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 한국불교가 처한 특수한 상황으로 다불교(多佛敎) 현상의 여러 문제점을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그러나 다불교적 상황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기회도 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과거와 달리 오늘날 세계는 고립적으로 발전했던 다양한 지역불교 전통들이 함께 소통하고 공존하면서 새로운 불교의 역사를 써 나가야 할 상황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한국불교는 이러한 세계불교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 한국불교가 맞고 있는 상황을 잘 이해하면서 21세기 새로운 교판과 교학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한국불교는 21세기 세계불교를 위한
네이버와 다음이 주도하는 포털의 시대가 열리자, 너도나도 홈페이지를 만들던 때가 있었다. 사찰도 예외는 아니었다. 홈페이지를 만든 이유는 불특정 다수에게 사찰을 알리고 내용을 게시하기 위해서였다. 즉 기저에 가격 대비 우수한 성능의, 가성비에 따른 홍보와 알림의 필연성이 존재했던 것이다.그러나 개인 SNS가 활성화되면서, 포털의 시대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때문에 이제 홈페이지는 네이버 밴드나 페이스북(메타) 보다, 더 꼰대와 아재 같은 서비스로 전락하는 모양새다.지난 반세기 동안 현대 문명은 ‘신문→라디오→TV→포털→SNS’
‘사이언스’와 ‘테크놀로지’, 그리고 ‘시민혁명’과 ‘의회민주의’로 새롭게 정비된 서양의 ‘근대 유럽’과 그 유럽을 모델로 한 ‘근대 일본’은 온 세상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현재의 G7이다.저들은 자신들이 세운 철학, 역사학, 문학, 신학, 언어학, 문법학, 문헌학, 그리고 ‘자연과학’이라는 ‘보편학’을 기반으로, 제국(帝國)의 확장을 위해 앞을 다투어 ‘아시아 경영’ 내지 ‘아프리카 경영’에 뛰어들었다. 이 과정에서 저들은 서유럽 이외 모든 지역을 ‘지역학’의 범주에 넣어 연구했고 놀라운 성과도 내었다. 이제 세상의 학문,
앙산이 땅에 가래를 꽂은 이야기가 있다.본 문답은 위앙종(潙仰宗)의 개조인 위산과 앙산 사이에 있었던 문답이 그 주제이다. 앙산혜적(仰山慧寂: 803~887)이 대위산(大潙山) 영우(靈祐: 771~853) 문하에서 직세(直歲)로 있었다. 직세는 선원에서 요사를 수리하고, 도량을 관리하며, 인부나 공사를 감독하는 직무에 해당하는데, 본래는 일 년 동안 직무를 담당한다는 의미였다.어느 날 앙산이 작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위산이 물었다. “어디에 다녀오는가.” “밭에 다녀오는 길입니다.” “밭에서 일하는 사람은 몇 명이나 있던가.” 앙산
‘대반열반경’은 부처님의 마지막 여정을 그린 경전이다. ‘디가니까야’에 16번째로 수록되어 있는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는 부처님의 마지막 공양과 관련된 내용이 나온다. 대장장이 아들 쭌다(Cunda)가 바로 마지막 공양을 올린 주인공이다. 당시의 대장장이는 오늘날로 치면 하이테크놀로지에 종사하는 전문가이다. 그만큼 자산가 그룹에 속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장장이 아들 쭌다는 부처님과 비구 승가를 모두 초대하여 공양을 올리게 된다. [쭌다] 세존이시여, 이제 시간이 되었습니다. 음식이 준비되었습니다.… 세존께서는 비구승가와 함께 지정
이번에는 삼계교 역사에 어떤 특이점이 있고 이 사상은 어떻게 신라로 들어오게 됐는지를 다뤄보고자 한다. ①삼계교는 역대 조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신행 스님(540~594)의 입적 이후로도 무려 400여년간 유지됐다. 10세기초 (宋代初)가 되어서야 그 흔적이 끊어졌다.②불적(佛籍) 이외의 사료가 제법 많다. 탄압으로 인해 불교 사적류가 많이 사라졌다. 이에 사적류보다는 금석문과 불교사적(佛敎史籍) 이외의 사료가 다수다. ‘역대삼보기’의 신행 약력과 ‘속고승전’ 습선편에 있는 전기(傳記)를 통해 신행(信行) 스님에서 본제(本濟),
벌써 올해도 마지막 달까지 와버렸다. 참으로 세월이 빨라도 너무 빠르다. 시간은 나이의 숫자와 같은 속도로 흘러간다고 하니 앞으로가 더 걱정이다. 1년이 이렇듯 빨리 흘러갔지만 생각해보면 지난 10년의 세월이 그림자같이 지나가 버린 것만 같다. 처음 ‘세심청심’ 원고를 청탁받고 이름이 너무 좋았다. 혼자서 ‘씻는 마음 깨끗한 마음’이라고 어린 시절 표어같이 이름 지어놓고 항상 즐거이 글을 쓴 것 같다. 때로는 마감 시간에 쫓겨 허둥지둥 글을 쓰기도 했지만 때로는 마음 속에서 울려오는 이야기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담아 독자들에게 내보이
