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아이를 둔 엄마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절에 기도하러 가는 것은 항상 마음만 앞서는, 내게는 참으로 먼 현실이었다. 통도사 울산포교당 해남사를 재적사찰로 삼고 한 달에 한 번 내지 두 번은 법회에 동참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실천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절에 가는 날을 차일피일 미루며 하루하루 바쁜 일상만 반복하기를 꽤 오랜 기간 보내야 했다. 5년 전 즈음일까, 나와 주변의 일 그리고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겹쳐 스스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상황을 마주했다. 지푸라기라도 붙들어야 되겠다는 심정일 때 주변에 계신 분들이 100일 기도를
매일 아침 일어나 천수경과 함께 신묘장구대다라니 7독 기도를 시작할 즈음, 남편과 아이들은 절이 아닌 집에서 아내의 그리고 엄마의 기도 소리를 듣고는 오히려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훗날 웃으며 듣게 된 바로는, 나에 대한 염려 이전에 ‘과연 저 기도가 며칠이나 이어질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었다는 얘기였다. 돌이켜보면 가족들은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점검하며 한편으로는 응원해 주었던 셈이다.그러한 가족의 무관심한 듯한 관심이 나에게는 수행의 큰 자극이 됐다. 초반에는 어떻게 해서든 매일 아침 기도를 이어가고자
부처님오신날마다 친정어머니 손을 잡고 절에 다녔고, 친정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와 봉사활동을 보며 자랐다. 하지만 막상 스스로 기도를 하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나는 둘째아이의 동자승 출가를 계기로 부산 홍법사와의 인연이 시작됐다.지금 고3인 둘째가 6살 되던 해였다. 다른 때와 같이 부처님오신날 친정어머니와 홍법사를 방문했다. “동자승 한번 해보면 좋겠다”라는 주지스님 말씀과 친정어머니 권유로 7살에 동자승 3기에 참여했고, 그 인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13년째 홍법사와 함께 하고 있다.‘정말, 해도 될까…?’ 막상 동자승을 신청했
여래사불교대학에서 ‘법화경’ 독송기도는 매주 화요일 오전 사시예불에 이어 진행됐다. 부처님 전에 사시마지를 올리고 예불을 마치면, 동참 대중이 함께 ‘우리말 법화경’을 독송했다. 독송이 끝나면 축원이 이어졌다. 독송할 때에는 경전 길이를 미리 정해두기 보다는 대략 1시간30분 정도 우리말로 풀이된 ‘법화경’을 소리 내어 읽어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렇게 ‘법화경’ 전체를 다 읽는 데에는 대략 14~15회 정도 기간이 소요됐다. 매주 한 차례씩 100일에 한 권을 회향하는 셈이었다. 매주 화요일에는 ‘법화경’을 독송했고 목요일에는
결혼 후 남편은 원양어선을 탔다.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시누이 둘과 아들 그리고 뱃속의 아이가 있었다. 시누이들은 성품이 착하여 항상 서로 의지하며 원만한 삶을 함께 이어나갔다. 하지만 어느 날, 나에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시련이 닥쳤다. 임신 중이던 아이가 결국 세상 빛을 보기 전에 생을 마감하고 만 것이다. 밤이 되면 잠에 들 때마다 무서움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뜬 눈으로 지샜다. 어설프게 잠이 들었다가도 악몽에 시달리다 깨는 일이 반복됐다. 마음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견디기가 힘들어 주위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
그렇게 2년을 보내고 다시 홍법사로 갔을 때, 동림 어린이법회에서는 어린이들도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얼마나 큰 감동을 받았는지 모른다. 나의 아이들에게도 어떠한 유산보다 더 귀한 부처님 말씀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들도 동림 어린이법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나 역시 동림 어린이법회 자모회 활동을 통해 아들과 함께 본격적인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우리 가족의 수행은 동림 어린이법회의 모든 동참자들과 마찬가지로, 감사기도와 108배 참회의 절수행이었다. 이 수행을 하면서 나 자신이 그렇게 아팠던, 아파야했던 이
