뭍에서 일었던 조선의 억불 소용돌이는 섬까지 몰아쳤다. 특히 곽홀 목사(牧使)부터 이형상 목사가 있던 시기(1567∼1702)에 종교편향적 훼불사태가 급속하게 확산됐다. 고려의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던 조선의 허응보우(虛應普雨) 스님이 제주도로 유배됐다 변협 목사에게 장살(杖殺)당한 때도 이 시기다. 이후 200년 동안 제주의 법등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갔는데 그 시기를 ‘무불시대(無佛時代)’라 이르기도 한다.1909년 제주 출신의 비구니 봉려관(蓬廬觀) 해월(海月)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했다. 한 사찰의 개산(開山)을 넘어선 근대 제주불
간다라 초타 라호르(Chota Lahore. 파키스탄 북서지역)의 ‘길리 마을’ 바라문 집안에 성스러운 아들이 태어났다. 거듭된 유산에도 스님을 간호한 공덕으로 낳은 마라난타(摩羅難陀) 스님이다. ‘분드 마을’의 절에서 수행하던 스님은 368년 고향을 떠나 대장정에 올랐다. 간다라에서 시작된 발길은 스왓트(Swat), 길기트(Gilgit)를 지나 천산산맥(天山山脈)을 넘어 쿠처(Kucha, 현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돈황(敦煌), 동진(東晋)을 거쳐 16년 만인 384년 호남의 한 항구에 닿았다. 백제 땅에 처음으로 법음이 전
‘여기 어디쯤일터인데!’봉선사 16대 주지 임명장을 받고 운악산을 올랐다. 깊은 산 속의 토끼가 ‘너무 맑아 세수는 못하고 입술만 살풋 대고 갔다’는 그 옹달샘 어제도 찾아 나섰지만 허사였다. 오늘도 벌써 두 시간째 운악산을 헤매고 있지만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옛 기억을 떠올리면 고작해야 큰법당에서 서쪽으로 20여분 거리의 산기슭에 있을 법한데 눈에 띄지 않는다. 하긴 행자 시절 단박에 뛰어 넘은 작은 나무들도 30여년을 더했으니 그 가지들이 오목한 작은 샘 하나 가려 숨기는 건 헐할 것이다. 물맛이라면 큰법당 옆 샘물이 일품이
‘이 절을 창건하신 남산종의 종주 자장율사께 지극한 마음으로 목숨 바쳐 귀의하며 예를 올립니다(至心歸命禮 此寺創建 南山宗主 慈藏律師).' (통도사 예불문 중)643년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중국 유학에서 귀국한 자장 스님은 대국통(大國統, 왕이 임명한 스님의 가장 높은 지위)으로 임명됐다. 전국의 스님들에게 계(戒)를 내리고, 각 지역의 사찰을 순회 감독하도록 했으니 이는 승가의 지계청정을 도모했음이다. 그리고 중국 오대산에서 이운해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황룡사와 통도사에 봉안했다. 성스러운 적멸보궁이 이 땅에 처음으로 조성됐음
고려시대 찬란히 빛났던 법등이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 짓눌리며 그 빛을 점차 잃어갈 때 허응보우(虛應普愚,1515∼565) 스님이 출현했다. 독실한 불자였던 문정왕후의 도움으로 선교양종을 세우며 선종(禪宗) 수사찰(首寺刹)로는 봉은사를, 교종(敎宗) 수사찰로는 봉선사를 지정(1550)하는 한편, 연산군 때 폐지된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다.(1552) 승과를 통해 배출된 대표 고승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이 이 절의 주지 소임을 보며 남긴 ‘봉은사기’를 통해 당시의 사격을 짐작할 수 있다.‘아침마다 1만 밥솥에 밥을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았다.”한국 대법원이 내린 이 판결(2018.10)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 개인 손해배상청구권이 지금도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던 아베 일본 총리는 지난 8월 “강제징용자들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은 국제법 위반”이라는 불만을 터뜨리며 백색국가(수출심사 우대국)에서 한국을 제외했다. 경제도발이나 다름없다. 한국 정부는 한일 사이에 체결된 지소미아(GSOMIA·군사정보보호협정)를 연장
