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지나면서 참으로 여러 생각이 든다. 민족의 역사에 가장 참혹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그리고 그 참혹한 아픔을 치유하는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할지 모르는 아픈 역사…. 그렇지만 아무리 힘들더라도 그 아픔을 치유하지 않으면 우리 민족, 우리나라가 바로 설 수 없는 역사의 상처가 바로 6‧25이다.그 치유의 바른 길은 무엇일까? 여기에 정답은 없을 것이다. 정치적 입장과 사상적 색깔에 따라 극단적이고도 천차만별한 시각이 존재하고, 자칫 그런 입장들이 부딪히면 건설적인 토론이 되기보다는 극단적 감정의 대립으로 치닫는 파국을
코로나19는 지금도 심각하지만, 미래를 예측불가능하게 한다는 불안심리가 더욱 커지고 있다. 문명의 한계, 그중에서도 종교는 자신의 존재감을 거의 상실하다시피 하고 있다. 실제 자본주의가 폭주하는 동안 종교는 손을 쓰지 못했다. 지난 200~300년 동안 인간의 욕망과 함께 무질서도 크게 확산됐다. 1·2차 세계대전 같은 대규모 전쟁, 빈익빈 부익부 증대, 지구환경의 악화, 사회적 증오와 갈등 등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행복의 감정 또한 물질적 풍요에 반비례하고 있다. 필자도 참여한 원불교환경연대10주년 기념포럼에서 홍기빈 칼폴라니
최근 모 TV방송에 ‘꼰대인턴’이라는 제목의 코믹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다. 둘이 모여 복합어가 되기에는 서로가 낯선 ‘꼰대’와 ‘인턴’의 조합에 호기심이 생겨 살펴보니 ‘갑을체인지 복수극’이다.한때 잘 나가던 시절, 부하 직원들에게 갑질을 일삼는 꼰대 끝판왕이었던 A는 다니던 직장에서 밀려난 후 시니어 인턴으로 겨우 재취업에 성공한다. 그런데 그를 부하직원으로 맞이한 새 직장의 상사인 B부장은 A가 자행한 꼰대 갑질의 희생물이 되어 갖은 수모와 설움을 당했던 바로 그 인물! 상사와 부하직원의 위치가 뒤바뀐 상황, 이제 어떤 일이 펼
흔히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속인들은 일제강점기 이래 권력의 탄압을 받았다. 개신교 장로였던 이승만 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5‧16군사 쿠데타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의 탄압은 더욱 거칠어져서 생존 자체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몸부림으로 정부의 반공 이념 굳히기에 편승해 ‘대한승공경신연합회’를 조직하여 정부의 인정을 받으려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이 단체에 대한 법인 등록 허가는 1997년에서야 이루어졌고 그것도 ‘종교단체’가 아니라 ‘일반사회단체’에 머물고 말았다. 결국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지 못한
‘부처님오신날’을 맞을 때마다 참으로 많은 감회가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만났기에 나라는 존재가 그래도 이 만큼 의미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큰 감사의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러한 기쁨과 감사의 마음, 거기에는 언제나 부끄러움과 죄송함이 함께한다. 그 귀한 가르침을 받고도 제대로 실천 못하는 자신에 대해, 그래서 그 가르침을 사회적으로 회향해 이 세상을 불국토로 가꾸어 가지 못하는 나와 우리 불자들에 대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위 없는 진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그 위 없는 가르침이 왜 세상의
코로나19 이후 한국의 종교는 어떻게 될까. 전문가들은 쇠퇴를 앞당길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 사태를 막는 종교의 역할에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보이지 않게 국가나 지자체의 방역방침에 협조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신천지 사건에 대해 기성종교는 연대책임을 짊어져야 할 판이다. 자신의 사회적 책무를 등한히 함으로써 신천지의 탄생을 도왔다. 또한 의료가 중심이 된 전쟁터에서는 어떤 역할도 하지 못했다. 대중들은 과학이 더 안전을 강화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나아가 이 사태의 근본원인인 자본주의나 그것의 세계화인 신자유주
2020년 새해 달력을 보면서 많은 직장인들은 마음이 설레었다. 부처님오신날인 4월30일(음력 4월8일)부터 5월5일 어린이날까지 샌드위치 휴일로 이어지는 황금연휴가 선물처럼 주어졌기 때문이다. 부처님오신날은 달력에 빨간 색으로 표시되는 법정 공휴일이다.우리나라의 공휴일은 대통령령인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에 따른다. 매주 일요일, 5대 국경일 중 제헌절을 제외한 삼일절·광복절·개천절·한글날, 1월1일, 설날 전후 3일, 추석 전후 3일, 부처님오신날, 어린이날, 현충일, 기독탄신일 등이 연중 공휴일이다. 이 가운데 종교기념