하늘에 영롱한 초승달…. 은은한 달빛 사이로 엄마 얼굴을 마주한다. 엄마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과 단어들을 나지막이 외우고 있었다. 딸은 그렇게 새벽마다 엄마의 독경과 염불소리에 잠이 깨곤 했다. 사랑하는 내 어머니! 어머니는 추운 날, 더운 날 가리지 않고 절에 가서 지성으로 부처님께 예불 드렸다. 신심 깊은 어머니 덕분에 자연스럽게 절을 왕래하게 됐고, 자상하신 스님들의 전법 덕분이다. 망설임도 흔들림도 없이 어느덧 불교는 내 삶의 종교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결혼 후 홍법사와 신행생활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지금은 대학생이 된
집에서는 주로 밤에 잠들기 전,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면서 좌선을 한다. 언젠가 신문에서 하루에 단 5~10분이라도 매일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 역시 단기적으로 좌선을 길게 하는 것보다 짧게라도 꾸준히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처음에는 좌복에 앉는 것 자체를 힘들어했지만 어느새 앉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자취를 감췄다. 참선반 공부와 집에서의 일과수행을 빠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약속을 정하고 지키려 노력한 덕분에 이제는 그나마 ‘앉을 줄’ 알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가장 달라진 부분은 어
2시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은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스님 말씀을 들었다. 이 질문들이 절대 가벼운 것들이 아닌 것도 사실이지만, 첫 수업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가장 어려운 것이라 하면 단연 실천이라고 하겠다.아마 불교대학 수업만 들었다면, 그 실천에 대해서는 도전할 생각조차 내지 못한 채 멀고 험난한 일이라고만 여겼을 것이다. 일상의 변화가 시작된 시기를 찾아 거슬러 올라가 보면 5년 전인 첫 아이의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부산 해운대 대광명사 불교대학에서
미소원 이사장님은 봉사가 처음인 나에게도 여러 봉사를 제안하고 체험하게 해주셨다. 인연이 닿는 대로 봉사할 수 있어서 좋았고 고마웠다. 일주일에 한 번 하는 반찬봉사이지만 오시는 분들의 맑은 미소, 따뜻한 손길, 활기차고 재미있는 웃음이 늘 넘치는 공양간이 좋았다. 어느 날인가 미소원에서 봉사하고 집으로 돌리는 발길에 ‘행복이란 이런 것이구나’라고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행복을 느낄 수 있음에 고마움마저 느낀 날이었다. 그 행복감은 마치 기도하고 수행할 때 느끼는 환희심과 흡사했다.하지만 일상의 삶은 행복과 거리를 좀처럼
‘애가 타다 녹아 무너진다. 애간장이 녹아내린다. 눈물로 범벅이 된 내 모습. 부차적인 일상생활에 선 나. 수행의 갈림길에 선 나. 어느 것을 중요한 기점으로 둬야 할지 헷갈리는 시점이 또다시 느껴져 온다. 겪고 지나가야 할 것은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는, 한 점도 오차가 없는 도리가 뼈저리게 와 닿는다. 무릎이 아프고 발등이 까져 아파도 이런 것은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수행에 관해서 오늘은 부처님에게 의문이 생긴다.’ 2018년 6월 어느 날의 기록에 시선이 멈춘다. 지난해 3월부터 지난 3월까지 1년 동안 매일 1000배 기
결국 다시 곡성 성륜사로 돌아왔다. 이상했다. 사실 공양주가 없었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공양간에 공양주가 있었다. 아내 당부대로 “아는 떡집에 떡을 맞춰 달라”고 공양주에게 부탁드렸다. 공양주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이틀은 걸린다. 내일은 안 될 텐데….” 그래도 일단 전화해보라 했다. 웬일인지 떡집에서는 바로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집중수행에 참여하면서 통증으로 도망(?)갔다가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다시 성륜사로 왔고, 5일째가 되던 날도 통증으로 탈출(?)을 감행했다가 아내의 경책을 듣고 돌아왔다. 돌아와서 떡 공양을
타는 목마름으로 온라인 카페들을 전전하며 이생을 마치기 전 최선을 다하여 수행을 하다가 가자는 마음으로 헤매고 있었다. 수행에서 발행한 분들을 찾아 수행이 무엇인가를 듣고자 했으나 지엽적 말씀만 하실 뿐 실익이 없었다.고인들께서 간곡하게 스승을 찾으라는 말씀 따라 돌아다녔지만 누가 스승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다 자주 방문하는 카페에 ‘샤나한’님께서 불칠(佛七, 염불)과 선칠(禪七, 좌선) 수행에 관한 안내문을 게시하셨다.처음엔 불칠·선칠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별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불칠·선칠 프로그램을 시작하는 날짜가