얼마 전부터 모임을 만들어 함께 영어 ‘기독경’(기독교 성서)을 읽는다. 대학생 시절부터 우리말로 된 ‘기독경’을 읽어보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가 멈춘 적이 있었는데, 아마 요즈음에는 쓰이지 않는 옛날 말투가 어색하여 읽는 데에 불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기독교 관련 서적이나 서양 문학작품을 읽다 보면 자주 등장하는 신‧구약의 구절들을 만나게 되어 내게도 익숙하다. 기독교 입장에서 쓴 글에서는 ‘선한 하느님과 그 제자’들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리고 있는 구절들을 인용하지만, 반대로 기독교를 비판하는 작가의 글에서는 ‘복수’를
영등포구에는 어디서든 볼 수 없는 특별한 축제가 있다. 서울시립영등포장애인복지관이 주관하는 영화제이기도 하고 다양한 분야의 인권이 모이는 축제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나나, 인권페스티벌’이다.‘나나, 인권페스티벌’은 영등포 지역 내 인권플랫폼 연대단체와 주민이 함께 만들어가며 장애·종교·국적·성별·나이 등 모든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소중함을 존중하며 사회통합을 이루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축제다. 올해 4회째를 맞이했는데 지역을 넘어 인권을 대표하는 행사로 발돋움 중이다.행사 명인 ‘나나’는 ‘다르거나 같거나’의 끝말을 가져온 것으로
[1612호 / 2021년 12월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한때 우리는 사랑 그 자체였다. 사랑이 끝나면 삶도 끝나는 줄 알았던 시절. 이루어지면 이루어지는 대로, 못 이루어지면 못 이루어지는 대로 사랑은 유형무형의 상처를 남기고 지나간다. 사랑의 상처를 ‘화상’에 비교하는 것은 꽤 적절하다. 뜨겁기도 하지만, 사랑의 상처는 상대방에게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가다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샅샅이 알고 싶고 항상 껴안고 싶은 마음. 그 간절함은 기쁨인 동시에 고통이었다. 사강은 그 기쁨과 고통을 잘 아는 작가다. 그의 소설은 사랑의 다양한 양상을, 그 절절함을 피부에 닿듯 그려낸다. 그럴 수 있
Q. 올해 70세로 평생을 전업주부로만 지내왔는데 요즘 들어 가슴이 답답해서 하루에도 깊은 한 숨을 수십 번 내쉽니다. 젊을 때는 아이들 키우랴, 남편 내조하랴 정신없이 앞만 보고 살았지만 지금은 앞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남편 은퇴하고 아이들 결혼시키고 나니 할 일이 더 많아졌어요. 하루종일 집에 있는 남편 세 끼니 밥 차려주고, 일주일에 한 두번 맞벌이하는 딸네 집에 찾아가 밑반찬이라도 만들어놓고 오려면 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갑니다. 무엇보다 이제는 몸도 예전같지 않는데 여전히 나를 위한 삶은 없는 거 같고 허무한 마
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화엄사로 539 화엄사 명부전에 봉안되었던 ‘시왕도’ 1점이 2001년 12월 28일 도난됐다. 이후 19년만인 2020년 1월 서울의 한 경매시장에 도난된 포항 보경사 불화 2점이 나와 관련자들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 불화 역시 개인 사립박물관장의 은닉처에서 함께 발견돼 회수했다.구례 화엄사(華嚴寺)는 통일신라 경덕왕 때 연기조사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많은 고승들이 머물렀던 화엄종의 중심사찰로서 명성이 높다. 1424년 조선 초기에는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되었지만 임진왜란 때 전각들이 모두 불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는 선문에서 돈오(頓悟)를 개념적으로 분석하겠다는 시도를 부정적으로 여길 것은 쉽사리 예상된다. 그러나 이야기를 한번 들어보기 부탁드린다. 특히 ‘불립문자’라는 멋진 표현과 ‘돈오’라는 근사한 단어를 사용하며 스스로의 입장을 펴나가면서 다른 주장에는 “입 다물어라!”고 한다면 이치에 맞지 않기에 그렇다. 게다가 불립문자라는 주장은 다음과 같은 역설(逆說)에 빠진다.(1)불립문자가 진리이면, 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진리를 문자로 표현했으므로, 진리가 아니다.(2)불립문자가 진리가 아니라면, 문자로 표현할 수
