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출가한지 얼마나 되었느냐?”순식간에 인 적막의 중심부로 서릿발 호통이 떨어졌다.“여태 부처가 되지 않고 무엇을 한 게야!”덕신 스님은 불교계 최초의 장애인 포교단체 ‘원심회’를 창립(1988)한 주인공이다. ‘좋은 벗 풍경소리’ 창립(1985) 초기 2대 회장을 맡아 찬불가 보급에 앞장서 온 장본인도 덕신 스님이다. 역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한 의현, 탄성, 월주, 고산, 정대 스님은 덕신 스님의 포교 원력을 일찌감치 알아보고는 주요 소임을 맡겼다. 2002년까지 12년 동안 포교국장(3년), 사회국장(3년), 문화국장(4년
“문, 잠그겠습니다.”혜일 스님(강진 백련사 주지)의 무심스런 한 마디가 떨어지자 금속성 외마디가 땅거미 내려앉은 만덕산(萬德山)의 허공을 갈랐다.철커덕!별을 안은 공간과 두 평 남짓의 공간 사이에 빗장이 걸렸다. 이제부터 석 달 동안 마주할 수 있는 건 침묵과 사면의 벽뿐이다. 붉은 함성이 온 거리에 차고 넘쳤던 그 해(2002) 5월의 보름달은 백련사 무문관(無門關) 맞배지붕에 유난히도 시린 빛을 내려놓았다.군사 훈련 강도가 센 것으로 정평 난 보병8사단(오뚜기 부대·군 전투력 시범부대)에서 완전군장 30km 산악구보 선수로도
6·10 항쟁의 함성 속에 타오른 민주화 열망이 이 땅을 뜨겁게 달굴 때 법보는 출범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와 민족의 역사를 새로이 열어야 할 중대한 전환기에 처해 있다’로 시작한 ‘천수천안의 거보(巨步)’ 제하의 창간 사설에서 법보는 ‘그동안 유보되었던 인간의 자유와 기본권을 회복하고 진실한 표현의 자유로 인간의 자주성과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실현’될 수 있도록 지혜를 발휘할 것이라 천명했습니다.평화·공존의 인생관에 따른 양심적 결단을 지키고자 군사훈련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던 오태양씨의 외침을 올곧게 담아낸 건 법보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뉴스 소비가 급증하고 있는 반면 광고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언론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계언론 역시 이 선상에 놓여 있는 가운데 ‘법보신문’도 ‘생존·전법’이라는 은산철벽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길을 떠나라!”는 부처님 전도 선언은 오늘도 지면을 통해 끊임없이 실현해 가야 한다. 30년 전 첫 발을 내딛으며 품었던 초심(初心)에서 화두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법보신문’ 창간 멤버였던 최승천 조계종 출판사 부문사장을 만나 대담을 나눴다.‘주간불교’의 전신인 ‘불교회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양복을 입으라니요? 대통령에 당선된다 해도 양복 입을 일 없습니다. 저는 승려입니다!”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1962.4) 했지만 정화운동(1954) 이후 9년에 걸친 비구·대처 간의 분규 후유증은 도량 곳곳에 남아 있었다. 동국대도 그러했다.1956년 7월 이후 동국대는 당연직 총장을 제외하면 ‘임시·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는 동국대 자체운영 시스템이 사실상 붕괴됐음을 방증한다. 불교재산관리법 공포(1962.5.30) 직후 유수의 사찰 대부분이 조계종으로 속속 등록됐지만 동국대는 대처승이 장악하고 있어 녹록지 않았
“마음은 뇌의 작용에 불과하다!”마음 통찰이 부족했던 서양 과학자들이 동양 수행인들에게 던진 일언이다. 그러나 기능성 자기공명 영상(FMRI. Func tional magnetic resonance imaging)이라 불리는 뇌사진 촬영 기술에 의해 그 선언은 산산조각 났다. 뇌사진을 통해 입증된 결과는 간단명료했다. 불교수행이 뇌의 전두엽 두께와 건강, 심지어 선심소(善心所)와 관련된 뇌의 영역을 활성화시켰다는 것이다. 이는 뇌세포가 형성되고 나면 바뀌지 않는다는 서양의 관념을 깨버리는 결과였고, “마음이 뇌를 바꾼다”는 가설을
