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설 스님(29)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출가는 자신과 무관한 일이었다. 신심 깊은 부모 밑에서 성장해 어려서부터 절을 찾는 일이 많았지만 스님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의 꿈은 패션아티스트였다. 멋진 옷을 입고 남들에게 주목 받는 삶을 동경했다. 대학에서 ‘패션웨딩스타일리스트학과’를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렇기에 삭발을 하고 먹물 옷을 입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랬던 그에게 불연이 찾아온 것은 군대에서 군법사 지화 스님을 만나고 나서였다.2011년 7월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내성적인 성격을 바꿔보겠다는
“스님, 부디 열심히 수행해서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에게 이익이 되는 좋은 스승이 되어주세요.”산문에 든 지 꼭 6개월 만이었다. 삭발한 머리에 승복을 입은 아들이 낯설 만도 했지만 어머니 목소리는 차분했다. 이제 막 사미계를 받은 아들에게 어머니는 간절함을 담아 또박또박 말을 건네고 있었다. 출가자로 살아가는 동안 어찌 그 당부를 잊을 수 있을까.2015년 8월30일 출가하던 날, 남원 실상사까지 함께 가겠다며 먼 길을 따라나섰던 어머니. 남들처럼 취업하고 결혼해 아이 낳고 사는 평범한 삶은 이제 기대할 수 없었다. 일
불교에서 출가는 집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2600년 전 카필라국 왕자 싯다르타가 그랬듯 낡은 생각과 묵은 습관 등 일체를 내려놓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위대한 결단이다. 그래서 출가는 스스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삶의 혁명이다.불교에서 출가는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꼽혔다. 명예, 돈, 권력 등 세속적 욕망에서 벗어나 보다 가치 지향적이며 삶의 참 행복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이해돼 왔다. 그렇기에 출가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 살겠다는 당당한 선언이며,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마주하겠다는 결연한 다짐이다. 또한
근세의 선지식 향곡(香谷) 선사는 주장자(拄杖子) 하나 걸어 두고 부산 묘관음사에서 눈 푸른 납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한 자루 지팡이를 청산에 걸어 두었나니(一條拄杖掛靑山)/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요 또한 물건도 아니네(非心非佛亦非物)/ 그대 이 속을 뚫고 지나간다면(有人這裡透過)/ 기나긴 세월 가도 언제나 깨어 있으리(塵劫圓明長不昧).’ (석지현 역)법원(法遠) 스님이 그 앞에 섰다. 절을 올리고 게송(偈頌)을 내보였다.‘이 주장자 이 진리 몇 사람이나 알겠는가(這箇拄杖幾人會)/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알지 못하누나(三世諸佛總
가로열쇠1. 서방정토에 계시면서 중생을 극락으로 이끄시는 부처님.2. 부처님의 법문에 뭇 마구니들이 굴복하고 귀의했다는 뜻.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의 포효에 비유한 말.3. 조계종의 소의경전으로 ‘금강반야경’ ‘금강반야바라밀다경’을 줄여서 이렇게 부른다. 공(空)을 말하면서도 경전 속에 공(空)이라는 말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4.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분으로 지혜제일이라고 불린다.5. 태어나지도 멸하지도 않는다는 뜻. ‘반야심경'의 한 구절로 ○○○○, 불구부정, 부증불감으로 이어진다.6. 불자들의 귀의처. 불법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가 크게 유행하는 요즘, 우리는 온라인(화상)으로 법회를 가진다. 성소수자 불자 모임과의 인연은 5년을 넘어선다. 이 법회엔 기독교인이지만 불교를 공부하는 ‘기독교인 불자(크리스천-부디스트)’, 가톨릭인이지만 법회에 참여하는 ‘가톨릭인 불자(가톨릭-부디스트)’, 불자지만 교회에 출석하는 ‘불자 기독교인(부디스트-크리스천)’, 종교가 없는 사람 그리고 외국인도 참여한다. 우리는 명상을 하고,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괴로움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지 등 자신의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 내면
