천 은해사로 출가했다. 양휘허(揚揮虛) 스님을 은사로 득도 한 이래 1917년 범어사 강원에서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하고, 20세가 되던 기미년에 불교계 만세운동을 지도하다 체포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경으로 도피했다.
1951년 3월 22일 입적 한암 스님은 수행을 ‘소치는 구도행’이라고 비유하며 ‘돈오점수’를 설파했던 근대의 대표적인 고승이다. 일명 ‘오대산 도인’, 오대산의 학(鶴)이라 불린 한암 스님은 27년 간 일체의 외부출입을 금하며 오로지 수행에 매진해 밝은 선지(禪旨)와 높은 학문으로 수많은 납자들에게 존경받아온 시대의 선지식이다. 1876년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난 한암 스님은 천성이 영특하고 총기가 빼어나 한번 의문이 나면 답을 구할 때까지 책을 놓지 않았다. 경허 문하서 수행 정진 스님은 22세가 되던 해 소시적부터 궁금했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수행이라는 결론을 내고 행름(行凜) 노사를 은사로 득도했다.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에서 수도를 시작한 한암 스님
1973년 3월 27일 입적 부처님의 제자 주리반특가는 머리가 둔한 데다가 배운 것도 없어 매우 무식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수행정진에 임해 마침내 아라한(阿羅漢)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평생을 가야산 총림에서 수행정진에 임했던 지월 스님은 해인사의 ‘주리반특가’로 불린 인물이었다. 서슬 퍼런 선기나 출중한 면을 겉으로 드러내 보이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정진에 정진을 거듭해 마침내 선지식의 경지를 이룸으로써 모든 대중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인품과 생애가 주리반특가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이다. 1911년 2월 전북 남원에서 태어난 지월 스님은 16세에 출가해 오대산 월정사에서 지암 이종욱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후 상원사 한암 스님 밑에서 수학했다. 스님은 금강산 마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