1963년부터 1977년 사이에 ‘불교신문’에 실렸던 법정 스님의 글 68편을 수록한 책 ‘낡은 옷을 벗어라’가 지난해 출간되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한결같이 ‘주옥같다’는 표현만으로는 그 느낌을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로 감동을 주고 있다. 그 중 몇 편, ‘침묵은 범죄다’ ‘부처님, 이 제자의 목소리를’과 ‘이 혼탁과 부끄러움을…’은 내가 십수 년 전 발굴해서 다른 매체에 게재한 적이 있는데 “법정 스님이 이렇게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쓰셨다고요?” 하면서 놀라는 이들이 많았다. ‘맑고 향기로운’ 스님의 글에만 익숙한 독자에게는
코로나19 긴급재난지원금을 놓고 지루하고도 상투적인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코로나19가 이제 좀 수그러드나 싶으니 그 뒤의 이야기로 정치권이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의 논란은 참으로 영양가 없다는 생각이 국민들의 뇌리에 박혀 있는데, 코로나19 지원금 이야기 또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한 느낌을 받게 하는 것이 지금 상황이다.국민의 생각이 엇갈리고 있으니 정치권도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 아니냐고 쉽게 말할 수도 있다. 정치라는 것이 국민 여론을 중시해야 하는 것은 틀림없지만, 국민의 생각을 수렴해서
이보다 전면적이고 무차별적인 전쟁은 없다. 그렇다고 총과 대포로 섬멸하는 적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인류는 지구의 탄생 이래 최초로 하나가 되어 보이지 않는 적을 향해 방어전을 펼치고 있다. 적이 가진 무기는 취약한 인간의 몸에 기생하는 것뿐인데도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있다. 인류가 쌓아올린 지식은 과연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더구나 사회주의 종주국 소련의 몰락으로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쾌재를 부른 사람들은 이 비참한 현실에 어떤 처방을 내릴 수 있는가. 자본의 탐욕이 개척한 신자유주의의 루트는 그야말로 대유행의 통로가 되
괴물에게 먹히듯 트랙터에 빨려 들어간 유채꽃들이 산산조각 흩뿌려진다. 샛노란 평원의 곱디고운 유채꽃밭은 그렇게 짓이겨져 참혹하게 망가져 버렸다. 장기간 이어진 ‘사회적 거리두기’가 느슨해지면서 상춘객들이 제주도로 몰려오자 서귀포시가 결국 3만평의 유채꽃밭을 갈아엎은 것이다.2020년 4월은 참으로 ‘잔인한 달’로 기억될 것 같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일상을 바꾸고, 온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 지구 최상의 존재라 자부하는 인류가 ‘이 하찮은 바이러스’에 의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간 사람들이 만나 어울리며 해왔던 모든 사회적 행
벌써 여러 달째 ‘웬만한 현미경으로는 알아볼 수도 없는 초미세 존재인 코로나 바이러스-19(약칭 COVID-19)’가 온 세상을 떨게 하고 있고, 그 때문에 전 세계의 교육‧종교‧문화예술‧체육 관련 시설들이 거의 문을 닫고 있다.사태가 심각해지면서 전국 사찰을 찾는 발길도 거의 끊겨서 “절간 같아요!”라는 말이 오가는데 이 말을 하는 이나 듣는 이나 가슴이 멍하다. “어쩌다 이 상황까지 왔을까? 언제 이 비상사태가 끝날까?” 스스로에게 묻고 가족‧친구‧도반들과도 물음을 주고받지만 대부분 아무 답도 못한다. 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글
n번방 사건에는 현대 우리 문명과 사회가 지니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이 참으로 많이도 모여 있다. 종합문제세트라고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보고 또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할까? 그것이 앞으로의 우리 사회가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까를 결정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될 것 같은 느낌이다.우선 n번방 사건은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에너지이면서, 또 가장 통제하기 힘든 성 에너지가 잘못된 형태로 표출되어 일으킨 것이다. 성 에너지는 인류의 존속을 위한 근본 에너지이며,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성(性) 사이의 상호작용을
코로나19보다 앞서 인류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바이러스는 자본주의다. 그 특징의 유사성은 놀랍도록 닮았다. 이 양자는 무엇보다도 무차별하다. 지역, 인종, 성별,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 더구나 저항력이 약한 사람들, 경쟁에 낙오된 사람들, 낮고 낮은 곳에 사는 사람들을 더욱 짓누른다. 틈 사이로 공략하면서 오랫동안 축적한 사회시스템의 허점을 잘 이용한다. 양자는 오랫동안 잠복해 있었다. 전자는 동물의 몸에 진화하지 않은 채로 숨죽이며 있었지만, 지금은 인간 숙주를 만나 세계로 확산 중이다. 후자는 일찍이 인간의 마음을 숙주로 하