어둠이 깊을수록 빛은 더욱 밝게 드러난다고 했던가. 근래 우리 사회의 젠더문제는 짙은 신음소리를 내며 병들어 가는 것 같다. 일상 공간 깊숙이 그리고 친밀한 인간관계 속에서까지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과 증오범죄가 만연해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현재 한국 젊은 여성들의 자살율이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는 보고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고통의 깊이를 가늠해 보게 된다.하지만 역설적으로 이 속에서도 새로운 젠더문화가 기존의 틀을 발랄하게 깨뜨리면서, 몸과 자아에 대해 보다 긍정적 인식의 양상으로 일어나고 있어 주목된다. 이 변화는 젠더에 대한
우리말 ‘삼귀의’의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는 참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스님들은 모두 거룩한가? 거룩하지 않은 스님들께는 귀의하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스님들이 ‘삼귀의례’를 할 때는 자신을 포함한 스님들께 귀의한다고 하는 것인가? 아니면 고승대덕들에게 귀의한다는 마음으로 이 ‘삼귀의례’를 하는 것인가? 이 우리말 ‘삼귀의’는 스님들 용이 아니라 재가자용일 뿐인가?첫 번째 물음 “스님들은 모두 거룩한가?”에서부터 시작해 보자. 스님들은 그 개개인의 덕성과 행실에 관계없이 모두 거룩한 존재라면, 이것은 “사람 위에
우리나라 남성에게는 국방의 의무라는 특수성이 존재한다. 때문에 군가산점제도가 시행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군복무는 대체로 남성에게만 해당하므로, 자칫 성차별의 문제를 수반할 수 있어 결국 폐지됐다. 이 과정서 여성이 제기한 주장 중, 여성만의 특수성인 출산이 대두되기도 했다.평등은 언뜻 단순한 하나의 잣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군복무와 출산의 문제처럼, 그것은 때에 따라 성에 의한 특수성이 작용할 수 있다. 또 육상이나 수영, 농구에서는 우월한 신체조건이 노력보다 경기력을 압도하기도 한다. 즉 평등은 단순이 아닌, 복합 조건 속에서
지난해 불교계와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차별금지법이 우여곡절 끝에 국회에 발의되면서 큰 산 하나를 넘겼다. 하지만 2021년에도 여전히 ‘차별’은 우리 사회의 아킬레스건이자 뜨거운 감자로 남아있다. ‘불의는 참아도 불평등은 참지 못한다’는 말이 회자 될 정도로 사회는 차별과 불평등에 민감하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몸살을 앓으며 정치, 경제, 사회 모든 면에서 촉발된 급변과 불확실성의 확산은 차별과 불평등의 문제를 더욱 민감한 역린으로 부상시키고 있다. 모든 불평등과 차별이 개혁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는 오늘날, 당대 최고의
동서양을 막론하고 쥐는 혐오스러운 동물로 취급된다. 튀어나온 앞니에 긴 꼬리로 생김새가 얄밉다. 진 데 마른 데를 가리지 않고 돌아다니며 병을 옮기고 저장한 곡식을 약탈해 가기 때문이다. 쥐 하면 떠오르는 “찍, 찍” 소리는 간혹 불쾌한 느낌을 줄 때도 있다.그러나 이런 이미지로 인해 오히려 쥐는 특별한 영물로 추앙받기도 한다. 민간에 전승되는 쥐와 관련된 설화 등에 의하면 쥐는 어려운 여건에서도 살아남는 근면한 동물, 미래의 일을 예지해주는 영물이었다.약 3600만년 전부터 서식해온 것으로 알려진 쥐는 1800여종에 달한다. 창고
■삼국·통일신라시대 △544년 신라 최초 사찰 흥륜사 천경림에 준공 △676년 2월 의상 스님 부석사 창건 △724년 오대산 상원사 창건 △760년 4월 월명사, 향가 ‘도솔가’지어 해가 두 개 뜬 변괴를 없앰.■고려시대 △1012년 황룡사탑 중수 △1096년 황룡사탑 6차 중수 △1216년 9월 거란병 묘향산 보현사 불태움 △1348년 태고 보우 스님 원에서 귀국 중흥사에 주석.■조선시대 △1420년 세종, 능침주위에 절 세우는 것을 금지 △1492년 2월 3일 도첩제 폐지 △1516년 11월 절의 노비와 전지를 관에 귀속시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