불교는 실천하는 종교다. 무엇보다 절은 수행을 실천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종교를 싫어하는 것은 종교인들이 말만 거룩하게 하고 수행을 실천으로 옮기지 않기 때문이다.원불교에서는 불법을 믿음으로써 생활을 빛내고 생활 속에서 불법을 닦으라고 가르친다. 이런 가르침에 따라 ‘원불교 정전’엔 교리도 신앙의 길과 수행의 길을 나눠 놓고 이를 병행할 것을 요구한다.이 ‘원불교 정전’에는 좌선법이란 장이 있다. 좌선의 요지와 좌선의 방법, 좌선의 공덕, 단전주의 필요를 개략적으로 설명해 놓았다. ‘원불교 정전’의 이 좌선법은 통도
‘붓당 사라낭 가차미(부처님을 의지처로 살아가겠습니다.)’언제부터인가 알 수 없는 어린 시절부터 내게는 불심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이다. 국어 교과서에 인류의 빛이란 단원이 있었다. 거기에 석가모니 부처님,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인들의 생애를 간략히 소개한 글이었다. 이것이 불교에 대한 처음의 만남이라 할까. 그때부터 내 마음속엔 부처님을 모셨다. 고등학교 시절이다. 종립 고등학교에 진학하니 불교성전 교과가 있었지만 불교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 없었다. 학생회 교화부장이었던 나는 불교에 심취했다. 도서
한문 독송과는 다른 한글 독송의 묘미도 배우게 되었다. 우리말로 풀이된 ‘금강경’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일상생활 속에서도 문득문득 떠올랐다. 어느새 경전의 말씀은 중생의 세간살이와는 동떨어진 이야기라는 고정관념이 스르르 사라지고 없었다. 매일 ‘금강경’을 독송해서인지 경전반에서 공부했던 내용은 더 와 닿았다. 그대로 상을 비우라는 ‘금강경’의 가르침이 이전에는 그저 경전의 한 구절이었다. 그러나 100일 기도를 마칠 즈음에는 삶의 이정표로 온전히 자리를 잡은 것 같다. 100일 기도를 회향하며 법우들의 가피 소식도 전해져 왔다. 딸
나는 늘 불교에 관심은 있었지만, 불교 공부를 할 기회는 접하진 못했다. 이전에는 집 근처에 있는 사찰에 다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시불공이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그냥 의식을 따라 할뿐이었다. 사시불공이 무엇인지, 왜 하는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는 채 그냥 절에 다니기만 했던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늘 답답함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우연인지 필연인지, 시절인연이 닿았다. 그러던 중 2010년이었다. 당시 서예학원을 다녔는데 그 학원에서 여래사 주지 종우 스님과 인연이 되었다. 스님 덕분에 여래사불교대학을 알게 되었고, 불교대학
한 배, 한 배 정성으로 절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생전의 마지막 뉘우침과 참회의 눈물이 흘렀다. 잠시 살아계시는 동안이라도 보살핌을 다해 마지막 불씨를 조금이나마 연장할 수 있도록 두 손 모아 무릎과 허리를 굽혔고 고개를 숙였다. ‘단 며칠만이라도 자식된 도리를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울먹임과 함께…. 아버지에 대한 죄송스러움과 애절한 마음이 참회로 이어졌고 눈물로 흘러내렸다. 하염없이 땀방울과 섞여 내린 눈물은 온몸을 적셨고, 밤새 내 간절함은 계속 됐다. 수없이 무너져 내렸다. 몸이 무너질 때마다 번뇌 하나, 탐욕 하
“발원하옵나니, 철석같이 단단한 마음으로 세세생생 무루선 닦아 크고 큰 지혜와 덕, 커다란 용맹심으로 만 겹 장애 만 겹 미혹 모두 녹아지이다.”(성철 스님 발원문 중)단풍이 한창 아름답고 울긋불긋 곱게 물들었던 가을의 백련암은 성철 스님의 자각의 향이 뿜어져 나오는 아늑하고 고즈넉한 산사다. 시절인연으로 만난 어느 지인의 소개로 가야산의 맑고 조용한 사찰에서 말로만 들었던 생애 첫 삼천배를 한 것은 2009년 11월의 어느 가을날이었고, 어느덧 1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성철 스님이 일갈하셨던 ‘절 돈 3000원’은 대가가 비쌌
2017년 10월 이른 아침, 외국에서 근무하는 딸이 풍토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중이라는 연락이 왔다. 네팔의 오지, 열악한 지역에서 일 하던 딸에게 닥친 갑작스러운 상황 앞에서 부모라는 이름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인생의 가장 큰 위기 앞에 서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극심한 고통을 안은 채 ‘법화경’을 펼쳤다. 간절한 심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순간, ‘법화경’ 한 구절이 한 눈에 들어왔다. “염려하지 마옵소서.…본국토에…편안히 돌아가시옵고….” ‘법화경’의 제6권 ‘촉루품’ 마지막 부분이었다. 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