관음종은 창종 50주년(2015)을 1년 앞둔 2014년 11월 근현대 전법의 사표로 칭송 받았던 개산조(開山祖) 태허 홍선(太虛 泓宣) 스님의 부도와 탑비를 조계산 선암사에 봉안했다. 태허 스님의 출가사찰이기는 하지만 선암사는 조계·태고 분규사찰이다. 한 종단, 한 사찰의 승낙도 어려운데, 두 종단의 허락을 받아내야 가능했던 법회였다. 결코 녹록치 않은 일이었음에도 그날 법회에는 조계·태고 두 총무원장의 축사가 있었다.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사무총장이자 관음종 총무원장인 홍파(泓坡) 스님의 덕과 역량이 발현됐기에 원만히 회향할 수 있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 울산군 편에 이 고장의 빼어난 여덟 풍경을 이르는 ‘팔영(八詠)’이 실려 있다. 제목만 적혀 있을 뿐 시는 없어 조선 당시의 울산 정취를 느낄 수는 없다. 8영 중 하나가 산사송풍(山寺松風)인데 어느 절의 솔바람일까? 한 여름 솔밭에서 인 그 소리 청량할 텐데.먼 옛날부터 울산 사람들이 손꼽은 팔경(八景)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법하다. ‘세종실록지리지’와는 결이 다른 풍경을 택했는데 그 중 하나가 백양사(白楊寺)의 새벽 종소리(白楊曉鐘)다. 소리를 보라! 낯설지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절로 걸음
바다에서 일어선 해가 의상봉에 걸터앉으려 할 즈음 북한산 삼천사(三千寺)에 들었다. 밤이슬에 몸을 씻은 풀잎들이 하나 둘씩 일어서자, 새들은 물 묻은 그대로 날아 미루나무 꼭대기에 앉는다. 그리고 바람 한 점 대웅전 처마 끝 풍경에 닿는다. ‘뎅그렁∼’‘양수강이 봄물을 퍼 올려/ 온 산이 파랗게 출렁일 때// 강에서 올라온 물고기가/ 처마 끝에 매달려 참선을 시작했다// 햇볕에 날아간 살과 뼈/ 눈에 비에 얇아진 몸// 바람이 와서 마른 몸 때릴 때/ 몸이 부서지는 맑은 소리’ (공광규 시 ‘수종사 풍경’ 전문)산사의 여름 아침은
‘지붕을 촘촘히 잇지 않으면/ 하늘에서 비가 올 때 새듯이/ 마음을 단속해 행하지 않으면/ 음탕한 생각이 이것을 뚫는다. (蓋屋不密 天雨則漏 意不惟行 淫泆爲穿)’‘법구경’ 쌍요품에 나오는 구절의 일반적인 번역이다.대부분의 경전이 그러하듯 ‘법구경’도 두 언어로 쓰여 졌다. 팔리어로 쓰인 것을 담마파다(Dhammapada)라고 하는데 이는 남방으로 전해졌고,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것을 다르마파다(Dharma pada)라고 하는데 이는 북방으로 전해졌다. ‘개옥불밀(蓋屋不密) 천우즉루(天雨則漏) 의불유행(意不惟行) 음일위천(淫泆爲穿)’
‘후두둑, 탁!’세차게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양곤(Yangon) 거리를 30여명의 스님들이 우산을 펴 든 채 발우 하나 들고 줄지어 유유히 걸어간다. 땅을 차고 튀어 오른 빗방울들이 가사 끝자락을 쉼 없이 적시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다. 땅을 향한 시선은 흔들림이 없고, 하늘 향한 어깨는 태산이라도 떠받칠 듯 꼿꼿하다. “2500년 전 부처님께서 행하신 탁발을 그대로 따르는 우리가 비구!”임을 침묵의 행보로 일갈하고 있음이다.“무릇 승가의 풍류는 걸식을 활계(活計)로 삼는다”고 천명한 일본 에도시대의 탁발승이자 시승(詩僧)이었던 료
한반도 명산(名山)을 손꼽을 때 인용하는 말이 있다. ‘동금강(東金剛)·남지리(南智異)·서구월(西九月)·북묘향(北妙香)!’ 오늘 지리산이 빚은 피아골을 오른다. 봄기운 가득한 5월의 피아골은 밤새 머금었던 수분을 흩뿌리고 있다. 저 작은 물방울이 모여 운무가 되어서는 작은 산등성이를 넘나들며 구례, 하동 땅에서 움트는 찻잎을 키워낼 터다. 피아골 연곡사 아래 약 1.2km 지점에 2013년 개원한 ‘혜우전통덖음차제다교육원’이 있다.나는 누구인가? 의문 품다청담 스님 책에서 답 찾아군 제대 후 방황 끝 출가‘구증구포’는 한약 법제전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