둥그런 디딤돌 하나하나 밟아가며 도량에 들어섰다. 서울 도심의 작은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2층 카페. 이색적이다. 찻집 창문에 새겨진 ‘테이크 아웃’. “자유롭게 거닐어 보시라!”는 주지 스님의 바람을 새긴듯하다.찻집 마당 곳곳에 작은 부처님 앉아 계신다. 언제 저리 고운 부처님들을 품에 다 안았을까. 고찰(古刹) 숨결 배인 낡은 기와로 쳐놓은 담장. 고아해 정감 있다. 그 옆 나무 아래에 키 낮은 벤치 놓여 있다. 그림자 속으로 들어와 나뭇잎 사이로 들어차는 눈부신 햇살을 담아가라는 뜻일 터다. 두 팔 활짝 벌린 듯, 양 옆으로 쭉
“나모라다나 다라야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다사명 나막 가리다바 이맘 알야바로기제 새바라 다바…(삼보님께 머리 숙여 절을 올립니다… 모든 두려움으로부터 지켜주시는 관자재보살님께 귀의하면 성스러운 관자재의 위신력이 나타납니다….)”한여름 오후, 천년고찰에 70여 대중이 지송하는 범어(梵語)가 흐르는 건 ‘천수대다라니 108독 성취기도’ 원력을 세운 대흥사 신임 주지 성해 법상(性海 法祥) 스님에서 비롯됐다. 교구본사 주지 당선 소감을 피력하는 자리에서는 사찰의 중장기 청사진을 내놓는 게 상례인데 ‘승가의 본질’을 자문했던
진안과 마령 경계선에 희유한 모양의 두 봉우리가 마주한 산 하나가 우뚝 서 있다. 신라시대 서다산(西多山), 고려시대 용출산(聳出山)을 거쳐 조선 초에는 속금산(束金山)으로 불렸다. 계절에 따라 봉우리 이름도 다르다. 안개 자욱한 봄날에 솟은 두 봉우리가 쌍돛대를 닮아 돛대봉, 녹음 짙은 여름 수목 사이에 드러난 봉우리가 용의 뿔처럼 보인다 하여 용각봉, 가을 단풍 때 말의 귀처럼 생긴 봉우리가 유독 두각을 나타내 마이봉, 화선지(설산)에 묵화를 치는 붓(봉우리)과 같다 하여 겨울에는 문필봉이라 한다. 지금은 말의 귀를 닮았다고 하
태안사 조실 청화(淸華·1924∼2003, ‘1종식·장좌불와 50년’ 실천한 선지식) 스님 앞에 섰다.(1997) 삼배를 올리니 맞절로 받으신다. 절을 마치고 말없이 앉았다. 납자의 얼굴을 지긋이 응시한 청화 스님이 한 마디 이른다.“자네는 출가 전에 어떻게 살았나?”윽! 턱 막힌 가슴의 좁은 틈 사이로 유년의 기억이 비집고 들어 왔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는 이웃집 아주머니와 도시로 나가 살림을 차렸다. 초등학교 1학년 소풍날, 함께 길을 나선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 뒷산으로 내달렸더랬다. ‘친구들은 아버지·어머니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몸에서 난다.’ 인간의 목소리가 최고의 악기라는 얘기다. 하여, 판소리계의 타고난 소리꾼도 궁극의 소리를 얻고자 깊은 산 속 수직 폭포 아래서 피를 토하는 고통을 감내했다. 그 고된 수련 끝에 ‘폭포수 쏟아지듯 장단고저 변화무궁 이리농락 저리농락’하는 경지의 득음(得音)에 이른 창자(唱者)를 명창(名唱)이라 칭한다. 한국 3대 성악으로 꼽히는 범패(梵唄)계의 스님들도 자신만의 소리를 얻어야 한다. 다만 희로애락을 표현하고 이끌어내는 가곡·판소리와는 결이 다른 숭고미가 배인 소리여야 한다. 불교
인도의 나란다(Nalanda)! 직역하면 시무염(施無厭)이다. ‘한량없는 보시’로 충만한 그곳은 부처님 10대 제자에 속하는 목련존자와 사리불의 고향이기도 하다. 굽타 왕조의 두 번째 왕인 쿠마라굽타 1세(415∼454)가 그곳에 ‘나란다 사원’을 조성하니 이내 세계 최초의 대학으로 기록된 ‘나란다 대학(Nalanda University)’이 세워졌다. 교수 1000여명에 1만여명의 학승들이 상주하며 공부했던 전당. 매일 100여군데서 강좌가 열렸는데 불경은 물론 인명(因明, 논리)·천문·언어·의학을 넘어 범패·문학·베다까지도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