허리를 다친 초롱이네 할머니가 아가 초롱이를 들여다보고 있다. 초롱이를 들여다보면 다친 허리가 빨리 낫는 기분이다. 이 녀석의 첫 소리는 “응아”였다. 눈과 귀가 열리면서 자기 주변의 것을 보고 소리를 듣는다. 어르면 말하듯이 옹알거린다. 눈으로 움직이는 것을 주시한다. 이러한 초롱이를 관찰해서 쓴 초롱이네 할머니의 동시 한 편을 살펴볼까? 초롱이의 첫 뒤집기 / 정선혜갓난아기 초롱인 베란다 앞 나무를 보고 생각해요. 하늘거리는 초록 잎사귀나무의 날개라고 생각했지요. 나무가 날게 되면 뿌리째 뽑혀 날아갈까?나무가 잘 때 초롱인 꿈을
요즘은 교학보다 수행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수행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절실히 느낀다. 수행에 있어서 사띠(sati)의 중요성은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특히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 bhāvanā)에서 사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높다. 한마디로 사띠 없는 수행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만큼 사띠가 수행에서 중요하다는 뜻이다.‘아난다 숫따(Ānanda-sutta, 阿難經)’(AN10:82)에서 붓다는 열 가지 불가능한 경우와 열 가지 가능한 경우에
西來祖意最當當 自淨其心性本鄕 서래조의최당당 자정기심성본향妙體湛然無處所 山河大地現眞光묘체담연무처소 산하대지현진광(서쪽에서 오신 조사의 뜻은 당당하기가 으뜸이네/ 스스로가 그 마음을 맑게 하면 마음의 본고향이라./ 묘체는 담연하여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음이기에/ 산하대지가 참다운 빛을 그대로 드러내도다.)이 게송은 ‘승가예의문(僧家禮儀文)’에 수록된 무상계게(無常戒偈)에서 영가에게 무상(無常) 법을 설하고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마무리 게송이다. 참고로 무상계게는 ‘원각경’의 보안보살장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태종무열왕 8년(661) 원효의 45세 즈음 무덤 속에서의 깨달음과 요석공주와의 만남이라는 두 사건은 그의 불교적 삶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이후 20여년 동안 원효는 저술활동과 대중화운동에 매진한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는 민간에 전승되는 설화를 모은 향전(鄕傳)을 인용하여 대중화운동의 모습을 간명하게 전해주고 있다. “원효는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뒤부터 속인의 의복으로 바꿔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불렀다. 우연히 광대들이 굴리는 큰 박을 얻었는데, 그 모양이 기괴하였으므로 그 형상을
승이 풍혈에게 물었다. “깨침[道]이란 무엇입니까.” 풍혈이 말했다. “오봉루 앞에 있다.” 승이 물었다. “그러면 깨친 사람[道中人]은 무엇입니까.” 풍혈이 말했다. “성황사(城隍使)에게 물어보라.”풍혈은 풍혈연소(風穴延沼: 896~973)로 남원혜옹(南院慧顒: 860~930)의 법맥을 이은 임제종 제4세이다. 본 문답은 지극히 고상한 것은 지극히 가까운 곳에 있음을 에둘러 일러주고 있다. 깨침[道]은 수행하는 납자들에게는 궁극의 목표이다. 평생을 바쳐서 깨치려는 수행은 깨침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그것을 임의대로 활용하려는 욕구이
바라문 청년 수바는 바라문 계급 출신으로서, 바라문에 대한 자부심과 당시 출가 사문에 대한 다소의 적대감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수바가 출가 사문보다 바라문과 같은 재가자의 삶이 더욱 착하고 건전한 것을 성취한다는 것을 부처님께 질문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수바는 부처님께 양자택일의 질문을 했지만, 부처님은 재가자이건 출가자이건 잘못된 실천을 하느냐, 올바른 실천을 하느냐에 따라 판단해야지, 재가자가 더 낫다거나 출가자가 더 낫다고 일방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가르침을 주셨다