시절이 하 수상(殊常)하다. 삼월이면 남녘에서 전해지던 매화 향기 봄소식이 코로나 포비아에 밀려 아득하기만 하고, 대한민국은 지금 멈추어 선 듯하다. 공식적인 국가 행사조차 연기되거나 취소되고 불가피한 경우 최소 규모로 진행되고 있다.올해로 101주년을 맞이한 3·1절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다수 지자체는 3·1절 기념식을 취소한다는 공문을 내걸었고, 대통령이 참석한 중앙정부 기념식도 50명 정도의 관계자만 모여 조촐하게 진행되었다. 지난해 1만명 넘게 참석하여 화려하게 거행된 광화문 행사에 비하면 조촐하다 못해 초라하기까지 한 기념
곧 잠잠해질 것이라고 여겼던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일명 COVID-19)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면서 온 세계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 아시아‧유럽과 미주 지역의 여러 나라를 공격해 많은 희생자를 내고 있지만 이 바이러스에 맞설 저항 수단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고 있다.(아직 확진자가 나오지 않은 아프리카도 안전지대가 아님은 누구든 알고 있다.) 설사 효과가 뛰어난 치료약이 준비된다고 해도, 그것이 바이러스균을 잡는 것보다 이 바이러스가 변종으로 진화하는 속도가 훨씬 빨라 우리의 노력 자체를 무력화할 가능성도 있어서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코로나19가 정말로 전국을 휩쓸고 있다. 우리 국민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고 있고, 그 여파가 정치, 경제, 사회 등 제반영역을 온통 휩쓸고 있으니, 당장 그 전파가 언제 끝날지도 큰 걱정이지만 그 뒤에 미칠 영향은 또 어떨지 우려된다. 이 사태를 무사히 마무리하지 못하면 병의 확산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는 물론이요, 그 후유증으로 오는 피해가 장기간 우리를 지배할 것이다.우선 이 코로나19 사태를 보는 기본적인 태도는, 그것이 우리들의 공업(共業)이라는 시각이어야 한다. 단순히 남에 의해 이루어진, 그렇기에 그들을 차단하고 격리하는
여수에서 익산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승객 한 사람이 열심히 떠든다.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어 이야기를 하지 않는 탓에 그 사람의 말만 크게 부각되었다. “예전에는”이라는 말이 간간이 들리는 것으로 보아 요사이 세태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는 것 같다. 심신이 피로한지 누구도 그를 말리지 않는다. 이웃나라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생목숨이 사라지는 판에 침묵이라도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한 순간도 쉬지 않는다. 불안이 깊어지는 이 사태의 원인을 깊이 성찰하는 시간이 되면 좋지 않을까.전 세계가 침묵을 지켰으면 좋겠다. 현대사회는 너무나 많
지난해 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시작된 ‘COVID-19’라는 이름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사태가 우리 일상의 모습을 바꾸어 놓고 있다.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람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크고 작은 행사들이 취소되고, 이로 인해 경제 상황이 악화되고, 민심은 흉흉해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심각한 현상은 사람들 사이에 번져가는 막연한 공포심이다. 공포와 두려움은 전염병만큼이나 전염성이 강하다. 점점 더 불안해진다. 이런 때 종교가 종교답게 제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천재지변이든 역병이든 인류 역사에 크고 작은 재앙은 늘 있어
1945년 민족해방이 되면서부터 시작되어 지루하게 끌어오던 비구‧대처 갈등을 형식상 봉합하고 통합종단으로 출범한 조계종은 ‘도제양성‧역경‧포교의 3대사업’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이 세 가지 불사는 아직도 종단 운영의 기본 원칙으로 자리 잡고 있고, 이에 대해 어느 누구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종단의 숨을 이어가기조차 힘들던 1960년대 초반에 이런 과제를 내세운 데 대해서는 당시 종단 지도자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데 법정 스님은 종단 기관지 ‘불교신문’(당시 제호 ‘대한불교’) 1964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